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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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영화가 있다. 영화가 다 끝난 뒤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도록 만드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다시 광고가 시작되는데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해 어정쩡하게 일어서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하는 영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노려보는 극장 직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쫓겨나듯 극장 안을 나와야 하는 기분. 조금 더 앉아 있고 싶은데, 조금 더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데 이야기는 끝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 그런 아쉬운 기분을 달래며 마지막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만약 영화로 태어났다면, 나는 절대 보지 않았을 종류의 영화였을 것이다. 배경과 등장인물이 도무지 내가 영화 속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머니까. ‘가족’ 관계의 지긋지긋함을 영화 속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 ‘가족’ 이야기다. 가족의 따뜻함을 확인하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고, ‘가족’이라는 거 아예 없었다면 좋겠다고 한 번쯤 생각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 읽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것을 권한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든 재미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박민규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처음으로 찍은 영화 한 편이 철저하게 실패한 이후, 영화계에서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영화감독인 ‘나’의 시선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1인칭 시점이다 보니, 은근 슬쩍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영화계에 몸담았던 작가의 경험이 묻어나오는 부분들이 많다. 이 소설 속에는 수많은 영화가 소품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삶도. (영화는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첫사랑 같은 것이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런 첫사랑에게 바치는 애틋한 편지는 아닐까?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 불러만 준다면 어디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 작가에게 영화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그런 영화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이 소설 속에도 살짝 스며 있는 것만 같다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


  사실상 끝나버린, 영화감독인 ‘나’외에도 이 소설에는 정말 막나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폭력과 강간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노년이 거의 다 되어 엄마 집에 얹혀사는 남자. 바람나서 집에서 쫓겨나와 딸과 함께 엄마 집으로 오게 된 여자. 한 편의 영화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알코올에 의존하는 남자(바로 영화감독인 ‘나’). 모두 늙어서 갈 데라곤 없어 엄마 집으로 기어들어오게 되는 상황이라니. 정말 기막히고 서글픈 상황 아닌가. 어렸을 때처럼 다시 이들이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과거의 비밀들이 하나 둘 밝혀진다.


  작가 자신이 과연 이 막장 드라마의 끝은 어디일까 추궁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막장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단골 소재인 ‘출생의 비밀’이 이 소설 속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에는 불륜과 이혼, 폭력과 범죄 조직, 연쇄 살인 같은 자극적인 소재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 ‘아니 정말, 이 막장드라마 같은 소설 계속 읽어야 하나?’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정말 ‘에잇, 이거 뭐야?’했을 이야기들이 능청맞은 입담과 재치 있는 유머에 힘입어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변신한 덕분이다. 과거의 저편으로 영원히 묻어두면 좋을, 가족을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이래서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자꾸만 보는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하나같이 서글프고 찌질하고 궁색한 인생들 속에서 작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소설가, 헤밍웨이의 삶을 슬쩍 집어넣는다. 영화감독인 ‘나’는 우연히 빌라 앞 쓰레기 수거함에서 누가 버리고 간 헤밍웨이 전집을 가져와 읽는다. 헤밍웨이는 비극적인 영화 속 주인공처럼 결국 권총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는다. 달콤한 날들도 있었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결국 삶의 고통 앞에 무릎 꿇고 만다. 그런 비극적인 삶이 궁색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인생들 속에 겹쳐진다. 이 수상한 가족들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감독인 ‘나’는 그 행복했던 시간을 자신이 첫 영화를 만들었을 무렵이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늘 그렇다. 행복한 순간은 늘 너무 짧고, 대부분 고통스럽고 슬프고 찌질하다. 우리 모두를 만든 신이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정말 대부분의 영화를 형편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 또한 “사는 게 왜 이 모양이지?” 하는 질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생들이다. 헤밍웨이처럼 결국 그런 삶을 끝낼 용기가 없을 뿐.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p.45


  작가의 말대로, 사는 일이란 정말 시시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찍는 일이다. 매번 함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고통스럽게 한숨짓는 일들의 연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에 때때로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늘 “사는 게 왜 이렇지?”하는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돈이 없어 조카를 협박해 용돈을 얻어내야만 하는, 다소 굴욕적인 삶. 그런 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지만 함정을 피해 다니다가 용케 <쇼생크 탈출>보다 더 짜릿한 인생 역전 드라마를 찍기도 하는 것이 삶이기도 한 모양이다. (이건 읽어보면 알게 된다)


 내게는 이 작품이 <고래>에 이어 읽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고래>라는 작품이 “와, 이 작가 정말 대단하다!”하는 감탄을 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와, 이 작가 소설 참 재미있게 쓰네!”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고 할까. <고래>에서 흡인력 강한 이야기의 재미를 느꼈다면, 이 소설에서는 거대한 이야기에서 느끼는 감탄이 아닌 소소한 장치와 설정에서 느껴지는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어떤 부분에선 정말 웃음이 꽝 터지기도 했고. 후기에 소설가 박민규와의 술자리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설을 읽다가 정말 박민규의 소설처럼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다. (이 작가가 소설가 박민규와 친하다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닮는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보기는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나서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 영화보다는 소설에 전념하겠다는 작가의 인터뷰가 자꾸 떠올랐다. 작가 후기에 이런 말까지 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그들이 나의 다음 소설을 또, 기꺼이 기다려줄 거라고 믿는다.”

  동료 소설가들에게 말하는 그의 이 다짐에는 약간의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자꾸만 작가의 인터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를 보면서 이 작가가 이제부터 정말 소설을 열심히 쓰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 작가가 자신이 정말 잘하는 것에 파고들어서 정말 다행이다.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난다는 건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니까. 그리고 꼭 읽어야 할 작가의 리스트가 늘어나는 것도 이래저래 즐거운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고래>를 읽고 <고령화 가족>을 읽은, 이제 막 ‘천명관’이라는 작가에 빠져들기 시작한 독자 한 명도 당신의 소설을 기꺼이 기다려줄 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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