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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평점 :
"능력주의가 내뿜은 밝은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안에 존재하는 이념적 덫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능력주의의 밝은 빛은 부유층에게 가짜 자부심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거짓 분노를 심어줌으로써 그에 따른 불평등이 두 집단에 끼치는 해악을 드러나지 않게 한다."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p477 / 세종서적
지난해 어디서나 회자되던 초인기 드라마 <SKY 캐슬>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벌이는 부유층들의 교육열과 입시 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 드라마를 통해 엘리트들은 어떻게 자식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부를 세습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숨막힐만큼 과도한 경쟁과 압박, 그리고 이를 견뎌냈기에 절대적으로 공고해지는 그들만의 리그...
이제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옛 말이 되어버린, 사회적 이동이 불가능해진 세습 사회.
한국만 그런줄 알았더니 왠걸... 미국은 더 심했다.
그 자신도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대니얼 마코비츠가 거의 내부자처럼 폭로하는 책 <엘리트 세습>은 능력주의의 허상을 비판한 책이다.
능력주의는 마치 공정한 룰처럼 여겨져왔다.
기존 귀족들이 태생부터 지대 자본을 상속받아 누가 부여했는지도 모를 특권을 누린 것에 반해, 현대의 엘리트들은 본인들의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자리까지 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삶은 사실상 포기해가며 끊임없이 일한다.
그래서 그들이 얻는 고액의 연봉은 능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때문에 능력주의로 인한 불평등은 건드려선 안될 성역처럼 여겨진다.
지금의 엘리트가 이룬 부는 그들의 근로 소득이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도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저자는 고숙련자들의 노동과 미숙련자로 양분되어 가는 근로 시스템 자체가 능력주의적인 논리가 경영 전반에 적용되어 나타난 폐해라고 지적한다.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새로운 초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중산층의 삶은 고되다. 게다가 중산층의 침체가 엘리트 계층의 과도한 성장이며 유별난 부유함과 대비되면서 삶은 한층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중산층은 해링턴 시대의 저소득층과 달리 깊고 본능적인 연민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 시대의 하위 불평등은 인도주의 측면에서 대참사였다.
오늘날 상위 불평등은 정치적인 불공평함의 산물이다.
능력주의로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평등 신봉자들의 입장은 한층 더 약화되고 있다.
(중략)
소득이 태생이 아니라 근면성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능력주의 이념은 귀족적인 불평등에 맞서 싸우던 20세기 중반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막강한 도구였으나, 이제는 그 자체가 새로운 질병의 근원일 뿐 아니라 부의 재분배로 침해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인질이 되었다."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p207 / 세종서적
과거 유한계급이 토지와 생산 자본을 물려받던 시절에는 중간 관리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20세기 중반까지 기업은 미숙련 근로자들을 고용해 적절한 교육과 승진을 통해 중간 관리자들을 양성해냈고, 이들이 곧 미국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국이 중산층 사회로 탄탄하게 성장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경제적으로 통합된 사회였다. 부유층과 중산층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들은 한 지역에서 어울려 살았으며 소비하는 재화의 차이도 크지 않았고, 때문에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사회적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 혁신과 복잡한 금융 시스템, 자동화된 경영 기법 등의 도입으로 중간 관리자들의 필요성이 감소되었다.
(저자는 이를 엘리트 스스로가 능력주의적으로 시스템을 왜곡시켜 중산층이 설 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회사는 종신 고용을 폐지하고, 숙련을 위한 교육 제공을 멈췄다. 게다가 제조업의 불황은 중산층의 위기를 초래했다.
반면 그들의 일자리는 고숙련 근로자에게 집중되었다. 기업은 이제 고숙련 근로자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미숙련 근로자로 양분되었다.
엘리트들이 맡은 업무의 전문성은 결코 중간 관리자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고, 이들 간의 임금 격차는 생활 수준부터 사는 지역, 받을 수 있는 교육까지 모든 것에서 구분짓게 만들었다.
능력주의가 엘리트와 중산층을, 그리고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놀라우면서도 우려된 점은 미국의 교육 격차였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미국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인적 자본을 세습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문제는 공교육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사는 지역에 따라 공교육에 투입되는 예산이 달라지는데, 엘리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는 공교육의 예산이 풍부하여 더욱 질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반면, 중산층이 사는 지역에는 공공 도서관 마저 예산이 부족한 형편이다.
무엇보다 평등해야할 공교육에서 이런 차이를 보이니 성인이 되었을 때의 차이는 얼마나 극명할 것인가?
기존에 귀족들이 대물림하듯 들어가던 명문대학교들은 이제 가장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선발한다.
이 때문에 입시 경쟁이 더 없이 치열해졌다.
그리고 명문대 학벌이 보장되면 저자가 말하는 고액 연봉이 보장된 '번지르르한' 직업- 주로 금융, 법률, 경영 컨설팅 업종- 으로 이어지는 카르텔이 탄탄하게 형성된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중산층이 해체 되는 것은 물론 엘리트 역시 파멸하고 있다.
엘리트들은 생애 전반을 정해진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며 자아를 찾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항상 과로에 시달리며 가정과 자신의 사생활 등을 돌보지 못하게 된다.
부유한 삶이 댓가로 따르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불행한 삶일 수도 있다.
또한 엘리트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 받는 압박은 불안과 우울을 야기한다.
미국에서 부유층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 팔로알토의 청소년 자살율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라고 한다.
미국은 꽤나 자율적이고 학구적인 교육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소름 돋도록 한국과 닮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주의.
하지만 이 신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공고해서 깨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20세기 중반의 중산층 시대를 연 기반이 되었던 1920년대 뉴딜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어쨌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공교육을 살리고, 지나친 경쟁을 완화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유층과 중산층이 서로 협력해야만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실 이 책은 내내 능력주의의 허상을 꼬집고, 엘리트와 중산층 간의 격차와 분열을 폭로하는데 할애한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내용과 주장이 계속 반복되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다른 계층과 비교할 때는 안정적이고 행복도가 높은 집단처럼 묘사된 엘리트가 능력주의의 덫에 걸려 불행한 삶을 산다는 주장은 세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감안해도 모순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종신 고용 폐지, 비정규직 증대 등 고용 유연성 정책이나 복잡한 금융 시스템, 무리한 대출로 인한 중산층의 붕괴 등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로 볼 수 있는 부분도 모두 능력주의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어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능력주의가 상대적으로 덜한 유럽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가 빚은 유사한 폐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공정하다 여기고 있는 '능력주의'를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적한 점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기 위해 마련된 수시 제도보다 성적 순으로 줄 세우는 수능을 가장 공정하다고 여길만큼 능력을 신봉하는 사회가 아니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능력주의의 허상, 알고보면 엘리트들은 새로운 귀족에 다름없고, 그들이 더욱 유리할 수 있도록 구축해놓은 판에서 불평등은 점점 심해진 채로 살아가야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비극을 반드시 곰곰히 생각해봐야할 필요가 있다.
공정함이란 약육강식의 논리 속이 아니라, 약자에게도 배려 있는 세상에서 나올테니까.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