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 - 하루에 하나씩, 나와 지구를 살리는 작은 습관
소일 지음 / 판미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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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위해 읽는다.

<제로 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는 그런 책이었다.


제로 웨이스트에 대해 처음 접했던 건 3~4년 전이다. 

나는 독서모임에서 '노임팩트맨'으로 유명한 콜린 베번의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이란 책을 순전히 제목이 마음에 들어 발제했고, 이 책 속에 문명에 대한 의존도를 극도로 낮춘 생활을 실천했던 저자의 삶을 통해 제로 웨이스트를 아주 강렬하게 목격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선뜻 실천하기가 주저되는 삶이었다.


비건도 그러하듯, 결심을 하고 당장 삶을 통째로 바꾸려 하니 어려웠던 것이다.

<제로 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의 저자 소일은 점진적인 삶의 변화를 제안한다. 그것도 아주 소소하게.



일본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몸소 겪으며 물건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미니멀라이프에 입문하게 된 저자는 이제 윤리적인 측면에서 제로웨이스트를 권한다.

우선 쓰레기에 대한 생각을 확장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산 물건은, 쓰려는 물건은, 그리고 버린 물건은 어떻게 되는 걸까? 쓰레기의 종착지를 떠올리면 책임이 무거워진다. 상당수의 쓰레기들이 그냥 매립되어 몇백년간 썩지 않거나, 소각되어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더럽히고, 다른 가난한 나라로 옮겨져 그들의 삶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주의자, 즉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은 내 방과 집에서 물건을 최소한으로 가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버린 물건과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물건이 처분될 때까지 나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소비와 배출뿐만 아니라 물건의 생산 과정도 소비자인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소일 <제로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 p11 / 판미동


그리고 이어서 소비, 위생용품, 외출, 화장, 장보기, 외식 등의 상황에서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제로 웨이스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쉽게는 안쓰는 물건 기부하기, 장바구니 사용하기부터 어렵게는 노케미족 되기, 화장지 없이 손수건으로 볼일 처리까지 내일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이렇게 까진 좀 어렵겠는데 싶은 실천방법을 두루 소개한다.


중요한 것은 제로웨이스트를 한다고 해서 꼭 제로웨이스트에 맞는 물건을 또 소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저자는 내 마음에 쏙 든 오래된 물건을 오래 오래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 버리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멀쩡하게 사용하고 있는 수세미와 플라스틱 칫솔을 버리고 천연 수세미와 나무 칫솔로 갈아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다 쓰면 이제 대체품으로 하나씩 하나씩 바꿔 나가야겠다. 


또한 제로 웨이스트 삶을 막연히 시작해야겠다는 결심보다 저자처럼 블로그에 자신이 실천할 항목들을 넘버링 해가며 도전을 기록하면 자신을 더욱 독려할 수 있고, 의미를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저자가 권하는 제로웨이스트가 처음인 사람들을 위한 행동 가이드

1. 소비의 날 정해서 무분별한 소비 막기

2. 손수건 휴대하기

3. 에코백 만들기

4. 컵, 수저, 반찬 통 등 개인 식기 챙기기

5. 용기와 수고 장착하기


이 중에서 나는 '손수건 휴대하기'와 '개인 식기 챙기기'부터 실천해볼 예정이다.

그리고 산책 길에는 저자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진행하고 있는 #같이쓰레기줍기 캠페인에 동참해볼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쓰레기를 줄이는 해결 방법은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거대한 산업 시스템이 친환경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큰 변화를 맞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플라스틱 재활용 대란을 겪고 규제가 본격화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무분별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났듯, 제도적으로 도입될 수록 그 효과가 크다. 


저자가 책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는 생산자가 제품을 만들어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명이 끝난 제품의 수거와 재활용까지 책임지도록 하는 '생산자 책임 재활용 제도'의 도입이 조속히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책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처럼 소비를 유도하려고 일부러 수명을 짧게 만드는 제품들이 사라지고, 윤리적인 생산이 기본 가치가 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하나뿐인 지구에서 그간 양심 없이 빚을 쌓아 왔다면, 이제는 지속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지구에서 현명하게 자원을 사용하고, 오염은 적극적으로 줄이고 싶다.

그렇게 살아야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소일 <제로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 p245 / 판미동


나 하나가 가져올 변화는 미약하겠지만, 언젠가 모두에게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퍼질 수 있도록...

오늘부터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가야지.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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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법철학 - 상식에 대항하는 사고 수업
스미요시 마사미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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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철학이란 기존의 앎을 철저히 의심하고, '존재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사고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상식을 다시 묻고, 확신을 따져 묻고, 진리의 탐구로 향해 간다.

법철학은 법률에 대해 그러한 사고를 들이댄다.

즉, 인간사회의 다양한 룰 중에서 왜 법률만이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 같은 법률을 성립시키고 존재시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스미요시 마사미 <위험한 법철학> p8~9 / 들녘


최근 국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판결로 논란을 빚은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손정우의 웰컴투 비디오 사건, 조두순 사건 등 주로 과거 남성중심적인 성 감수성에 의한 성범죄의 경량화가 문제시되었다. 물론 법 체계가 구식인 탓도 있겠지만, 이 때문에 사법 당국에게 동시대에 수긍할만한 법감정이 요구되고 있다.


이 책도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과 국민 정서의 괴리에 대해 뭔가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 읽게 되었다.


저자 스미요시 마사미는 일본 대학 법학 교수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난해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한 '법철학', 하지만 이 책은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듯 '나루토' 같은 대중문화를 예로 들어가며 쉽고 재미있게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일단 저자의 성향은 굉장한 리버럴리스트인 것으로 보인다. 법률이 개인의 도덕, 자유 등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 전반적으로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편향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준법적인 생각과 복지와 평등의 개념을 비틀며 다른 식의 사고를 유도하기 때문에 그녀의 급진적인 리버럴리즘이 자신만의 생각을 곰곰히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례로 매춘, 장기 매매 등 인간 고유의 가치와 존엄을 재화로 바꾸기 때문에 무조건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에 이 선택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도리어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인간의 존엄, 정의, 악법에 대한 준법 의무, 도덕의 법적 강제 가능성, 인권과 동물권, 무정부주의, 불평등의 정당성, 자유의 범위 등 민감하고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것들이다.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의에 대한 존 롤스와 로버트 노직의 논쟁을 비교한 3장, 리갈 모럴리즘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5장, 그리고 공리주의의 이면을 보여준 6장이었다.


정의는 지금 대한민국의 화두라고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실질적 정의'의 개념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동등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하라'는 '형식적 정의'와 달리 '실질적 정의'는 사회가 더욱 올바르게 존재해야한다는 목소리에 부응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차별과 불평등 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실질적 정의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  실질적 정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이 책에서 새롭게 접한 로버트 노직은 능력주의를 정의라 내세우고 있는 것 같다. 노직은 '개인이 자신이 바라는 삶의 방식을 관철할 자유'를 가장 우선하는 가치로 상정한다. 어떤 이유로든 신체, 생명, 자유 등의 자연권을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부에 따른 누진세는 재산권 침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도 기부와 같은 온전히 자발성과 자유의지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래도 노직이 원하는 사회의 끝은 얼마나 참담할지, 벌써 상상이 가기 때문에 나는 '개인의 재능도 결국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보았던 존 롤스의 정의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5장의 리갈 모럴리즘은 법에 의한 도덕의 강제를 긍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청소년 피임 금지, 건강증진법 등 한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법적으로 강제화해 지키도록 만드는 것인데, 저자는 이러한 법화(法化)의 부정적 측면을 1장에서부터 소개했기에 반대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물론 모든 매뉴얼을 법적으로 강제한다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겠지만,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리갈 모럴리즘은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1장에서 저자는 반대하고 있는 성희롱 금지 매뉴얼 같은 것,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재정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등이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문제를 근절하려면, 사회적으로 이것이 불법이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합의하는 제스처가 선제적으로 필요하고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이 되었을 때 서서히 그 법은 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6장의 공리주의의 이면은 섬뜩하다. 공리주의에 대한 흔한 비판인 인간의 행복을 양적으로만 본다는 것과 달리 여기서 지적하는 이면은 '선별성'이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공리주의는 '사회 모든 입장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그럼으로써 모든 이의 행복 총계가 최대가 되도록 하는 박애주의'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활용되며 경제성을 따지게 되었다. 예산은 정해져있고, 사람은 많은 상황에서 복지 혜택을 받을 사람을 선별해야 하는 상황. 당연하다고 느꼈던 복지 시스템의 작동방식에 대해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은 제쳐버리고 국민을 선별하는 것도 긍정하게 되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공리주의가 뜻하지 않게 '행복 최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저자는 극단적인 예로 성소수자들이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은 무시한다는 발언을 할 수도 있다며, 공리주의가 빚을 흑백논리를 경계하자고 말한다. 이 점은 간과하고 있던 점이라 꽤나 인상깊었다.


3개만 꼽아서 정리했지만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는 우리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보기 좋은 주제들이다. 처음 내가 이 책에 기대했던 바를 명쾌하게 알려주기엔 책이 전개해나가는 방식과 깊이가 기대에 못미쳤고, 또 법이 재정되는 시기의 배경과 현재에 불거진 문제에 대한 사례들이 일본과 미국 사례 위주인 점이 아쉽지만 책 속의 주제들을 하나씩 파보며 토론하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저자의 맺음말처럼 상식이라 말하는 것들을 언제나 의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겠다.


"연못 물은 일단 퍼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괸다.

상식도마찬가지. 일단 부쉈다 해도 방심하면 새로운 상식이라는 웅덩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법철학은 골(goal)문이 없다.

늘 게으름 없이 물을 퍼내야 한다.

늘 '이래서 되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법철학자의 본성이다."

스미요시 마사미 <위험한 법철학>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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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10만 부 기념 새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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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심시선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인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작가의 말 中에서 / 문학동네


소설의 배경은 하와이였다.

하와이이... 발음하면 온 몸이 상쾌한 푸른 물결에 휩싸인 듯한 기분이 드는 곳.

나에게 천국 같은 바람으로 기억되는 그 곳을 다시 상기하며 달콤한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마침 책 표지도 솜사탕 빛깔이다.


하지만 책 속 하와이는 천국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자본주의에 유린 당한 슬픔과 한이 서린 땅이었다. 그리고 보여지는 것과 실체의 차이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심시선 여사의 삶과 닮아 있다.


책은 심시선이 생전에 남긴 말과 글, 그리고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녀의 자녀들이 그녀가 고국을 떠나 새 삶을 시작했던 하와이로 건너가 특별한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가 교차된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온 가족이 학살 당한 심시선은 동네 주민의 도움으로 홀로 하와이로 떠난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딛은 그녀는 공장처럼 돌아가는 세탁소에서 노동 밖에 없는 삶을 살다 우연히 독일에서 온 유명 화가 마타아스 마우어를 만나 그에게 화가적 재능을 발견 당하고, 그와 함께 독일 뒤셸도르프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학적인 마우어의 폭력 속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무기력해진다.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여자는 그저 마우어의 수집품 중 하나였을 뿐, 육체적 정신적 노예로 살아가던 심시선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요제프 리와 함께 그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고, 마우어는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사랑했기에 그녀를 잃은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며 자살한다. 


책은 20세기를 살아간 여성이 받았던 폭력과 억압을 21세기의 시선으로 다시 조명한다.

심시선이 노출되었던 마치 소유물을 다루듯한 남성 중심적인 폭력적 상황은 21세기에 '가스라이팅', '그루밍' 등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정의할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이를 문제시화 하고 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사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이 사라지지 않은 위험 사회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역시 한국으로 귀국한 심시선에게 쏟아진 관음적인 눈초리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게 모든 걸 빼앗긴 하와이가 로컬의 개념을 폐쇄적으로 가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확장했듯, 심시선도 자신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져가며 폭력이 남긴 상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선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지와 같은 딸들(그 중 한명은 두번째 남편이 전처와 낳은 이복 딸이다)에게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기질을 물려준다.


"다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습니다. 

아무것에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은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29 / 문학동네


첫째 딸 명혜의 제안으로 시작된 하와이에서의 제사는 하와이를 추억할 특별한 것을 하나씩 찾아오는, 일종의 보물찾기와 같았다. 제각기 보물을 찾는 과정 중에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것은 ' 한국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대한 토로'이기도 하고, 일하는 여성에 덧씌워진 편견과 힘겨운 극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의 관심사라는 제국주의와 생태주의에 대한 견해도 엿볼 수 있다.


제각각 가지처럼 뻗어나가던 이야기는 제사를 지내는 날 심시선이라는 하나의 뿌리로 수렴된다. 

생전 시선과 나눴던 추억을 끊임없이 털어놓는 가족들.


"시선과 관련된 '한번은' 시리즈는 각자 몇 개씩 가지고 있어서 게임처럼 밤새 되풀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일화는 스물다섯번쯤 반복되어 누구든 똑같이 말할 수 있었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315 / 문학동네


이 문장이 나에게는 너무 따뜻했다. 경험해본적 없으면서 그리운 풍경이랄까. 

혈연으로 엮인 존재가 아닌 막내 경아의 가족도 더 진하게 포용한 시선으로부터 따뜻함과 강함을 물려받은 가족들은 외부에서 겪은 어떤 상처도 그녀와의 추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331 / 문학동네


나의 계보에 대해 떠올려본다. 

우리 할머니는 그 시대의 여성이 대개 그러했듯 어진 어머니이자 순종적인 아내였다. 

엄마는 그런 틀에서 조금은 자유로웠지만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며 자기만의 커리어를 만들어가진 못했다.

남자든 여자든 말로는 어떻게든 이겨먹으려했던 나는 누구로부터 뻗어나온 걸까?

은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건 취업을 하면서부터였다. 남자가 그야말로 스펙이라 여겨졌던 시기, 진로를 상담했던 교수로부터 '적당한데 들어가서 시집이나 가라'는 굴욕적인 답변을 받아야 했던 때 내가 여자이기에 앞으로의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시비를 잘 걸기 때문에 맞아 죽을까봐 연애를 안한다며 (이 소설 속 표현대로) '뉴스를 그냥 통과시키지 못한' 비혼주의자였던 나는 미친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던 사람을 만나 한국의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는 궤도에 더 확고히 들어선 듯하다. 


여성에게 강제로 부여된 성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이런 책을 접하면 초조해진다.

내가 남길 조각이 이 사회의 변화를 막고 있는 썩은 조각일까봐.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서로 다른 성이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동등하게 보는데 익숙한 사회가 되길.

그런 싹이 돋아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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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글쓰기 - 서울대 나민애 교수의 몹시 친절한 서평 가이드
나민애 지음 / 서울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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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그나마 잘하고 있는 일이라면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책들이 머리와 가슴을 스쳐 지나갔는지. 기록되지 못한 책들은 세월에 쉽게 잊혀졌고 가끔 도서관에서 이미 읽은 책을 또 빌려 읽는 촌극까지 펼쳐졌다. 



작년 한 해동안 서평단에 참여하며 강제된 독서와 독서 후기 남기는 일은 그나마 약속된 과제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보이는 나에게 꽤나 유효한 방법이었다. 독서 후기를 남기는데 거의 4시간 이상 걸리던 초반과 달리 점차 속도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건지, 내가 정말 제대로 된 서평을 쓰고 있는 건지 항상 의문으로 남았다.



<책읽고 글쓰기>라는 꽤나 원초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서평 쓰기에 대한 방법서다. 

서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평 강의를 하고 있다는 저자의 강의 노하우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224페이지의 매우 컴팩트한 책이었다. 


'몹시 친절한 서평 가이드'라는 부제에 맞게 서술하는 어투 역시 학생을 눈 앞에 가르치듯, 특히 10대나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어린 학생들을 굽어 살피는 듯했다. 

때문에 어느 정도 블로그에 독서 후기를 남기고 있는 나에게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치게 주변부만 닦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책에서는 첫 장부터 독후감과 서평의 차이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독후감은 책의 줄거리와 감상 위주라면 서평의 핵심은 '책에 대한 평가'이다. 그 '평가'는 나의 주관적인 감수성, 경험, 감동보다는 '보편적인 공유의 지점'을 언급해야 하고, 그렇기에 보다 전문적이고 냉정하고 분석적인 글이어야 한다.


서평을 쓰려면 책에 대한 별도의 조사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저자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 전작과의 비교, 유사 작품과의 비교와 대조 등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 서평의 정의에 다가갈수록 그동안 내 독서 후기들은 독후감에 지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과연 '서평'이라는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책에 대한 내 감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지 분석-판단-평가로 이어지는 전문적인 영역까지 내가 굳이 나갈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왕 쓰는 거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지 않을까라는 낙관적인 마음도 품어본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서평의 의미 '적어도 나에게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회, 나와 다른 세계의 생각을 접하게 하는 기회'는 책을 읽고 분석적인 글을 써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이 전하는 방법론은 여타 자기계발서처럼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 역시 서평 쓰기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알려주는 기본 틀(구조)은 서평을 처음 쓰려는 사람에게 좀 더 나은 방향을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의의는 그동안 남에게 내가 가진 생각이 얼마나 얕고 보잘 것 없는지 들킬까 두려워 글쓰기를 두려워하던, 그 검열적인 자아를 떨쳐내고 한 줄의 글을 쓰게 하는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평이 제대로 쓰여지려면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내가 던질 질문의 수준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번 타이른다.


"똑똑한 질문을 찾지 못하면 망신이라는 강박. 

나의 대답이 나의 수준 그 자체를 드러낸다는 두려움. 

정답은 반드시 있고 나는 맞혀야 한다는 답정너의 함정. 

이런 대목에서 우리의 질문은 질식한다. 

평가에의 두려움은 일종의 장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질문은 물론 우리의 생각까지 막아선다."

나민애 <책읽고 글쓰기> p117 / 서울문화사


"좋은 인터뷰이가 좋은 인터뷰어를 만드는 법이다. 

다시 말해 좋은 질문이 좋은 접근을 이끌어낸다. 

(중략) 우리가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이 정답이다."

나민애 <책읽고 글쓰기> p53 / 서울문화사


실제 나도 이런 검열 때문에 글을 쓰는 걸 두려워했고, 지금도 그런 시선에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다 게으름까지 합쳐져... 서평 기간이 없는, 자발적으로 읽은 책들은 읽은 지 몇 주가 지나서야 겨우 기록을 남기게 된다. 아예 안쓰고 넘어갈 때도 많다. 그런 책들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조만간 잊혀지겠지. 이런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이제 용기를 얻어서 글쓰기를 실천해나가야겠다.

좀 더 잘 써봐야겠다는 욕심은 부리되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두려움은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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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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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년의 세계사를 이 한권으로 다 정리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꼭 읽어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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