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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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해진다.

우리의 인간성이 양심보다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지,

그리고 만일 우리 중 누구라도 궁지에 몰리면 변하게 될지 말이다.

나는 그날 목격했다.

모두 자신들이 믿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수잰 레드펀 <한순간에> p355 / 열린책들


같은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의인이 되고, 누군가는 자기 또는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특히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수잰 레드펀의 소설 <한순간에>는 갑자기 닥쳐온 재난과 재난을 겪으며 보여지는 사람들의 민낯, 그리고 재난 이후 사람들에게 남은 죄책감과 같은 고통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무겁지만은 않다.

10대 하이틴 드라마를 보는 듯 발랄한 감성과 순수함이 자아내는 감동을 갖추고 있어 단숨에 읽힌다.


소설의 화자는 핀이라는 10대 소녀다.

핀에게는 위로는 곧 결혼을 앞둔 오브리 언니와 남자친구 벤스에 푹 빠졌지만 어딘가 다크한 매력의 클로이 언니, 그리고 아래로는 지적 장애를 가진 남동생 오즈가 있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소울메이트 같은 친구 모와 언제나 함께다.


핀의 가족들은 겨울이면 스키를 즐기러 할아버지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날은 이웃사촌인 캐런과 밥 그리고 그들의 자녀이자 핀의 동급생 내털리가 합류한다. 엄마의 과잉보호 탓에 스키를 타보지 못한 핀의 친구 모도 함께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날, 끔찍한 교통사고로 핀 가족의 캠핑카가 절벽으로 추락하고 만다.

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핀의 아빠는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


죽은 핀은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살아있었다면 보지 않았을 사람들의 내면들을.

항상 냉정하고 쌀쌀맞기만 하던 엄마의 용기와 깊은 사랑을.

그리고 엄마보다 더 자신을 잘 이해해준다 여겼던 캐런 이모와 밥 삼촌의 이기심을.

그렇다고 엄마 역시 언제나 항상 의로운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때는 자신도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남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남겨진 사람들은 저마다 위기의 순간 택한 자신의 선택들로 구출되고 난 후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린다.


작가는 사고가 닥치고 구출되기 전까지의 과정보다 그 이후 회복의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다룬다.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삶, 깊고 길었던 우정은 사라지고 부부 간의 신뢰도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변해버린 시간.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누구는 아예 외면하고 누구는 자신의 몸에 난 구멍이라 생각하며 온전히 감내해낸다.

핀은 차라리 자신을 좀 더 가볍게 생각해주기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바란다.


반면 재난의 순간에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덜 느끼며 살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도 시한폭탄을 작동시키는 버튼 같은 게 있어 누군가 건들면 펑 하고 폭발해버릴만큼 그들의 일상은 아슬아슬하다.


핀의 언니 오브리만이 결혼 준비로 이 여행에 동참하지 않아서 사고에 연루되지 않는데 그녀가 주는 무심한 듯한 일상의 에너지가 가족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어쩌면 가족들에게 연민과 동정보다도 삶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일상성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간간히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생명이 좌우되는 극한의 상황에서 도덕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 받아야 하는가?


"개인적인 희생을 치러야만 진실한 선일까?

풍족할 때는 누구나 관대할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누구든 이타적일 수 있다. (중략)

하지만 과연 내가 캐런의 비겁함을 탓할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워서 자기 자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그런 용기와 힘을 갖고 태어났을까?

만약 그렇다 해도 용기를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 걸까?"

수잰 레드펀 <한순간에> p311 / 열린책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포와 충격을 감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오히려 현실을 자기 편의대로 왜곡해버리기도 하는 사람들.

하지만 상황을 벗어나서 자신의 부도덕함을, 순간의 이기심을 스스로 목도했을 때, 그때는 외면하고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순간의 선택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기만해왔던 일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결국 캐런과 밥의 이기심이 폭로되자 언론과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한다.

캐런과 밥의 삶은 순식간에 피폐해지는데 이런 결말이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했다.

코로나 19 팬데믹이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봄에 확진자를 향했던 비난과 마녀사냥에 가까운 신상털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자격이 있을까? 오직 사건의 당사자들만이 이들을 비난하고 용서를 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핀 역시도 캐런과 밥에 대해, 그들이 보여줬던 일상에서의 온정을 떠올리며 연민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갈등한다. 

그만큼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타인은 쉽게 비난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게 아닐까?


나에게도 절대절명의 순간이 온다면, 얼마나 현명할 수 있을지...

재미있게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책장을 덮는 순간 고통스러운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었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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