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 영화가 있다. 영화가 다 끝난 뒤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도록 만드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다시 광고가 시작되는데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해 어정쩡하게 일어서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하는 영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노려보는 극장 직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쫓겨나듯 극장 안을 나와야 하는 기분. 조금 더 앉아 있고 싶은데, 조금 더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데 이야기는 끝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 그런 아쉬운 기분을 달래며 마지막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만약 영화로 태어났다면, 나는 절대 보지 않았을 종류의 영화였을 것이다. 배경과 등장인물이 도무지 내가 영화 속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머니까. ‘가족’ 관계의 지긋지긋함을 영화 속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 ‘가족’ 이야기다. 가족의 따뜻함을 확인하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고, ‘가족’이라는 거 아예 없었다면 좋겠다고 한 번쯤 생각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 읽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것을 권한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든 재미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박민규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처음으로 찍은 영화 한 편이 철저하게 실패한 이후, 영화계에서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영화감독인 ‘나’의 시선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1인칭 시점이다 보니, 은근 슬쩍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영화계에 몸담았던 작가의 경험이 묻어나오는 부분들이 많다. 이 소설 속에는 수많은 영화가 소품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삶도. (영화는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첫사랑 같은 것이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런 첫사랑에게 바치는 애틋한 편지는 아닐까?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 불러만 준다면 어디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 작가에게 영화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그런 영화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이 소설 속에도 살짝 스며 있는 것만 같다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


  사실상 끝나버린, 영화감독인 ‘나’외에도 이 소설에는 정말 막나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폭력과 강간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노년이 거의 다 되어 엄마 집에 얹혀사는 남자. 바람나서 집에서 쫓겨나와 딸과 함께 엄마 집으로 오게 된 여자. 한 편의 영화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알코올에 의존하는 남자(바로 영화감독인 ‘나’). 모두 늙어서 갈 데라곤 없어 엄마 집으로 기어들어오게 되는 상황이라니. 정말 기막히고 서글픈 상황 아닌가. 어렸을 때처럼 다시 이들이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과거의 비밀들이 하나 둘 밝혀진다.


  작가 자신이 과연 이 막장 드라마의 끝은 어디일까 추궁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막장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단골 소재인 ‘출생의 비밀’이 이 소설 속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에는 불륜과 이혼, 폭력과 범죄 조직, 연쇄 살인 같은 자극적인 소재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 ‘아니 정말, 이 막장드라마 같은 소설 계속 읽어야 하나?’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정말 ‘에잇, 이거 뭐야?’했을 이야기들이 능청맞은 입담과 재치 있는 유머에 힘입어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변신한 덕분이다. 과거의 저편으로 영원히 묻어두면 좋을, 가족을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이래서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자꾸만 보는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하나같이 서글프고 찌질하고 궁색한 인생들 속에서 작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소설가, 헤밍웨이의 삶을 슬쩍 집어넣는다. 영화감독인 ‘나’는 우연히 빌라 앞 쓰레기 수거함에서 누가 버리고 간 헤밍웨이 전집을 가져와 읽는다. 헤밍웨이는 비극적인 영화 속 주인공처럼 결국 권총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는다. 달콤한 날들도 있었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결국 삶의 고통 앞에 무릎 꿇고 만다. 그런 비극적인 삶이 궁색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인생들 속에 겹쳐진다. 이 수상한 가족들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감독인 ‘나’는 그 행복했던 시간을 자신이 첫 영화를 만들었을 무렵이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늘 그렇다. 행복한 순간은 늘 너무 짧고, 대부분 고통스럽고 슬프고 찌질하다. 우리 모두를 만든 신이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정말 대부분의 영화를 형편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 또한 “사는 게 왜 이 모양이지?” 하는 질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생들이다. 헤밍웨이처럼 결국 그런 삶을 끝낼 용기가 없을 뿐.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p.45


  작가의 말대로, 사는 일이란 정말 시시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찍는 일이다. 매번 함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고통스럽게 한숨짓는 일들의 연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에 때때로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늘 “사는 게 왜 이렇지?”하는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돈이 없어 조카를 협박해 용돈을 얻어내야만 하는, 다소 굴욕적인 삶. 그런 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지만 함정을 피해 다니다가 용케 <쇼생크 탈출>보다 더 짜릿한 인생 역전 드라마를 찍기도 하는 것이 삶이기도 한 모양이다. (이건 읽어보면 알게 된다)


 내게는 이 작품이 <고래>에 이어 읽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고래>라는 작품이 “와, 이 작가 정말 대단하다!”하는 감탄을 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와, 이 작가 소설 참 재미있게 쓰네!”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고 할까. <고래>에서 흡인력 강한 이야기의 재미를 느꼈다면, 이 소설에서는 거대한 이야기에서 느끼는 감탄이 아닌 소소한 장치와 설정에서 느껴지는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어떤 부분에선 정말 웃음이 꽝 터지기도 했고. 후기에 소설가 박민규와의 술자리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설을 읽다가 정말 박민규의 소설처럼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다. (이 작가가 소설가 박민규와 친하다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닮는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보기는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나서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 영화보다는 소설에 전념하겠다는 작가의 인터뷰가 자꾸 떠올랐다. 작가 후기에 이런 말까지 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그들이 나의 다음 소설을 또, 기꺼이 기다려줄 거라고 믿는다.”

  동료 소설가들에게 말하는 그의 이 다짐에는 약간의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자꾸만 작가의 인터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를 보면서 이 작가가 이제부터 정말 소설을 열심히 쓰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 작가가 자신이 정말 잘하는 것에 파고들어서 정말 다행이다.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난다는 건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니까. 그리고 꼭 읽어야 할 작가의 리스트가 늘어나는 것도 이래저래 즐거운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고래>를 읽고 <고령화 가족>을 읽은, 이제 막 ‘천명관’이라는 작가에 빠져들기 시작한 독자 한 명도 당신의 소설을 기꺼이 기다려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전부터 제목에서 퍼져 나오는 절망적인 여운을 알아챘어야 했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그 강한 여운. 그 힘찬 느낌표에서 느껴지는 강한 울림을 짐작했어야 했다. 물론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독과 절망을 미리 알았더라도 이 책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외에는 특별히 기억하는 작가가 없었어도 내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었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그 나른한 세계가 좋았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생각하면, 밤이 내리듯, 서서히 가라앉는 고독이 떠올랐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환상적인 공간이 그려졌다. 마르께스라는 단 하나의 작가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창비에서 세계문학 전집이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도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편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왜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함께 묶었을까 조금 의아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문학이 스페인과 언어 외에 어떤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과 별개의 권으로 구성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하는. 엮은 이의 말에도 “20개국이 넘는 나라들의 문학을 균형있게 고루 담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선정 기준을 살펴보니 작가와 작품의 선택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적으로 최근에 활동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 여성작가들도 5명이나 포함시켰다는 점, 가급적 우리말로 아직 옮겨지지 않은 작품을 선정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이름 있는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만을 가려 뽑은, 지금까지 나온 세계문학전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얘기니까.

 
엮은 이의 의도대로, 이 책은 다양한 빛깔의 단편들을 담고 있다. 나를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빠져들게 만든 마르께스 외에도 처음 만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그 다양한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들이 반가웠고, 그 작품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10개국 총 1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 작품 외에는 그리 길지 않아서 마치 짧은 단편 영화들을 보는 것처럼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기도 했고, 절망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따라가기도 했다. 비극적인 이야기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고, 독특한 글쓰기 방식 앞에서는 짧은 감탄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각 단편마다 그 여운이 강해서, 단편 영화가 끝날 때의 진한 암막처럼 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처음 책을 읽기 전, 예상했던 대로 마르께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계통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는 “마술적 사실주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날개가 달린 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현실은 환상 속에 녹아든다.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단편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드러누운 밤> 역시 환상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젊은이가 꿈속에서 원주민이 되어 꽃의 전쟁을 경험하는데, 작품의 끝에 이르면 그것이 정말 꿈인지 헷갈리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이처럼 교묘하게 섞여들 수 있다니.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의 <비>에서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 현실 속에 섞여든다. 이들 작품에서 환상은 현실과 경계를 긋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현실에 녹아든 환상을 느꼈다면, 스페인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1950년대 스페인 문학을 대표한다는 작가, 이그나시오 알데꼬아의 <영 산체스>에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나 마리아 마뚜떼의 <태만의 죄>에서는 꿈이 박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비극적 최후가 담겨 있다. 헤수스 페르난데스 산또스의 <까까머리>는 폐병에 걸린 아이의 이야기다. “난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서 현실에 스며있는 깊은 절망이 전해져왔다. 뒷부분의 해설에 보면, “어떤 유럽 국가도 스페인만큼 이른 시기에 자국어로 서사산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또한 그러한 스페인의 찬란한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작가와 작품 수의 제약 탓에 스페인 문학 속으로 좀 더 깊이 빠져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특히나 나를 사로잡았던 건 여성작가들의 단편이었다. 독재 정권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많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글쓰기는 하나의 저항으로 인식되었다. 억압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의 글쓰기는 더욱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그래서 더욱 뜻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여성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작가,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문장은 몇 번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고통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충만함과 온화함의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녀를 상처입힐 수 없으리라.” <나무>라는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의 상상력은 재기발랄했다. 이 작품에서 봄발은 ‘나무’라는 식물적 상상력을 음악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아름다운 리듬감으로 절묘하게 섞으며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한다. ‘포스트붐’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도 인상깊었다.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벨리사라는 인물과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각각의 단편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는 점이었다.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작가 소개와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닌데도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작품 뒤에는 친절하게도 더 읽을거리를 제시해 줌으로써 작가에 대한 탐구가 더 깊어질 수 있게 안내한다. 19편의 단편을 읽으며 이 책이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올 수는 없더라도,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작품을 많이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감안할 때,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특정 지역의 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그동안 미처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는 듯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마치 신비스러운 매력을 지닌 사람을 새로 소개받은 기분이랄까. 스페인에서 꾸바까지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다양한 빛깔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작가의 이름을 새기고 그의 작품을 좀 더 맛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강력한 마법에 빠진 것만 같았다. 마법처럼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작품들. 고통과 절망이 환상 속에 스며들어 마치 나른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 그런 작품들 속에서 소설 읽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몽유도원도>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삶과 꿈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알아낸, 우리 조상들이 꿈에 그리던 세계와 그 세계를 실제로 만들려고 노력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던 도원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탄생한 <몽유도원도>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옛 선조들의 문집이나 각종 설화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이상세계를 찾아 헤맨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넘나든다. 이 책의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흔적들을 통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꿈을 엿보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세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간절한 희망을 꿈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공간을 꿈속에서 만났고 그것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몽유도원도>는 그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잘 드러내준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그런 세계를 찾았지만, 글쓴이는 우리 선조들의 문집이나 설화를 통해 이상세계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많았음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명에 이상향을 뜻하는 단어를 붙여 자신의 마을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드러낸 것에서부터 이상세계를 찾으러 떠났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일화들까지.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경기도 가평에 자신들이 꿈꾼 새로운 세상을 건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지금 문헌으로 전해져 오지는 않지만 그런 비슷한 사례가 어쩌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세계를 꿈꾸었을까
  그럼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상적인 세계라고 하면,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먹고 놀기 좋은 곳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의 모습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글쓴이는 다양한 이상세계의 유형 가운데 우리 조상들이 주로 꿈꾸었던 이상세계의 유형인 무릉도원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우리 선조들이 이상세계로 그린 곳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늘 근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게을러짐으로써 물질적인 황폐함을 야기하고, 또 그것이 정신적인 황폐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꿈꾸고 그렸던 이상세계가 똑같은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상향의 모습이 변했다. 고을 아전의 쌀 내놓으라는 괴롭힘만 없다면 어디든 무릉도원이라고 읊은 시에서처럼, 열심히 일해도 관의 횡포 때문에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관의 수탈과 학정이 없는 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한편, 유난히 전쟁이 많았던 조선 중기에는 목숨의 위협이 없는 곳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상향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토록 이상향을 꿈꾸고 그곳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습이 소박한 희망마저 용인하지 않는 사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다면, 이상세계를 꿈꿀 이유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소박한 모습으로 여겨지는 이상세계를 절실하게 그리워했던 우리 조상들의 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엿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를 엿보는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책장을 덮기 전에야 비로소 그들이 꾸었던 꿈을 통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를,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더듬어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전쟁이 일어나 목숨마저 위협받기도 했고, 열심히 일해도 관에서 모두 빼앗아 가버려 절망적이기도 했을 어떤 삶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며 살고 싶은데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으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어떤 삶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래서 깊은 산 속,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곳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강하게 남아 지금까지 여러 흔적으로 남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꾼 데에서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추구하고 세우고 싶었던 이상향을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글쓴이는 “꿈꾼 데에서 나아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꿈꾸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며 우리 조상들처럼 이상세계를 꿈꾸고 그런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며 글을 끝맺는다. 때로는 꿈을 꾸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횡포들이 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꿈조차 꾸지 않으면서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모두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그런 세계로 가기 위한 첫걸음일 터이다. 이상향을 찾고 그런 이상세계를 실제로 건설하려 했던 우리 조상들처럼, 꿈꾼 데에서 더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그림 한 장에서 문화를 엿보다
  <조선인의 유토피아>는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키워드 한국문화는 “한 장의 그림 또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한국을 찾자”는 의도로 기획된 시리즈다. 책을 읽고 나서 기획의도를 들여다보니,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발을 들여놓아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문화는 무턱대고 조금 지루하고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이 시리즈는 매우 유용하고 값진 선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나처럼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너무 막연해서 한 발 물러 서 있던 독자에게 아주 쉬운 길을 안내해주는 책이었다. 한 장의 그림을 따라서, 남겨진 여러 가지 글을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삶과 꿈을 엿보고 나니 우리문화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을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아주 쉬운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넓혀나간 느낌이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듯이 쉽게 쓰여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기획의도에 충실한 원고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 헤매었을 글쓴이의 노력들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속의 그림이 흑백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날개를 들여다보니, 5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이 시리즈가 출간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에 충실한 책들, 그래서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00일의 썸머 - (500) Days of Summ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가 사랑의 실패를 다루는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부서진 사랑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꿰맞추는 것처럼, 사랑의 시간들을 빨리감았다 되감았다를 반복하며 보여준다. 처음 사랑에 빠져든 순간, 그 사랑이 깨진 순간, 상대방의 무엇이든 다 좋게만 보이는  순간, 미움의 감정이 생기는 순간 등 사랑에 빠지고 그것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 시간을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감정을 조였다 풀었다 한다.

  남자는 여자를 본 순간, 첫 눈에 반한다. 그리고 (미래의 장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접시를 깨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사랑이 접시처럼 깨지고 부서질지라도, 어쩌면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빠져든다. 누군가를 본 순간, 아 이 사람이구나 하는 감정. 그 감정은 미래에 접시를 깬다고 해도 지금 이 감정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서서히 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정에서 깨어나게 된다. 영화 속의 남자처럼. 

  영화는 전적으로 남자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사랑에 빠져들고, 그 사랑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 사람의 처절한 분투기니까. 이제 사랑 이야기는 무엇을 얘기하느냐보다도, 어떻게 얘기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상당히 칭찬해주고 싶다. 어떻게 얘기하느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신선하기 때문이다. 어긋난 사랑의 조각을 맞추듯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지나간 사랑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음악과 때때로 나오는 감각적인 화면은 인상깊었다. 편안한 이미지의 남자, 조셉 고든 레빗의 연기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는 사랑의 실패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실패해도 언젠가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했던 기분이 다시금 상큼하게 변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보고 싶게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리 & 줄리아 - Julie & Juli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시작부터 영화는 철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계속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 숨막힐 것 같은 직장. 별볼일 없는 일상에 대한 한숨.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줄리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그 블로그에 줄리아의 요리 레시피를 따라하는 프로젝트를 올리게 된 것은. 그렇게 사소한 이유로 시작된 줄리의 프로젝트는 점점 줄리의 일상에 달콤한 양념을 뿌린 것처럼 달콤하게 변화시킨다. 줄리의 프로젝트와 함께 시간을 거슬러 줄리아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과정이 서로 교차된다. 줄리아가 요리 학원에서 남자들과 함께 당당하게 요리 수업을 받는 장면, 그래서 결국 요리 책을 내게 되는 과정과 함께 줄리가 그 요리책을 보고 줄리아의 요리를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 과정이 함께 교차되며 그려진다.

별볼일 없던 직장을 다니던 줄리는 프로젝트가 성공하며 일약 유명 블로거가 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나씩 하나씩 요리를 따라하며 자신의 삶까지 멋지게 요리한 줄리. 때로는 요리 과정에서 좌절을 경험하며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하고 남편과 싸우면서 위기의 시간을 겪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평생에 뭐 하나 제대로 끝내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은 그녀를 자극시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드디어 무언가를 제대로 끝냈으니까. 대대적으로 성공했으니까.

자신의 일상을 맛깔스럽게 요리하듯, 매력적으로 연기한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가 인상깊다. 물론 깊은 맛을 내는 음식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한 메릴 스트립의 연기도 빠뜨릴 수 없겠다. 두 여자의 앙상블은 상큼하고 달콤했다. 영화 <다우트>에서 보여주었던 연기 호흡을 매력적으로 이어나간다.

줄리의 성공은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을 어떻게 요리하면 근사한 메뉴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하고 뭐 하나 잘난것 없고 지루한 삶에서 그래도 당신의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라고 하고 싶다. 어떤 것으로든 무언가 시작하게끔, 그래서 나의 일상적인 삶을,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