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전부터 제목에서 퍼져 나오는 절망적인 여운을 알아챘어야 했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그 강한 여운. 그 힘찬 느낌표에서 느껴지는 강한 울림을 짐작했어야 했다. 물론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독과 절망을 미리 알았더라도 이 책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외에는 특별히 기억하는 작가가 없었어도 내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었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그 나른한 세계가 좋았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생각하면, 밤이 내리듯, 서서히 가라앉는 고독이 떠올랐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환상적인 공간이 그려졌다. 마르께스라는 단 하나의 작가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창비에서 세계문학 전집이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도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편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왜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함께 묶었을까 조금 의아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문학이 스페인과 언어 외에 어떤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과 별개의 권으로 구성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하는. 엮은 이의 말에도 “20개국이 넘는 나라들의 문학을 균형있게 고루 담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선정 기준을 살펴보니 작가와 작품의 선택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적으로 최근에 활동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 여성작가들도 5명이나 포함시켰다는 점, 가급적 우리말로 아직 옮겨지지 않은 작품을 선정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이름 있는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만을 가려 뽑은, 지금까지 나온 세계문학전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얘기니까.

 
엮은 이의 의도대로, 이 책은 다양한 빛깔의 단편들을 담고 있다. 나를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빠져들게 만든 마르께스 외에도 처음 만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그 다양한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들이 반가웠고, 그 작품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10개국 총 1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 작품 외에는 그리 길지 않아서 마치 짧은 단편 영화들을 보는 것처럼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기도 했고, 절망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따라가기도 했다. 비극적인 이야기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고, 독특한 글쓰기 방식 앞에서는 짧은 감탄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각 단편마다 그 여운이 강해서, 단편 영화가 끝날 때의 진한 암막처럼 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처음 책을 읽기 전, 예상했던 대로 마르께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계통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는 “마술적 사실주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날개가 달린 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현실은 환상 속에 녹아든다.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단편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드러누운 밤> 역시 환상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젊은이가 꿈속에서 원주민이 되어 꽃의 전쟁을 경험하는데, 작품의 끝에 이르면 그것이 정말 꿈인지 헷갈리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이처럼 교묘하게 섞여들 수 있다니.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의 <비>에서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 현실 속에 섞여든다. 이들 작품에서 환상은 현실과 경계를 긋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현실에 녹아든 환상을 느꼈다면, 스페인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1950년대 스페인 문학을 대표한다는 작가, 이그나시오 알데꼬아의 <영 산체스>에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나 마리아 마뚜떼의 <태만의 죄>에서는 꿈이 박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비극적 최후가 담겨 있다. 헤수스 페르난데스 산또스의 <까까머리>는 폐병에 걸린 아이의 이야기다. “난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서 현실에 스며있는 깊은 절망이 전해져왔다. 뒷부분의 해설에 보면, “어떤 유럽 국가도 스페인만큼 이른 시기에 자국어로 서사산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또한 그러한 스페인의 찬란한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작가와 작품 수의 제약 탓에 스페인 문학 속으로 좀 더 깊이 빠져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특히나 나를 사로잡았던 건 여성작가들의 단편이었다. 독재 정권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많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글쓰기는 하나의 저항으로 인식되었다. 억압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의 글쓰기는 더욱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그래서 더욱 뜻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여성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작가,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문장은 몇 번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고통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충만함과 온화함의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녀를 상처입힐 수 없으리라.” <나무>라는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의 상상력은 재기발랄했다. 이 작품에서 봄발은 ‘나무’라는 식물적 상상력을 음악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아름다운 리듬감으로 절묘하게 섞으며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한다. ‘포스트붐’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도 인상깊었다.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벨리사라는 인물과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각각의 단편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는 점이었다.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작가 소개와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닌데도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작품 뒤에는 친절하게도 더 읽을거리를 제시해 줌으로써 작가에 대한 탐구가 더 깊어질 수 있게 안내한다. 19편의 단편을 읽으며 이 책이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올 수는 없더라도,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작품을 많이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감안할 때,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특정 지역의 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그동안 미처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는 듯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마치 신비스러운 매력을 지닌 사람을 새로 소개받은 기분이랄까. 스페인에서 꾸바까지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다양한 빛깔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작가의 이름을 새기고 그의 작품을 좀 더 맛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강력한 마법에 빠진 것만 같았다. 마법처럼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작품들. 고통과 절망이 환상 속에 스며들어 마치 나른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 그런 작품들 속에서 소설 읽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