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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episOde,6 정혜윤_침대와 책
_ 요즘엔 갈등을 인체에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멋진 문장을 찾아 실용화하는 중이다.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문장은 뉴욕의 떠오르는 별 니콜 크라우스가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몽땅 다 잃고 혼자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 노인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을 설명한 글이다._

그것은, 10년 01월 02일 토요일_ (처음 언니와 합심하여 여행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음모를 논한, 우리 자매의 우애의 날이라도 칭해도 딱히 무방할) _ 침대와 책을 만났다, 이것은 실로 어려운 만남이었다고 기억한다, 지난 날 '재고가 없다 그러니 주문을 해라'라는 말은 강남, 그리고 천안 교보에서까지 되풀이되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꽤나 씁쓸했다, 퇴짜맞고 돌아오는 취업준비생의 기분이 이런걸까, 라며 으레 짐작을 떨어본다, 오로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어, 약간의 애간장을 감미한 너는, 좀 도도한 녀석이군, 이럴수록 점점 더 불타 올랐던 소유욕은 언젠가는 너의 콧대를 꺽고 말겠어,라는 말과 함께 뜨거운 콧김으로 연소된다, 힘이 빠진다, 배가 고픈가, 문득 오리온 치토스가 먹고 싶어진다, 아련한 기억속의 치토스, 언젠가 먹고 말거야 치.토.스.!
라거나 말거나,
나는 결국, 수원의 북스리브로에서 가지런히 꽂혀있던 침대와 책을 손에 쥐었다, 후후후, 나는 나의 입가에 번지는 회심의 미소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너를 머리 맡에 두고 두고 베개 삼아주겠다, 더불어 침도 흘려주겠다,
나의 고약한 배게가 된 경위를 소개하자면 여기까지, 그런데 잠깐, 세상에 이런 베개도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지, 곰곰곰...히 생각해보니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 까먹었다, 정말 배가 고픈가,
집착은 때론 기억의 상실을 만든다, 더불어 배고픔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한다, 라며 이 문제는 그냥 덮어두기로 한다,
*
넬의 음율이 귓가로 흘러들어서, 김종완이 목소리가 마음에 아련히 스며들었다, 오늘은 그러했다,
나는 우울했다, 김종완의 목소리외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과 사건들은 심드렁했다,
뚜렷한 이유없는 우울은 침울하게 만들었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문제는 해결하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나는 좀 심드렁하다'
엄마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요는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것이였다, 심드렁하게 알았다고 했다,
정모씨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내고, 백수가 그렇다는 말을 꺼낸 후, 땡큐를 날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지구 심연의 자기력이 나의 몸 전체를 끌어 당기고 있어 그러니 네가 반대편에서 나를 힘껏 당겨서 제자리로 오게 해줘, 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냔 말이다,라는 답문을 보내왔다, 그의 활자로부터 깊은 자괴심이 몰려왔다, 지구의 심연으로 두 발짝 가까워졌다,
권모씨는, 기지배,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산 탈때가 되었다는 시기적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나의 우울은 좀 주기적인 것 같다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더니, 봄을 타는구나 너가 여자란 증거야 만끽하려무나,라는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 소설 20선 속 어딘가에 포함 되었을 만한 문장 한 자락같은 답문을 보내왔다, 웃음이 나왔다, 우울을 만끽하는 웃음은 이런거니, 니가 옆에 있으면 보여주고 싶었다,
봄을 타는 기지배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봄인데 바람이 분다 따뜻해지면 우리 사진기들고 출사 가자는 문자가 날라왔다. 강모씨였다, 뜬금없는 문자, 역시나 신기한 녀석이었다, 너 내가 봄타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친구라서 알았다고 했다, 역시나 희한한 녀석이었다, 웃는데 정말로 눈물이 흐를 것도 같았다,
저녁무렵, 정모씨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지구의 심연에 두 발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구해 주려고 했던 것인지, 이번 주말에 뭐 하고 싶은 거 있냐고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다, 고맙지만 사양하는 듯한 뉘앙스로 손을 잡는 대신 니 욕을 한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다시 손을 거뒀다, 너는 정말 나를 혹독하게 단련시킨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내 우울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은 날에는 _
1.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토성 편을 펼쳐든다. 토성 편에는 파이어니어 11호 발사 후 5년 정도 경과한 시점인 1979년 8월 26일에 찍은 토성의 고리 사진이 실려 있다.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타이탄을 발견한 하위헌스는 토성의 궤도 특성을 연구한 뒤 이런 글을 쓴다. '토성은 태양을 30년에 한 번씩 공전하기 때문에 토성과 그 위성에서의 계절 변화는 지구에서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된다.
2. 수전 손택은 그녀의 책 우울한 열정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ㅜ장한 슬픈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7월 15일생) 발터 벤야민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토성의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이 행성.
자신의 우울을 토성적 기질 때문이라고 설명한 발터 벤야민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본질적인 외로움, 인생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포,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눈에 들어오는 것의 3분의 1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 사람에 대해선 신의가 없지만 사물에 대해선 신의가 있어 열광적인 수집가가 되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사물적인 지배에 항상 위협을 받는 것,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데서 무언가를 발견하길 좋아하는 것, 그래서 결정적인 일격은 항상 왼손으로 날린 주먹이라 생각하는 것,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기 등등으로 정의한다. 수잔 손택은 특히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기'란 표현에 대해 아주 멋진 해석을 붙였는데 이런 행위야말로 바로 우울함을 쾌활함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_ 나는 그렇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이런 말도 안 되는 너스레가 솔직히 말해서 눈물나게 좋다. 이것이야 말로 토성 아래 있는 인간이, 우울함을 쾌활함으로 바꾸려고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현실주의적 행위가 아니고 뭐겠는가? 이게 가능한 사람은 토성과 평생에 걸친 사랑을 시작해도 좋고, 우울증을 평생 자신의 자질 중 하나로 안고 살아도 좋다.
라는 것은, 위안이 되는 말이다, 나의 베개가 들려주는 말이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준다, 이것은 주기적인 것이므로 어쩌면 나의 자질일 수도 있다, 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나의 일부분, 이라고 생각을 해보니 오늘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오늘 나는 우회와 지연의 행성, 토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니 발터 벤야민의 해석에 따라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본다,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에 나름의 해석을 달아보았더니 어느새 우울함이 쾌활함이 된다, 그것은 봄을 타는 여자로서 당연히 만끽해야하는 우울한 웃음이랄까, 권모씨의 말을 빌리자면 말이다,
역시나 이런 말도 안되는 너스레는, 솔직히 말해서 눈물나게 좋은것이다,라고 공감한다, 나를 할퀴지 않고 타인을 할퀴지 않고 토성의 탓으로 봄의 탓으로 지구의 자기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우울을 받아주기에 무궁한 깊이와 넓이를 자랑한다, 당연히 만족스럽다,
우울한 나는 녀석을 머리에 괴었다, 몸이 편안하다, 역시나 마음에 위안이 된다,
물론, 베개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넓게 스며들고 깊게 파고드는 말들을 많이 해주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나는 쓸모없고 미련한 잡념에서 벗어난다,
졸리다,
혹시,이런 베개가 탐이 난다면, 수소문해라, 그녀는 도도하다, 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