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음 / 동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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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을 지탱해온 유교주의는 우리 삶 곳곳에 녹아 있다. 자고로 교양 있는 성인이라면 '섹스'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망측한 단어다. 게다가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주체가 중고등학생, 심지어 여자아이라면? '어린 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ㅉㅉ'라는 일장연설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유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섹스 라이프'를 공개한 책을 펴냈다. 책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섹스'라는 단어가 우수수 쏟아진다. 그것도 2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선천적으로 성격이 강한 사람은 피하는 편이라,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는 별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저자의 페이스북을 보게 되었다. 책을 출간한 이후 페북 메시지를 통해 각종 성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글에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많은 남자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녀의 다른 글을 본 적이 없어 평소 어떤 문투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책 속에 표현되는 그녀의 글은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성적 금기를 깨보이겠다'는 의지로 가득하다. 타협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언제까지 그놈들의 눈치를 보며 섹스를 할 텐가? 이타적 섹스를 멈추고, 나를 위한 이기적 섹스를 시작하자!"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글이 교양 있는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께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니 '그 입 다물라'며 각종 질 떨어지는 방법으로 그녀를 공격하는 중이리라.

 

출처: <이기적 섹스> 저자 은하선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eunhasun2?fref=ts


글은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남자들의 에피소드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성에 대한 세상의 금기에 저항하기 위해 쓴 글이고, 후자는 세상에는 '정상'이라는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이토록 많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를 들여다볼 때는 내가 얼마나 내 욕망에 충실하지 못하게 살았는지 느꼈고, 후자를 읽을 때는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른 삶도 상상해볼 여지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섹스라이프를 들여다보면 나조차도 불편해지는 지점들이 있다. 10대의 섹스를 어떻게 볼 것인지, 스리섬을 옹호할 수 있는지 같은 주제들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제대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 뭐라 언급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글이 불편하게 느껴졌다는 것은 그 글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금기를 건들였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금기와 편견을 깨뜨리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섹스한 여자들을 '헤픈 년', '걸레'로 만들어온 건 남자들이다. 여성들의 유전자 속에 깊이 내재된 트라우마를 전부 걷어내기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역사가 너무 짧지 않나. 그 시간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투덜거리기만 하면 정말 답 없다. 옛 선조들이 여자들에게 '순결함'을 강조하며 쌓아온 시간의 업보를 이 시대 남자들은 온전히 물려받은 거다."


"'어른'은 결코 완벽함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책임지고 섹스를 하는 어른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섹스를 하지 말라는 말은, 어른이 되면 책임감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책임감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실체 없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10대들을 괴롭히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섹스를 위한 성교육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싫은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해방이다. 섹스에 대해서 여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입을 열 때,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알 때 비로소 진정한 성해방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자신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섹스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누군가는 성적 지향을 타고나는 거라 말하지만, 자기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살면서 발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난 성적 지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타고났든 바뀌었든 선택했든 간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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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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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트위터는 진보 논객들이 행한 데이트폭력을 폭로하는 트윗으로 뜨거웠다. 유명 진보논객으로부터 데이트폭력을 입었다는 A씨의 폭로에 힘입어 다양한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각종 기사가 쏟아졌다. 이에 SNS에서도 찬반 입장이 대단했는데, 찬성 입장은 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반대 입장은 남성의 권리를 옹오했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대부분 피해자를 비난하는 내용들인데, "왜 그때 도망가지 못했냐"부터 시작해서 "맞을 짓을 했겠지", "3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밝히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꿍꿍이가 있다" 등, 이러한 반응으로 인해 2차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1. 누구나 폭력 앞에서는 보복이 두려워 이성적인 생각을 놓치게 되고, 2.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맞아야 할 사람은 없으며, 3. 3년이 지나서 밝히는 꿍꿍이가 아니라 3년 동안 그 폭력의 기억에 고통받고 힘들어하다가 이제야 입을 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3년 동안 해결된 게 없으니까.


우리는 왜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감싸주고 옹호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은 가벼운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문장에 들어간 함의는 남성성의 권력에 관한 이야기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말이야.."로 시작하는. 여자는 잘 모르니 알려줘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생각에 관한 비판이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상대를 소유하려는 욕망, 군림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맨즈플레인"이라고 한다.


맨즈플레인의 극단적, 폭력적인 방법이 데이트폭력, 강간 등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미국에서는 6.2분에 한 번씩 경찰에 강간신고가 접수되고, 여자 5명 가운데 한 명은 강간을 당한다고 이야기한다. 강간의 심리 또한 "내가 소유하고 싶다 생각하면 소유해야 하며 너는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말을 담고 있는 폭력이다. 데이트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여자는 수시로 남성의 권력남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앞서 이야기한 데이트폭력의 SNS 반응과 마찬가지로 "나는 안 그런다. 모든 남자를 하나로 취급하지 말라", "이는 남성 역차별이다"라는 류의 반응이 나온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며 산다. 때로는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추라는 여성 트위터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남성의 '선긋기' 반응에 해시테그 #여자들은다겪는다 로 대응한다. 이 해시테그는 전 세계 50만 건이 작성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맨즈플레인이나 강간, 데이트폭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젠더 문제이지만, 이는 동등하게 살고 싶다는 한 사람의 외침이기도 하다. 가르쳐야 하고 군림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이다. 한 모 씨의 데이트폭력을 폭로한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여성도 데이트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말에 힘입은 다른 여성도 자신의 경험을 폭로하며 "앞선 두분의 발언으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두 분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맨즈플레인과 데이트폭력, 강간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맨즈플레인이든 성폭력이든, 그 안에 들어 있는 함의는 같다. "가만히 있으라. 내 말을 들으라." 이 책이 맨즈플레인과 성폭력을 한 권 안에서 이야기하는 이유다.


책에는 폭력을 당하는 여자들, 동성연애자, 제3세계 착취 문제 등이 다양하게 나온다. 반대편에는 남자, 이성애자, 선진국들, 권력자들이 서 있다. 책에서 보듯이 폭력은 늘 약자를 향한다. 우리가 약한 존재를 감싸주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 샌드백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없다면? 다음은 우리 차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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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세요? - 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 집 이야기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사계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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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이별까지 7일>은 시한부 어머니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배경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빚더미에 허덕대는 일본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에서 시한부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택담보 대출을 갚아나가기 위해 사금융 등에 손을 대며 또 다른 빚을 지고, 빚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한다. 노후 준비는 집 한 채가 전부이고, 수입은 경기침체로 인해 공장 직원들 월세를 주기에도 빠듯하다.


영화에서는 감당 못할 빚을 진 어머니 아버지가 무능하고 어리석게 비추어지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대도시에서 한 시간 남짓하는 근교에 있는 집을 대출을 끼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들이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산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몇 년만 버티면 두세 배 뛴 집값이 그 모든 힘듦을 보상해줄 테니까. 이런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집에 목을 매던 수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나앉게 되었고, 매물을 시장에 내놓아도 누구도 사지 않는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일본의 집값은 1990년 이전 가격의 절반을 밑돈다.


이러한 일본의 오늘이 남 일 같지 않은 이유는 1990년대 이전의 일본 상황이 현재의 우리나라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미리 오를 집값을 기대하며 대출을 끼고 집을 구하는 현상, 노후준비는 가진 집 한 채가 전부인 5060세대들, 집값을 떠받치기 위해 금리를 1퍼센트까지 낮추어주는 정부정책 등, 대한민국 정부의 부동산은 위태롭기만 하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의 현 상황을 점검해보고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해보는 책을 한 권 살펴본다.



<어디 사세요?>는 부동산에 저당잡힌 한국사회의 집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0년 이명박정권 때에 씌어진 책이라 현재를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일부 보이나 부동산 문제는 박근혜정권에서 심화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아파트 공화국의 현실과 이에 따른 실失에 대한 것들이다. 우리나라 50년 토건공화국의 역사, 집이 사는(live) 공간이 아닌 투기꾼의 현장이 된 이유, 재개발 이후 공동체의 붕괴, 광고라는 자본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부동산 관련 기사들, 정치적 무관심을 이끄는 전월세 이주민들의 생활 등이 다양한 도표와 함께 제시되고 있다.


특히 계약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인 2년마다 떠돌아다니는 하층민들의 유목민 생활이 정치의 보수화를 불러 일으켜 현재 부동산 시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 내용은 주목할 만한 요소다. 인터뷰이들은 "2년 뒤에 어디에서 살지 알 수 없는데  내 지역 정치인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하는데, 잘못된 정치로 인해 자신의 주거권이 침해받는다는 인식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정치냐'라고 말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생활정치가 왜 중요한지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독일과 일본의 마을재생 사례를 예로 드는데, 시민 하나하나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될 때 내 삶과 내 마을이 어떻게 바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시민들이 적극 나서 쟁취해야 할 권리이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정치인들이 시혜처럼 내려줄 만한 요소가 아니다.


누가 지도자로 선출되는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버스비가 얼마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70원"이라고 대답한 어느 정치인을 욕하지만, 사실 버스비가 얼마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서민을 위해 힘써달라고 뽑은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들이 뭉쳐 만들어낸 것이 서민을 몰아내 그 자리에 업자와 투기꾼들을 배불리게 하는 재개발과 토건공사다.


우리는 지금까지 '효율성'이라는 이름하에 마을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수많은 재개발의 폐해를 목도해왔다. 마을이 파괴된 공간에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이웃과 자연과 단절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인간소외와 획일성, 성장과 부 중심주의라는 각종 단점을 불러왔다. 바로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애도보다는 집값 떨어질 걱정부터 하는 삶은 너무나 처연하다.


책에는 "정신이 도시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거꾸로 도시의 모습은 정신에 그 영향을 미친다"는 멈포드의 말이 언급된다. 지금까지 도시의 정신은 '성장'과 '효율성' '돈'과 같은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좀더 다양한 삶을 꿈꿀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 사세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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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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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은 생각의 통념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사람이다. 글을 통해 그녀가 던지는 예상치 못한 관점과 뜨거운 문제제기는 늘 놀라움을 선사한다. 신작 <정희진처럼 읽기>가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했을 때 내용도 보지 않고 주저없이 책을 신청했던 이유는 이 책 역시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줄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접한 정희진 선생의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 첫 번째였다. 책을 읽은 후 '와, 이 여자 센데'라고 생각했다. 왜 여성학자(그녀는 이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들을 '드세다'라고 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책 속의 화자는 백인, 남성, 서울 등, 흔히 세상의 기준(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향해 과감하게 짱돌을 던지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여성이지만 표준어를 쓰고, 서울경기권에서 태어났고, 비장애인인, 나름대로 주류에 편입되어 살고 있기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에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페미니즘의 도전>에 나오는 대목 가운데 한 문단이다. 이러한 대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것 같다.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또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이처럼 책 속의 그녀는 백인사회, 서울사회, 남성사회, 한국사회, 비장애인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의 대변자였다.

 

그녀는 늘 글을 통해 자신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며 억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본인은 굉장히 우유부단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라고 항변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자기주장 강한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이유는 '사회 통념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느끼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튀는 못은 정 맞는다, 라고 말하니까. 주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목 끝에 걸려 있는 생선가시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독서 에세이를 출간했다. 모난돌 정희진 선생의 독서 에세이라면 단순히 책소개로 끝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보통 책에 관한 책은, '유명한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재빨리 파악하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읽는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전자의 욕구는 충족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책은 아니다. 독서 에세이지만 사실은 '내가 소개하는 이 책이 세상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꼭지를 읽는다 해서 그 책이 어떤 책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소개하는 책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그냥 그 책을 직접 읽으라는 식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하고 싶은 사람이 이 책을 손에 집어들었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독서 에세이가 아닌 정희진 선생의 사회 에세이라고 봐야 한다. 책에 관한 책이지만, 사회통념과 다른, 비주류의 입장에서 주류를 비판하는 그녀의 남다른 눈썰미가 읽힌다. 책 속에서 <세계사의 해체>를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세상을 말하는 방법, 그것이 정희진식 책읽기 방식이다.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가 읽는 내용을 결정한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가 있지만, 소재별로 읽기보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선택한다."

 

이 책은 우선 리스트부터 남다르다. 정희진 선생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베스트셀러'는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비주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그녀의 관점이 드러난다.) <문장강화> <화> <태백산맥> 등 밀리언셀러들이 종종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낯선 책들이다. 분야도 광범위하다. 본인의 주 전공인 페미니즘 책부터 <빅이슈>와 같은 잡지, <군주론> <손자병법> <천자문> 같은 고전에 <손무덤> <전화> 같은 시까지, 분야를 막론한다.

 

흔히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통념이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류의 입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 주류 밖에 있는 관점을 공론화시키는 글. 그게 바로 정희진의 힘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종류의 서평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노동하고 존재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내가 그녀의 글을 빠짐없이 읽으려 노력하는 이유다. 그녀는 "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흥분을 주는 책"을 독서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내게는 그녀의 책이 그러한 자극적인 '빨간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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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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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은 생각의 통념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사람이다. 글을 통해 그녀가 던지는 예상치 못한 관점과 뜨거운 문제제기는 늘 놀라움을 선사한다. 신작 <정희진처럼 읽기>가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했을 때 내용도 보지 않고 주저없이 책을 신청했던 이유는 이 책 역시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줄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접한 정희진 선생의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 첫 번째였다. 책을 읽은 후 '와, 이 여자 센데'라고 생각했다. 왜 여성학자(그녀는 이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들을 '드세다'라고 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책 속의 화자는 백인, 남성, 서울 등, 흔히 세상의 기준(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향해 과감하게 짱돌을 던지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여성이지만 표준어를 쓰고, 서울경기권에서 태어났고, 비장애인인, 나름대로 주류에 편입되어 살고 있기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에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페미니즘의 도전>에 나오는 대목 가운데 한 문단이다. 이러한 대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것 같다.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또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이처럼 책 속의 그녀는 백인사회, 서울사회, 남성사회, 한국사회, 비장애인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의 대변자였다.

 

그녀는 늘 글을 통해 자신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며 억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본인은 굉장히 우유부단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라고 항변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자기주장 강한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이유는 '사회 통념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느끼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튀는 못은 정 맞는다, 라고 말하니까. 주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목 끝에 걸려 있는 생선가시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독서 에세이를 출간했다. 모난돌 정희진 선생의 독서 에세이라면 단순히 책소개로 끝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보통 책에 관한 책은, '유명한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재빨리 파악하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읽는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전자의 욕구는 충족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책은 아니다. 독서 에세이지만 사실은 '내가 소개하는 이 책이 세상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꼭지를 읽는다 해서 그 책이 어떤 책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소개하는 책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그냥 그 책을 직접 읽으라는 식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하고 싶은 사람이 이 책을 손에 집어들었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독서 에세이가 아닌 정희진 선생의 사회 에세이라고 봐야 한다. 책에 관한 책이지만, 사회통념과 다른, 비주류의 입장에서 주류를 비판하는 그녀의 남다른 눈썰미가 읽힌다. 책 속에서 <세계사의 해체>를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세상을 말하는 방법, 그것이 정희진식 책읽기 방식이다.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가 읽는 내용을 결정한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가 있지만, 소재별로 읽기보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선택한다."

 

이 책은 우선 리스트부터 남다르다. 정희진 선생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베스트셀러'는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비주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그녀의 관점이 드러난다.) <문장강화> <화> <태백산맥> 등 밀리언셀러들이 종종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낯선 책들이다. 분야도 광범위하다. 본인의 주 전공인 페미니즘 책부터 <빅이슈>와 같은 잡지, <군주론> <손자병법> <천자문> 같은 고전에 <손무덤> <전화> 같은 시까지, 분야를 막론한다.

 

흔히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통념이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류의 입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 주류 밖에 있는 관점을 공론화시키는 글. 그게 바로 정희진의 힘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종류의 서평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노동하고 존재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내가 그녀의 글을 빠짐없이 읽으려 노력하는 이유다. 그녀는 "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흥분을 주는 책"을 독서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내게는 그녀의 책이 그러한 자극적인 '빨간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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