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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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은 생각의 통념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사람이다. 글을 통해 그녀가 던지는 예상치 못한 관점과 뜨거운 문제제기는 늘 놀라움을 선사한다. 신작 <정희진처럼 읽기>가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했을 때 내용도 보지 않고 주저없이 책을 신청했던 이유는 이 책 역시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줄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접한 정희진 선생의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 첫 번째였다. 책을 읽은 후 '와, 이 여자 센데'라고 생각했다. 왜 여성학자(그녀는 이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들을 '드세다'라고 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책 속의 화자는 백인, 남성, 서울 등, 흔히 세상의 기준(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향해 과감하게 짱돌을 던지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여성이지만 표준어를 쓰고, 서울경기권에서 태어났고, 비장애인인, 나름대로 주류에 편입되어 살고 있기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에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페미니즘의 도전>에 나오는 대목 가운데 한 문단이다. 이러한 대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것 같다.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또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이처럼 책 속의 그녀는 백인사회, 서울사회, 남성사회, 한국사회, 비장애인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의 대변자였다.

 

그녀는 늘 글을 통해 자신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며 억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본인은 굉장히 우유부단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라고 항변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자기주장 강한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이유는 '사회 통념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느끼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튀는 못은 정 맞는다, 라고 말하니까. 주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목 끝에 걸려 있는 생선가시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독서 에세이를 출간했다. 모난돌 정희진 선생의 독서 에세이라면 단순히 책소개로 끝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보통 책에 관한 책은, '유명한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재빨리 파악하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읽는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전자의 욕구는 충족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책은 아니다. 독서 에세이지만 사실은 '내가 소개하는 이 책이 세상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꼭지를 읽는다 해서 그 책이 어떤 책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소개하는 책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그냥 그 책을 직접 읽으라는 식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하고 싶은 사람이 이 책을 손에 집어들었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독서 에세이가 아닌 정희진 선생의 사회 에세이라고 봐야 한다. 책에 관한 책이지만, 사회통념과 다른, 비주류의 입장에서 주류를 비판하는 그녀의 남다른 눈썰미가 읽힌다. 책 속에서 <세계사의 해체>를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세상을 말하는 방법, 그것이 정희진식 책읽기 방식이다.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가 읽는 내용을 결정한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가 있지만, 소재별로 읽기보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선택한다."

 

이 책은 우선 리스트부터 남다르다. 정희진 선생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베스트셀러'는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비주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그녀의 관점이 드러난다.) <문장강화> <화> <태백산맥> 등 밀리언셀러들이 종종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낯선 책들이다. 분야도 광범위하다. 본인의 주 전공인 페미니즘 책부터 <빅이슈>와 같은 잡지, <군주론> <손자병법> <천자문> 같은 고전에 <손무덤> <전화> 같은 시까지, 분야를 막론한다.

 

흔히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통념이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류의 입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 주류 밖에 있는 관점을 공론화시키는 글. 그게 바로 정희진의 힘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종류의 서평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노동하고 존재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내가 그녀의 글을 빠짐없이 읽으려 노력하는 이유다. 그녀는 "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흥분을 주는 책"을 독서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내게는 그녀의 책이 그러한 자극적인 '빨간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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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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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2014년 4월은 세상이 회색빛이었다. 온 세상에 그늘이 짙게 드리운 느낌이었다. 4월 16일 이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동안은 교복 입은 학생만 봐도 눈물이 나고, '세월'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이 경직되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더니 벌써 300일이다. 나는 여전히 교복 입은 학생을 보면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나고, 세월이라는 단어에 몸이 움츠러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남들은 다들 잘 살아가는데 나만 혼자 유난인 것 같아 주눅 들기도 한다.

 

때로는 울컥, 화도 난다. 그 많은 사람이 눈앞에서 수장당했는데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 분노가 일고, 동의는 하지만 나서지는 않겠다며 뒷짐 지고 있는 사람들이 미워서, 너무 빨리 잊는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나는 자꾸만 대상 없는 어딘가에 화를 낸다. 혼자 실망하고 미워하고 좌절하곤 한다. 때로는 일베하는 놈들과 방관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네 아이들이면 그러겠냐고 대거리라도 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에 대해 막말하는 기사라도 뜰 때는 쫓아가서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 마음도 이런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희생자 가족들의 그 짐작도 할 수 없는 절망과 괴로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 가운데 하나는 내가 영양가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발생 후부터 지금까지, 지난 1년 동안 내 SNS와 블로그에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썼다. 그 말들을 통해 내 분노와 좌절을 한껏 표출했지만 그 글이 결국 감정의 배설 기능 외에 무엇을 해냈는지 모르겠다. 내 글들이 그들의 슬픔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내가 느낀 감정을 글로 표출하는 것이 진실을 알기 위한 발걸음에 얼마나 일조를 했을까. 나는 그들의 상처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이 될 수 없었다. 이 책을 쉽게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다. 국내에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모여 쓴 <눈먼 자들의 국가>의 유려한 글들보다 투박한 문투의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더 읽어내리기 힘들었다. 읽는 내내 죄스러워서, 끊임없이 울었다.

 

우리가 유가족 분들 뒤에 숨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대한민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릴 때까지 방관하고, 그로 인해 생긴 온갖 문제와 비리를 막지 못해 그분들이 18년 동안 곱게 키운 아이들을 잃게 만들었으면서 이제는 싸움터의 최전방에 그들을 세워놓았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 경제 다 죽는다고 윽박지르는 목소리 앞에 그분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과 행동으로 그들과 희생된 자들이 더렵혀질 때 나는 분노하는 것 외에는 해드린 게 없다. 그러니 그분들을 보면 자꾸만 죄송함에 고개가 숙여지고 땅만 바라보게 된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다. 기억하고 싶어서,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고 싶어서 자꾸만 읽었다.

 

이제는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냐고 하는 사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한 꼭지만이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18년 고이 키운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부모의 심정을, 안산에 너무 많은 아이의 추억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또는 너무 많은 추억이 괴로워서 서둘러 떠나는) 부모의 심정을, 아이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마지막 날 전화를 바로 받지 못한 일부터 아이와 싸운 일, 사고 전날 아이에게 많은 돈을 많이 쥐어주지 못한 일, 심지어 사고 당일 사고가 일어난 지도 모르고 머리를 감은 일까지)까지 수없이 곱씹으며 미안해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귀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는 미안해야 할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아픈 사람에게 괜찮냐고 손을 내미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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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산다는 것 - 학교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이계삼 해제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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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들은 교련 수업을 기억한다. 선생님이 김일성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사회주의는 만민이 평등하다고 말하는데 공산당은 인민보다 위에 있으면서 호위호식한다, 북한은 이사도 못하게 종이에 자신의 거주지를 다 적어 내야 한다, 등등의 말도 기억난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서해서 북한 배가 38선을 넘어와 총격을 벌였느니 어쩌니 하는 뉴스 속보를 틀어줬다. 나는 그 방송을 보며, 전쟁이 날까봐 무서워 울었다. 찌라시를 발견하면 학교로 가지고 오라며, 찌라시에 보통 어떤 글들이 씌어 있는지 알려주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 빨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그때는 그저 북한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빨간색이라는 뜻인 줄 알았다. 몇년 뒤 교련 과목은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은 오래 갔다. 북한 사람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려준 건 학교가 아니라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이었다. 내가 배운 교과서에 거짓이 들어갈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교등학교 사회 수업 생각도 난다. 학교에서는 님비현상, 핌비현상 두 가지만 가르쳐주었다. 선생은 님비현상, 핌비현상을 설명하면서 "나는 우리 집 앞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하면 찬성할 거다. 국민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찬성 또는 반대하면 나라에서 제대로 일을 못 한다"라는 말을 했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시위가 개인의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건 줄 알았다. 교과서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산천을 보호하기 위해, 그냥 온전히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위험한 원전을 짓지 말고 자연을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담아주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생명의 이익을 위해 싸울 수도 있음을 나는 교과서가 아닌 지율스님의 단식농성과 밀양 송전탑 투쟁을 통해 알았다.

 

지금도 궁금하다. 교과서는 왜, 선생님은 왜 내게 세상의 일부만 가르쳤을까. 왜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을까.

 

 

 

 

<교사로 산다는 것>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에 대한 답이 나와 있다. 어떻게 교과서가 보수화되는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사회의 불의를 방관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교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잘못된 교육에 대항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부제를 '학교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이라고 명명한 이유다.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각을 갖도록 해줘야 할 학교나 책이, 이미 정해진 결론 쪽으로 교묘하게 아이들을 유도했다는 건 불편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 논리적인 결론이라는 것이 거의 매번 미국인의 삶과는 다른 삶은 모두 실패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해진다."

 

책에 따르면 교과서는 책에 나온 삶 외의 다른 삶은 실패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로 열정을 차단하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는 데 집중한다. 아이들은 생각을 거세당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최상이며, 서로 극단으로 갔을 때는 '중도'나 '타협점을 찾자'는 말로 토론을 끝내도록 교육받는다. 이를 통해 '극단과 불복종은 나쁜 것'이라는 인상을 주입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파멸을 가져오는지. "잘 교육되고 적당히 길들여진 어른들"만 키워낸 교육과, 이러한 교육과정을 방관한 우리는 모두 공범자다. 아이들을 교육이라는 세월호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불의를 보면 참지 말고 일련의 기만적 과정이나 자기기만 행위에 당당하게 "안돼"라고 말하게끔 도와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각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은 어른의 몫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실천과 책임있는 행동이 절실하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직접 이야기하고 눈에 보이는 행위로 보여줄 때 어떤 책보다 학생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강렬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불공정한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어떤 경우든 '더 큰 상황'을 조용히 인식하면서 바로 지금, 바로 여기부터 실질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꿈꿀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수단을 써가며 노력해야 한다."

 

누구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예쁜 생각만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사회에 나가면 알아서 배울 텐데 지금부터 그러한 세상에 노출되게 만들어야 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 때 가만히 있는 것을 배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불의 앞에 저항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독일 공립학교에서 복종하는 것만을 배웠기에 "나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라고 법정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아프지만 정면으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선물해야 하는 이유다. 책은 다음과 같은 시로 끝맺는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천국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이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아이들은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네. 아이들도 인간이거든

아이들에게 숱한 어려움에 대해 말해주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히 보게 해줘야 하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장애와 난관에 대해 말해주게

마주치게 될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해주게

지옥 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려주게

행복의 대가를 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예브게니 옙투셴코, <거짓말>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직접 이야기하고 눈에 보이는 행위로 보여줄 때 어떤 책보다 학생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강렬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불공정한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어떤 경우든 `더 큰 상황`을 조용히 인식하면서 바로 지금, 바로 여기부터 실질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꿈꿀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수단을 써가며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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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
정태인 지음 / 상상너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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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 시장은 개인의 이기심을 토대로 가격이 형성되므로 정부의 개입이 없어도 된다고 주장한다. 사고 싶어 하는 사람과 팔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절한 수요공급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시장이 돌아간다는 논리다. 이를 '자유경쟁'이라 한다. 그의 주장은 경제학계의 진리로 굳어졌다. 현재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기반으로 사회를 설명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그것이 진리인 줄 알았고, 학교 교과서에서도 그의 이론을 진리인양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주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모순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생산자에게 공정한 값을 주고 사온 공정무역 커피를 사고, 내가 신발 한 켤레를 사면 불우한 이웃 한 사람에게 신발을 기부하는 탐앤탐스의 정책에 열광한다. 얼마 전에는 대구에서 한 남성이 길에서 800만 원의 돈을 뿌렸는데, 그가 뿌린 현금이 할아버지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4700만원의 일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 현금을 돌려주기 위해 경찰서에 들르는 시민의 발길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행동은 인간이 이기적이기만 하다면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공정무역 커피와 탐앤탐스와 다르게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우리는 늘상 눈으로 본다. 대형 마트가 싼값을 내세워 시장을 잠식하고, 사업자가 노동자를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등, 인간의 이기심이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현상은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이 진리인양 이야기되는 현 사회를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상태라고 진단한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내가 선수치지 않으면 선수를 뺏긴다. 뺏기지 않기 위해 모두가 달려가고 있는 것을 그는 '죄수의 딜레마'라고 표현한다. 남들이 사교육을 시키니까 내 아이가 뒤쳐질까봐 두려워 덩달아 사교육을 시키는 학부모, 남들이 먼저 미국과 FTA를 체결하기 전에 먼저 진입해야 한다는 정부 등을 딜레마에 빠진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그는 이 경제논리를 '탐욕'과 '공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단어로 표현한다. 

 

"사실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남이 협력하는데 내가 배반하는 것은 탐욕이에요. 자기탐욕이에요. 그런데 남이 배반할 때 내가 배반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내가 착해도. 그래서 이건 공포라고 부릅니다."

 

이 딜레마에 빠지면 결코 헤어나오기 어렵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해, 이것은 마치 치킨게임처럼, 상대방이 포기 선언을 할 때까지 계속 밀어부치는 방법 외에는 다른 해결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수의 딜레마로 흘러가는 경제는 결국 돈이 많은 자가 이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책은 '사슴사냥게임'이라는 논리를 가져온다. A와 B가 사슴 사냥을 나왔다. 둘이 힘을 합치면 사슴을 잡을 수 있지만 혼자서는 토끼밖에 못 잡는다. 사슴을 잡으려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옆에서 토끼가 지나간다. 이때 A와 B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여기서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함께 사슴을 잡거나, 함께 토끼를 잡거나. 즉 크게 얻든 작게 얻든 협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 책은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이기도 한 인간이 함께 성장하는 가능성을 '협동조합'에서 찾는다. 협동조합은 모든 조합원이 주인이 되는 체제를 말한다. 함께 노력하고, 함께 성장한다. 물론 때로는 다른 사람에 덕을 보며 자신은 가만히 앉아 무임승차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협동조합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출자해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데 은행에서는 협동조합에 대출을 해주는 것을 꺼려한다. 일하는 사람의 임금은 아무리 올라도 초임의 6배를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반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테니 인재가 늘 부족하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 문제들에는  큰 이치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 바로 '사람은 돈 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월 1표인 주식회사와 다르게 협동조합은 1인 1표를 기본으로 하는 완벽한 민주주의다. 내 의결권이 회사에서 크게 좌우되고, 내 의견을 통해 회사가 움직인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보다 민주주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책은 이러한 관점을 훌륭하게 이루어내고 있는 이탈리아와 스웨덴의 사례를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를 기반으로 한 이기적인 경제를 헤쳐나갈 방법은 모두의 협동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이타적 인간'의 사회로 되돌리는 방법밖에 없다. 함께 성장하면서 내 삶이 더 좋아질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따뜻하고 협력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된다면, 그리고 서로에게 신뢰가 쌓이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더 좋은 쪽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착한 경제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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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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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미터 혹은 100미터에 한 곳씩, 길모퉁이를 지날 때면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편의점. 이 소형 마트는 이제 우리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플라스틱에 담긴 도시락을 사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담배를 구입하며, 즉각적으로 필요한 기타 물건을 위해 편의점에 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는 낯설지 않다. 무엇이 현대인을 편의점으로 이끄는 것일까. 매일 아침 편의점에서 아침식사용 삼각김밥을 사는 사람에게 “왜 편의점을 이용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편리하잖아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편의점을 선호하는 것은 꼭 편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집 앞의 구멍가게가 있어도 멀리 떨어진 프랜차이즈 편의점으로 달려가 스타킹을 구매하는 심리는 ‘편의성’ ‘편리성’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편의점 사회학>은 편의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소비심리 속에는 일정한 사회학적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고 밝힌다. 책에 따르면 편의점은 현대 소비주의 사회의 특징과 각별한 궁합을 보여준다. 편의점 공간 특유의 분위기, 다시 말해 밝은 빛으로 가득한 세련된 내부, 안과 밖을 적당하게 나누어주는 투명 유리, 내가 다가가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끼고 활짝 열리며 열렬히 환영하는 자동문,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점원과의 적절한 관계, ‘무언가 고상한 행위를 하고 있다’ 느끼게 만드는 청결함과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음악 등. 이 모든 것이 “무한 소비의 속도전에 동원되는 소비기계가 아니라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끔 만드는 전략”이라고 소개한다. 저자는 편의점을 신속하고 방대한 소비를 누리게끔 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원칙의 집약체로 본다. 이를 사회학 용어로 ‘사회의 맥도널드화’라고 한다. 편의점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맥도널드화는 현대사회 전반에 걸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물감을 느끼지 못한다.

 

맥도널드 원리는 크게 보아 네 가지다. 첫째는 효율성인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빠른 시간 동안 한 끼를 그럴듯하게 해결하는 데는 그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계산성이다. 셋째는 예측가능성이다. 뉴욕에서나 부산에서나 어제나 내일이나, 음식의 질과 내용은 표준화되어 있어서 실패할 경우가 없다. 끝으로 자동화를 통한 통제성이다. 셀프서비스를 따라야 하고 좁고 불편한 좌석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저 먹고 빨리 일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결국 근대사회의 새로운 식당형태로서 패스트푸드는 소비자와 경영자, 피고용자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다.

 

맥도널드화는 편의점의 ‘기계적 비인격성’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계산원과 구매자는 그 어떤 개인적인 대화도 필요치 않다. 최대한 빨리 계산하고 다른 사람의 돈을 받는 것이 계산원에게 주어진 목표다. 모니터가 있기 때문에, 서로 원한다면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통과할 수도 있다. 일종의 ‘무관심의 배려’다. 여기서 편의점 알바생은 인격체가 아닌 ‘단순노동 종사자’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자리는 색채가 없기 때문에 꼭 그가 아니어도 된다. 유니폼만 입혀 놓으면 다른 사람으로 금세 대체될 수 있다. 저자는 이처럼 “편의점 공간은 점점 기계를 닮아가고 그 안의 사람은 덩달아 로봇이 되어간다”고 진단한다.

  

현대인들은 이를 오히려 반기고 있다.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고 지내는 이른바 ‘거대한 관대’를 환영하고 ‘무관심의 배려’를 긍정한다.” 빠르게 소비하고 다시 소비하는 것이 목표인 자본주의에게는 최적의 상황이다. 이러한 사회의 긍정에 힘입어, 편의점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생활 서비스 상점들을 흡수하는 중이다. 식당 대용으로, 술집 대용으로, 종합 생활서비스센터 대용으로, 금융기관과 공공서비스 대용으로, 심지어 치안과 사회복지 부문 대용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저자는 편의점의 무서운 문어발식 확장의 폐해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편의점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 인프라 혹은 도시 장치로 의심하는 까닭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그것은 양과 속도의 측면에서 재화와 용역의 순환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또한 그것은 신종 도시 인프라로서, 개인화된 경제 주체의 이동성과 유목성 증대에 기민하게 기여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부응하는 소비주의 인간을 양산하는 데도 편의점을 일등 공신이다. 편의점에 의해 신자유주의적 의식과 일상이 알게 모르게 육화肉化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편의점은 문화 공간을 자임할 뿐 아니라 금융이나 치안, 복지와 같은 공적 기능에까지 자신의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끝으로 편의점은 현대인의 취향과 행동 패턴 및 경향을 빈틈없이 꿰뚫고 기록하는 정보 수집가이자 사회 분석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편의점은 신자유주의 모바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신종 도시 통치 인프라로 급부상 중이다. 그럼에도 막상 현실 속 우리들은 편의점이 이용하기 편리하다는 생각만 할 뿐, 세상을 은밀히 지배하는 편의점의 숨은 권력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장치로, 소비를 위한 존재로, 감시의 대상으로 ‘기꺼이’ 지배받고 있는 현대인들을 꼬집는다.

 

편의점의 무서움은 이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편의점은 2030세대가 소비의 주를 이룬다. 값싸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편의점만큼 적절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낙오자나 희생자들이 편의점에 의지하는 정도는 점점 높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이 책은 “88만원 세대의 밥집은 편의점”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배경은 ‘사회 양극화’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 편의점 방문의 주 목적은 값싸게 '식사대용 식품'을 찾기 위함이다

 

또한 편의점에는 ‘갑을관계’의 논리도 숨어 있다. “편의점 본사가 갑이고 점주가 을이라면, 편의점 안에서는 점주가 갑이고 알바생이 을이다. 편의점 세계에서는 알바가 ‘을 중에 을’이 되는 구조다”라고 소개한다. 앞서 보았듯이 알바생은 ‘인격체가 아닌 값싼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가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는 뜻에서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 편의점 유니폼만 입혀놓으면 그 빈자리는 바로 채워진다.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쓰고 쉽게 버리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함께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하나둘씩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러한 노력들이 연대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가기에 당장에는 편의점이 너무나 가깝고 편리하여, 사회 전반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알게 모르게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편의점을 “세상의 근본적 변혁을 가로막는 마취제나 진정제 아니면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라고 평가한다. 편의점은 현대인을 점점 개인화시켜 양극화의 심화가 사회 혁명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교묘하게 작용한다.

 

저자는 “이처럼 편의점이 생활의 중심, 생활의 도구, 생활의 방법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기 시작하는 마당에 이를 학문적으로 방치하거나 간과하는 일은 지식 사회의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펜을 들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불합리에 항의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는 시민들이, 그 촛불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르는 아이러니를 꼬집고 이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보라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편의점.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편의이고, 무엇을 위한 편리인가? ……편의점에 점점 더 예속되고 중독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삶의 질 향상 및 도시 공동체 재건을 위해 선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편의점 사회에 대한 시민적 주권의 회복과 유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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