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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10만 부 기념 새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심시선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인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작가의 말 中에서 / 문학동네
소설의 배경은 하와이였다.
하와이이... 발음하면 온 몸이 상쾌한 푸른 물결에 휩싸인 듯한 기분이 드는 곳.
나에게 천국 같은 바람으로 기억되는 그 곳을 다시 상기하며 달콤한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마침 책 표지도 솜사탕 빛깔이다.
하지만 책 속 하와이는 천국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자본주의에 유린 당한 슬픔과 한이 서린 땅이었다. 그리고 보여지는 것과 실체의 차이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심시선 여사의 삶과 닮아 있다.
책은 심시선이 생전에 남긴 말과 글, 그리고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녀의 자녀들이 그녀가 고국을 떠나 새 삶을 시작했던 하와이로 건너가 특별한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가 교차된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온 가족이 학살 당한 심시선은 동네 주민의 도움으로 홀로 하와이로 떠난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딛은 그녀는 공장처럼 돌아가는 세탁소에서 노동 밖에 없는 삶을 살다 우연히 독일에서 온 유명 화가 마타아스 마우어를 만나 그에게 화가적 재능을 발견 당하고, 그와 함께 독일 뒤셸도르프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학적인 마우어의 폭력 속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무기력해진다.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여자는 그저 마우어의 수집품 중 하나였을 뿐, 육체적 정신적 노예로 살아가던 심시선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요제프 리와 함께 그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고, 마우어는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사랑했기에 그녀를 잃은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며 자살한다.
책은 20세기를 살아간 여성이 받았던 폭력과 억압을 21세기의 시선으로 다시 조명한다.
심시선이 노출되었던 마치 소유물을 다루듯한 남성 중심적인 폭력적 상황은 21세기에 '가스라이팅', '그루밍' 등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정의할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이를 문제시화 하고 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사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이 사라지지 않은 위험 사회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역시 한국으로 귀국한 심시선에게 쏟아진 관음적인 눈초리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게 모든 걸 빼앗긴 하와이가 로컬의 개념을 폐쇄적으로 가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확장했듯, 심시선도 자신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져가며 폭력이 남긴 상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선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지와 같은 딸들(그 중 한명은 두번째 남편이 전처와 낳은 이복 딸이다)에게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기질을 물려준다.
"다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습니다.
아무것에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은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29 / 문학동네
첫째 딸 명혜의 제안으로 시작된 하와이에서의 제사는 하와이를 추억할 특별한 것을 하나씩 찾아오는, 일종의 보물찾기와 같았다. 제각기 보물을 찾는 과정 중에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것은 ' 한국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대한 토로'이기도 하고, 일하는 여성에 덧씌워진 편견과 힘겨운 극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의 관심사라는 제국주의와 생태주의에 대한 견해도 엿볼 수 있다.
제각각 가지처럼 뻗어나가던 이야기는 제사를 지내는 날 심시선이라는 하나의 뿌리로 수렴된다.
생전 시선과 나눴던 추억을 끊임없이 털어놓는 가족들.
"시선과 관련된 '한번은' 시리즈는 각자 몇 개씩 가지고 있어서 게임처럼 밤새 되풀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일화는 스물다섯번쯤 반복되어 누구든 똑같이 말할 수 있었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315 / 문학동네
이 문장이 나에게는 너무 따뜻했다. 경험해본적 없으면서 그리운 풍경이랄까.
혈연으로 엮인 존재가 아닌 막내 경아의 가족도 더 진하게 포용한 시선으로부터 따뜻함과 강함을 물려받은 가족들은 외부에서 겪은 어떤 상처도 그녀와의 추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p331 / 문학동네
나의 계보에 대해 떠올려본다.
우리 할머니는 그 시대의 여성이 대개 그러했듯 어진 어머니이자 순종적인 아내였다.
엄마는 그런 틀에서 조금은 자유로웠지만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며 자기만의 커리어를 만들어가진 못했다.
남자든 여자든 말로는 어떻게든 이겨먹으려했던 나는 누구로부터 뻗어나온 걸까?
은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건 취업을 하면서부터였다. 남자가 그야말로 스펙이라 여겨졌던 시기, 진로를 상담했던 교수로부터 '적당한데 들어가서 시집이나 가라'는 굴욕적인 답변을 받아야 했던 때 내가 여자이기에 앞으로의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시비를 잘 걸기 때문에 맞아 죽을까봐 연애를 안한다며 (이 소설 속 표현대로) '뉴스를 그냥 통과시키지 못한' 비혼주의자였던 나는 미친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던 사람을 만나 한국의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는 궤도에 더 확고히 들어선 듯하다.
여성에게 강제로 부여된 성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이런 책을 접하면 초조해진다.
내가 남길 조각이 이 사회의 변화를 막고 있는 썩은 조각일까봐.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서로 다른 성이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동등하게 보는데 익숙한 사회가 되길.
그런 싹이 돋아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