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먼저 살려야 할까? - 깐깐한 의사 제이콥의 슬기로운 의학윤리 상담소
제이콥 M. 애펠 지음, 김정아 옮김, 김준혁 감수 / 한빛비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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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해부터 우리 일상을 뒤바꿔놓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의료 윤리에 대해 보다 가깝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개인이 우선인가 공동체가 우선인가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좋게 말해) 집단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일을 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우선시 되는 서구권에서는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상황이 윤리적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무려 72가지나 되는 의료 윤리 문제를 제기하며 현재까지 내려진 합의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론될 수 있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있다.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를 이익이 부딪히는 문제들은 국내 기준으로 보기에는 덜 민감한 문제처럼 보인다.

특히 의료 행위 중 얻게 될 환자의 정보가 공동체 이익에 반하는 케이스의 경우 한국의 경우였다면 공동체의 안전을 먼저 보장하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만 분노하게 되는 딜레마는 수요와 공급, 경제적 논리로 약자를 배제시키는 문제이다. 인간을 수단이나 도구로 본다는 점에서 명백히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적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독재자나 대통령, 재계 경영인 등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생명을 다룰 때 의사가 가져야할 윤리적 태도도 매우 미묘한 사안이었다. 의사에게는 생명을 살려야한다는 사명감이 있지만 이후의 결과가 공동체의 이익에 반한다면 그 치료는 정당할 수 있을까?



의사가 빠지기 쉬운 딜레마는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유지행위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사전에 동의 받는 소극적 안락사가 이제는 합법화되고 있지만, 죽음을 방임한다는 의미에서 의사는 자살에 동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술 발전으로 인해 오는 새로운 윤리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종간의 유전자 결합, 유전자 검사를 통한 선택적 유산, 그리고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 복제의 문제도, 생명 연장이나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고 올 지라도 생명을 수단으로 다룰 수 있을 여지가 있기에 여전히 논란이 크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중요하지만, 병의 경중에 따라 생명의 중요도를 나누는 문제는 더욱 첨예한 논란을 일으킨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경험했듯, 갑작스러운 감염자 증가로 격리 병상 수가 부족해지자 기존의 만성 질환자들이 피해를 봐야만 했다. 여기서도 유사한 문제와 함께 치료 가망성이 없는 환자에게 치료비 지원을 끊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것이 비용과 효율의 문제로 결정되는 점이 안타깝지만 기준을 마련한다면 그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타협적인 태도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공동체주의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동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리버럴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료 윤리 딜레마 앞에서는 공리주의적인 결정을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100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기차 선로를 억지로 바꿔 1명을 희생시키는 결정을 정의라 여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료 윤리의 실제적인 사례를 접하게 되니 이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미국의 케이스가 많고, 현재 진행되는 합의점도 미국의 사례라 한국버전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인권과 공동체, 윤리와 경제논리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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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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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설레게 만드는 작가 중 하나가 마거렛 애트우드가 아닐까.

그녀의 작품은 겨우 하나 읽었지만 너무나 강렬한 설정과 주제의식에 언젠가는 전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작가였다. 

그런 작가가 쓴 글쓰기에 대한 강의라니, '이건 못 참지!'라는 생각으로 읽게 된 <글쓰기에 대하여>.


이 책은 작법에 대한 강의라기보다는 작가라는 존재와 위치에 대한 탐구에 가깝다.

무척 다양한 작품들이 사례로 거론되어 흡사 문학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마거렛 애트우드는 작가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세 가지 질문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 왜 글을 쓰는가?

-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글쓰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글을 쓸 때의 기분은 미로 속에서 길을 더듬어 앞을 찾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6장에 거쳐 작가란 존재와 작가를 둘러싼 주변 세계, 이야기를 찾는 여정에 대해 다룬다.



마거렛 애트우드는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탐구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어린 시절부터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녀, 그녀에게 '인생의 지저분한 면'을 보여준 수많은 책들,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들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그녀는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쓰려했지만 예술 모임에 나가며 더 문학적인 글을 꿈꾸게 된다. 재능과 기술이 있어야하는 예술과 달리 글쓰기를 거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이라 말하는 그녀는 작가가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한다.


그리고 작가는 마치 지킬과 하이드와 같이 작가로서의 자아와 일상적 삶을 사는 자아로 두 가지 자아가 공존하는 신체이다. 작가에게는 예술 지상주의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덧씌워져 모종의 신화가 강제되는 데 특히 상업적인 것에 무심해야한다는 것이다. 


마거렛 애트우드는 책 전반에서 그간 여성 작가들이 차별 당해온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데, 여성적 스타일은 힘이 없거나 바보같다는 등 능력 면에서 평가절하 당하거나, 결혼이나 가정생활 등 일상과 공존할 수 없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한다. 작가와 독자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소통한다. 직접적인 소통은 없다. 둘은 만날 수 없지만 작가는 언제나 이상적인 어떤 '한 사람'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쓴다. 명성을 얻기 전에는 취향에 맞는 독자와 만나던 작가는 유명인이 되면 불특정 대중과 만나야한다. 그래서 명성은 작가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환상을 빚어내는 마법사이자, 사회 정치권력의 참여자,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증언하는 목격자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작가의 목적을 발견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경험한 방대한 작품 세계 속에서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위치해야하는 지를 고민한 마거랫 애트우드. 사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글쓰기란 어떤 것인지 더욱 정의 내리기 어려워졌다. 다만 작가에게 부여된 그릇된 신화가 많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의 진짜 장점은 마거렛 애트우드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이다.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책들은 플레이리스트처럼 읽을 책 목록에 메모해두었다. 그녀의 상상력을 보다 풍성하게 해준 이 책들을 따라 읽는게 앞으로 또 다른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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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웃는 엄마
이윤정 지음 / 델피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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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모를 성장시키려 찾아온 수호천사라는 말이 있나 보다.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이가 아니었다면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을 내 안의 무수한 감정들,

그 감정들을 바로 마주하며 이토록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아이들의 행동을 통해 나의 부족한 모습들을 하나둘 발견하며 나는 날마다 조금씩 성장해간다."

이윤정 <그럼에도 웃는 엄마> p102 / 델피노



엄마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얘기를 듣다보면 아이의 존재가 참 신비스럽기만 하다.

때로는 나의 전부이자, 자랑이자 자부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밑바닥을 다 까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는,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달이면 나에게도 아직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래저래 육아에 대한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지레 겁먹기도 했지만, 지금도 뱃속에서 엄청난 태동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막연하기만 했다.


연초에 올해는 육아서 5권 이상 읽고 육아 방향성 세우기!! 란 목표를 세웠지만 이제서야 1권 읽었다.

그런데 너무 다행이다. 이 책 속 엄마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애는 이렇게 키워야한다, 이 시기에는 이게 맞다, 맞지 않다, 팔짱 끼고 충고하는 정형화된 육아서가 아니라 생생한 육아의 현장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하며 깨달은 마음가짐이 담겨 있어서 아직 육아도 안해봤는데 공감이 되고,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이 됐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따뜻하고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이 좋았다. 


저자는 초등교사이자 삼형제의 엄마다. 사실 삼형제 엄마라는 말에 나도 '진짜 힘들겠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했다. 작가는 자신을 향한 안쓰러운 눈빛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염려한다.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을리 없는 존재들이 힘들고 버거운 존재로 치부될까봐. '아들만 둘이건 셋이건, 엄마들은 정말 괜찮다. 왜 옆에서 이 엄마들을 가만히 두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라는 저자의 일갈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첫 파트는 묵직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날 갑자기 척추에 종양이 생긴 첫째, 엄마는 억장이 무너지지만 아이 앞에서 함부로 슬퍼할 수 없다. 거듭되는 검사와 수술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아이를 위해 강해지기로 결심한다.


첫 파트를 읽으며 아직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접하게 된 무거운 현실에 숨이 막혔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엄마들의 공감과 달리 나에게는 상상이 어려운 공포였던 것이다.

그래도 꿋꿋하게 모든 걸 이겨낸 극복의 드라마는 안도와 함께 진한 감동을 느꼈다.


두번째 파트부터는 현실 육아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스마트폰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아이들의 눈빛을 볼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하는 저자의 말이 와닿았다.

저자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도 맡기지 않았고, 그 흔한 학습지도 시키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정형화된 틀 속에 아이들의 생각이 갇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고 재촉하게 될 것을 항상 경계한다.


그래서 배변 훈련 시기도 인내를 갖고 기다리고, 시간에 쫓겨 다녀야하는 문화센터도 다니다 말았다는 저자가 유별나기보다는 대단해보인다. 남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히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게 너무 멋지다.


"아이들은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에 저장된 행복의 기억들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힘을 얻는다.

부디 그 힘을 엄마가 앞장서서 모두 소진해버리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이윤정 <그럼에도 웃는 엄마> p134 / 델피노


"강제하지 않으니 스스로 탐색하고, 재촉하지 않으니 어디에든 몰입하며, 평가하지 않으니 더욱 즐거웠던 시간. 

숙제도 없고 경쟁도 없고 시험도 없는 이 널널한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 단단하게 영글어가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윤정 <그럼에도 웃는 엄마> p226 / 델피노



엄마 스스로의 삶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육아를 하다보면 아이의 일과에 맞춰지게 되고 자신의 삶은 사라지기 일쑤라는데,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가족을 위해 내 건강을 먼저 챙기고,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더 이상 엄마만의 시간을 쟁취해가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더욱 당당히 그 시간을 요구하고 나서자. (중략)

엄마가 자신을 먼저 아끼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스스로를 아껴가는 법을 자연스레 배워갈테니까."

이윤정 <그럼에도 웃는 엄마> p156~157 / 델피노



사실 임신으로 인해 단절될 내 경력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내게 와준 아이를 환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건 아이가 태어나면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 


저자도 누구보다 일에 열정이 넘쳤고, 하고 싶은게 많은 교사였다. 세 아이를 연이어 키우느라 6년을 휴직하고 복귀한 그녀는 아픈 아이와 시간을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방황 끝에 '내게 1년 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라는 극단적인 질문 앞에서 다시 한번 휴직을 선택했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고, 꿈도 나중에 이룰 수 있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라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택한 것이다. 



저자에게 현실적인 고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저자 역시 '아무리 내 가치가 확고하고 원대해진들 현실적으로 그것을 잘 펼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나를 더욱 쪼그라들게 만드는 밤'을 보낸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항상 아이들과 자신의 행복이다. 


저자의 가치관과 마음이 다 좋았다.

나도 아이의 속도에 맞춰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지켜볼 셈이다.

그러면서 커리어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성장을 맛보는 시간을 갖자고, 그 속에서 배운 마음과 감정을 기록하고 성찰하며 아이로 인해 보다 나은 내가 되는 과정을 즐겨보자고 다짐해본다.  

흔들릴 때마다 '그럼에도 웃는 엄마'를 상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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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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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은 없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걸세.

그래서 각자가 자기 운명의 창조자라는 말도 있지."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2> p814 / 열린책들



<돈키호테> 전편이 기사 소설에 미쳐버린 이달고 알론소 키하노가 자신의 말과 충성과 사랑을 바칠 귀부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비아냥과 웃음거리가 되는 좌충우돌 모험기였다면, 후편은 전편이 출판되어 스페인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는 새로운 모험과 함께 최후의 순간을 담고 있다.



전편에서는 돈키호테의 광기가 부각되었다면, 후편은 보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성장을 엿볼 수 있어 교훈적이다.

마법에 걸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무훈을 우습게 만들려한다는 것에 분노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풍차와 양떼를 보고 무작정 돌진하는 짓도 없다.

특히 사람들에게 연설할 때 돈키호테의 분별력과 총기는 어느때보다 빛나는데,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을 읽고 작정하고 그를 놀리려다가도 그의 박식함과 자비로움에 깜짝 놀라게 된다.



산초 역시 마찬가지. 돈키호테와 함께 티키타카하며 그도 무척 현명해진 느낌이다.

그들은 세 번째 모험을 떠나며 귀부인 둘시네아에게 찾아가는 데 그녀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편지를 전해줬다고 거짓말을 했던 산초는 마을의 농부 아낙을 둘시네아라고 속이고, 돈키호테가 믿겨하지 않자 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능청을 떤다. 이런 산초의 계략은 나중에 둘시네아의 마법을 풀기 위해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해야하는 벌로 당하긴 하지만... 항상 돈키호테의 말을 순박하게 믿어왔던 산초는 후편에 걸쳐 그의 주인이 약한 부분을 보완할 줄 알고, 그를 이용해 기회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현명한 통치자로 거듭나기도 한다.



후편은 전편에서 벌어진 돈키호테의 모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어디서나 환대를 받는데, 그 중 돈키호테와 산초를 즐거워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려는 공작 부부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모험을 기획한다. (인간의 신념을 가지고 놀려먹으려 하다니 사실 고약한 부부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기획한 모험에서 돈키호테는 싱겁지만 청동으로 변한 공주와 수염 난 과부시녀들을 구하게 되고, 산초는 드디어 꿈꿔왔던 통치자가 된다.

그리고 현실에 닿아있는 산초의 삶은 그 어떤 통치자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결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의 감탄을 산다. 열흘 동안 펼쳐진 산초의 활약, 그가 보다 현실성 있는 법을 제정하고 그 곳을 다스렸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산초는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깨닫고 씁쓸하게 자리에서 물러난다. 

우리에게 때론 지속할 수 없는 이상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봄은 여름을 추적하고, 여름은 한여름을 추적하며, 한여름은 가을을 추적하고, 가을은 겨울을, 그리고 겨울은 봄을 추적하니, 이렇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인간의 목숨을 제한할 한계가 없는 다른 생애에서가 아니라면 다시 시작해 볼 희망도 없이 말이다."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2> p655 / 열린책들



공작 부부의 집을 나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길을 떠난 돈키호테는 자신의 무훈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판본으로 만들어져 우스꽝스럽게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도 접하게 되는데.


당시 '돈키호테'의 성공이 얼마나 많은 아류작을 낳았고, 그 아류작들을 세르반테스가 얼마나 비판적으로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 내내 아르고 사람이 쓴 아류작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이어지니, 이 속편을 접한 아류작 작가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한 돈키호테. 결투를 시작하며 돈키호테는 자신이 패하면 마을로 돌아가 1년 동안 무기를 잡지 않기로 약속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는데. 영광을 모두 잃고 쇠약해진 모습이 역력하다. 돌아오는 길에 돈키호테는 편력기사를 내려놓고 '목동 키호티스'의 삶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신부, 이발사, 학사 삼손, 산초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데 주석에 따르면 이는 유대인의 관습이나 스콜라 철학에서 이름이 사람의 실체 형성에 막대한 힘을 행사하며, 개명이 인간성의 근본적인 면을 바꾼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갑자기 요즘 유행하는 부캐 신드롬이 떠올랐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색다른 자극을 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어보고 싶다. 사람은 믿는대로 무한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니까.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나. 당시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의 나이에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편력기사가 되기 위해 무모한 모험에 나섰던 돈키호테, 아니 이달고 알론소 키하노는 그 나이에 믿기지 않는 엄청난 모험을 완수해내고 마을로 돌아와 급격하게 기력을 잃고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만다.



사람에게 활력을 주고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꿈이라는 걸,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 꿈에 닿기 위해 내딛었던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나의 하루를 충만하게 만든다는 걸, 돈키호테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1권에서는 그냥 엉뚱하고 고전이라기엔 너무 유머러스한 책이라고 느껴졌다면, 2권에서 드디어 돈키호테라는 신화가 완성된 것 같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인간 돈키호테라는 불멸의 캐릭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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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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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입장에 놓였지만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들의 활약, 한데 묶어 소개해준 작가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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