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특사 이준
임무영.한영희 지음 / 문이당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헤이그 특사로만 알려져 있던 이준 열사의  49년 생애를 책으로 담았다.

이준 열사는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인 부친 이병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사가 세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별세하셨고 곧 이어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 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하고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 제 1세대 검사이자 법률가였다.

그는 올바른 태도와 엄정한 일처리로 백성들로부터는 호법신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이완용의 형인 평리원재판장 이윤용과 ,

법부대신 이하영의 불법적 행동에 저항하다가 구속되고 결국은 파면당했다.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이준은 적덕기와 박상궁 등의 도움으로 고종을 만나게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액이 고종의 뜻으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것임을 알려야한다고 고종에게 제의하고 고종은 이준을 특사단의 부사로 채용한다.

1907년 4월에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성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뜨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헤이그에 도착한다.

 

이 준은 이상설, 이 위종 두명의 특사와 함께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며 일제에 의해 멸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각국 대표와

언론에 알리려 노력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를 받아 임무는 실패한다.

이에 세명의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작성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등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못해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하게 된다.

 

소설은 이준 열사의 삶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치밀한 구성으로 되살려 '인간 이준'을 다시 바라보게한다.

이처럼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의 선열들은 이준 열사 이외에도 많다.

보이지 않는곳에서 또는 보이는곳에서 나라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을 괴롭히며 또는 숨어서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게 아닐까?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라는둥 망언을 일삼지만 우리모두는 그들의 숭고한 죽음앞에 묵례를 해야한다

지금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땅이라고 우기며 또다시 우리 대한민국을 침탈하려고 한다.

명실상부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고 일본은 이제 대한민국에 사죄하고 평정심을 찾아야 할것이다.

며칠전 국가대표 평가전으로 한일전이 치루었었다.

결과는 사상초유의 망신살을 사며 0-3 스코어로 대패했다.

울분만 터뜨릴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으로 대한민국은 다시 뭉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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