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 세계 인류학의 패러다임 호모사피엔스
앨런 바너드 지음, 김우영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앨런 바너드가 쓴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 세계 인류학의 패러다임>은 인류학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데다가 각 시대별로 대가들의 학설, 쟁점을 소개하고 있어서 대학교 1학년 전공기초 수업 교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도 없이도 산을 오를 수 있고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먼저 오른 사람의 자취를 따라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면 산을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에 관심이 생겨 인류학 책을 이것저것(에밀 뒤르켐, 에드먼드 리치, 마르셀 모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사 모으고 있던 차였는데 읽기 전에 좋은 안내서를 읽었다. 이제 산만 오르면 되는 것인가. !!!


인류학이 당시 유행하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으로 대변될 계몽사상으로 인류학은 시작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이 우세할 때는 진화론으로 원시사회를 설명했고, 마르크스가 나온 뒤에는 마르크스주의로 원시사회를 설명했다.


앨런 바너드의 말에 따르면, 시대가 변하더라도 기존 이론들은 배척되지 않고 새로운 경향에 통합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한다. (p320)


그렇다면 앞으로 인류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AI, VR이 나오고, 페미니즘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는 시대에, 진화론,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마르셀 모스, 소쉬르의 학설이 어떻게 통합될지 앞으로 인류학은 인간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 보아스 이전에는 모든 언어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문법을 알면 세상의 어떤 언어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보아스 학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누이트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언어가 그리스어나 라틴어보다 훨씬 복잡하다. 어떤 언어에는 17개의 문법적 성(gender)이 있어서 여러 가지 말의 조합이 가능하고, 그것을 연구하러 갔던 수많은 인류학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워프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영어처럼 보다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아이디어는 워프와 그의 스승 사피어의 이름을 따서 ‘사피어-워프 가설’로 알려지게 된다...(중략)...원칙적으로 그 가설은 ‘우리의 사고’와 ‘그들의 사고’라는 두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를 갖는 다수의 사고형태가 존재한다고 제시한다. p198-199

* 레비-스트로스는 복잡한 오이디푸스 신화를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는데,..(중략)...III열은 인간이 살해한 괴물에 대한 것이다. 용은 인류가 대지에서 태어나기 위해 살해되어야만 하는 남성 괴물이었으며, 스핑크스는 인간의 생존을 원치 않는 여성 괴물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이 열은 ‘인간의 토착적 기원의 부정’(다시 말하면 인류가 본래 땅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을 상징한다. p241

* 푸코의 담론은 사람들이 어떤 사물에 대해 말하거나 쓰는 방식, 함축된 지식체계, 또는 그 지식을 권력의 구조에서 사용하는 행위 -푸코를 사로잡은 관심-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류학에서 권력에 관한 관심은 점차 커졌으며, 푸코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권력의 담론이라는 아이디어는 여성주의 이론에 적용할 수 있고, 서구에 의한 제3세계와 제4세계의 식민지적, 탈식민지적 지배에 관한 연구에 강한 파급효과를 지녔다. p2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기의 수수께끼 -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호모사피엔스
최창모 지음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창모의 <금기의 수수께끼>를 흥미롭게 읽었다. 최창모는 성서에 나오는 금기에서 여러 문화권, 인간과 환경을 공시적으로 재구성하여 의미를 찾는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주류 기독교의 성경해석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인류학적인 해석을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 창조, 예수의 구속사에 맞추어 해석을 하지 인류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은 카인한테 표식을 줘서 만나는 사람한테서 보호하도록 하는 구절을 (그 앞 대목에서, 동생을 죽였으니 앞으로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카인은 유리하다가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애원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죄지은 자도 사랑하신다고 해석을 한다.


최창모는 이렇게 말한다. 1) 카인의 징표는 문신이다, 2) 살인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카인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고 또 다른 아들인 아벨은 죽었기에 카인을 해칠 사람은 세상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카인한테 준 징표는 죽은 자(동생)의 유령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약속, 즉 살인자가 받게 될 공포를 진정시켜 주는 의미를 갖는다. p286-287


그러면서 최창모는 고대 관습에서 신체 장식은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마술적인 힘을 일으킨다고 했다. 물의 위험을 막으려고 라오스에서는 물고기 비늘 무늬를 즐겨 넣고, 살인자를 변장시켜 혼령이 그를 못 알아보도록 하는 문신이 아프리카 콩고의 바야카족, 남동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통가족...등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문신의 주술적 기능은 이후 씨족의 표시로, 씨족 표시에서 사회적 지위 상징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형벌의 기능으로, 미적 기능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p284-288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으니 재밌다. 교회에서는 카인의 질투와 아벨의 신실한 마음,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주제 사라마구와 미겔 데 우나무노의 소설에서 카인과 아벨의 변주를 읽었을 때도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었을 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계획 때문에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하찮은 인간의 서글픔과 분노를 느껴서 짜릿했고, 미겔 데 우나무노의 <아벨 산체스>를 읽었을 때는 행복의 원인으로서 비교와, 비교의 결과로서 질투를 느껴서 좋았다. 최창모의 <금기의 수수께끼>에서는 문신의 주술적 기능과, 문신이 유령이라는 공포로부터 막아준다는 보호기능을 읽어서 참 좋았다.


기존의 성경읽기는 통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의 해석만이 시간을 관통할 수 밖에 없다. 인류학은 텍스트를 공시적으로 읽으므로 인류학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속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성경은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과연 성경을 공시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읽을지 의문이다. 기독교계가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의 인류학 연구를 보고 스미스를 이단으로 몰았던 것이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기독교계와 충돌할까봐 두려워 <황금가지>의 특정 내용을 삭제하고 논란이 될 해석에 언급을 피한 것이 과거의 일 같지가 않다.


기독교에서는 금기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금기하므로 자신들의 세계를 보호하기를 원하고 성스러움이 훼손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터부는 ‘금지’와 ‘성스러움’이 결합된 이중의 개념이고, 금기와 터부는 두 세계를 분리시킴으로써 두 세계를 한꺼번에 보호해준다. p272

* 역사가가 소멸해버린 사회의 당대 모습을 현재로서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인류학자는 현재의 사회가 지금의 모습으로 되기까지 걸어온 역사의 각 단계를 재구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인간과 환경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며, 문화를 하나의 ‘의미의 총채’로 성서 이야기에서 심층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를 얻기 위한 공시적 읽기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통시적 성서 읽기는 결코 성서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였다. p329

* 결론적으로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베기(문신)를 금한 것은(레위기 19:28; 21:5; 신명기 14:1) 이러한 의식적인 자해가 사람을 사자의 영역으로 인계한다고 생각하는 이방인(가나안인)의 관습과 믿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로서 그 자신을 드러내신 언약의 하나님 ’야훼의 자녀‘(신명기 14:1)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이라는 확신때문이었다. 즉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구별하셨다는 근거 아래 이스라엘이 ’야훼의 거룩한 백성‘(신명기 14:2) 이라고 강조한 점, 삶과 건강에 대한 신성한 개념 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신에 대한 금기는 그 당시 주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문신을 하던 습관이 있던 이스라엘이 문신을 금지하여 다른 나라와의 사회적, 민족적, 종교 적 차이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내적 또는 외적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질서, 그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구조의 특성이다. p303-304

* 결론적으로 왼손잡이 금기는 오른손잡이 중심 사회가 낳은 하나의 사회적인 억압기제였다. 금기는 억제를 통해 사회의 질서와 통합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터부가 사회적 일체감(때로는 복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손잡이 금기가 바로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통제는 통제자에게 우선권을 주게 되고, 그 우선권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를 낳게 되며, 이데올로기는 고착되어 영속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고대사회의 질서로부터 질서를 위한 ‘차이’가 지배를 위한 ‘차별’이 되어, 차이의 본질은 거세되고 차별의 작용만 남게 되었다. 사고 패턴의 차이는 차별화된 사회적 조건과 긴밀히 작용한다. p277

* 터부는 ‘금지’(prohibition)와 ‘성스러움’(sacred)이 결합한 이중의 개념이다. 모든 금지는 ‘위험’한 상황에서 발생하며, 성스러운 곳에서는 언제나 위험이 발생한다...(중략)... 터부는 ‘위험한 곳’에서 발생하는데, 위험한 곳은 항상 ‘애매모호한’ 즉, ‘어중간한’ 중간지대에 속한다. 이곳은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곳이다. 동일성을 교란하는 곳, 여기서 금기가 발생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턱’을 밟는 것이 금기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구조주의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문턱’(stile)은 어중간한 곳, 곧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곳으로서 모순, 대립되는 것들을 매개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영과 육을 오고가는 영매들에게 사로잡힌 곳으로 여겨진다....(중략)...따라사 이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장소는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광야’ 라는 어중간한 곳(그들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다.)이다. 성서의 모세, 엘리야, 세례 요한, 예수, 바울로 등은 모두 ‘광야’에서 신을 만난 자들이다. 제사장이나 왕처럼 특정한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 특히 많은 개인적 금기가 뒤따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성한 힘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p32-35

* 성서는 아버지의 우월성과 힘을 빼앗으려는 아들의 욕망의 주체적, 상징적 행위로 나타난다...(중략)...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첩들과 벌인 근친성교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의 행위로 공개적으로 벌어진다...(중략)...압살롬의 의도는 아버지의 후궁들과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할 뿐 아니라, 부왕의 세도를 꺾고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선언하면서 부왕의 정치적 힘과 권위가 자신에게로 완전히 옮겨왔음을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6:21) 고대부터 남근이 힘과 권력을 상징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중략)...압살롬의 최후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쟁 중 노새를 타고 달리다가 남성성의 또 다른 상징인 긴 머리카락이 큰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죽었다. 또는 그는 아들이 없었는데, 이는 분명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p172-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돌의 마지막 날들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520페이지의 소설을 6시간 동안 읽었다. 제임스 그레이디가 쓴 스파이 스릴러 소설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읽는데 극장에서 2시간짜리 스파이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다.


CIA 요원 콘돌은 집에서 괴이한 상태로 죽은 요원을 발견하고 도망친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좇아와 죽이려고 한다. 도망갈 때마다 어떻게 귀신같이 찾아 올 수 있었는가 하면, 콘돌과 친구들이 사용한 통화기록, 인터넷 사용정보를 CIA가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시와 통제. 프리즘 사건이 그렇지 않았던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PRISM 이라는 비밀정보수집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반인들의 통화기록이나 인터넷 사용정보같은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고 CIA 요원 스노든이 폭로했을 때 미국 정부와 보수주의자들은 테러를 막을 목적이니 감시가 필요하다고 했다.


'최소한'으로 수집한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한다면서 스노든이 어떻게 폭로를 할 수 있었는지, 최소한의 정보가 아닌 엄청난 양을 수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테러용의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정보를 왜 수집하는지 모르겠다. 콘돌도 스노든처럼 도망다니다가 CIA가 감시하는 정보를 역으로 이용했다.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했다면 콘돌은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스파이 소설의 긴장감은 이유도 모르고 좇고 좇기고, 추악한 진실이 서서히 밝혀질 때 생긴다. 사이사이 등장하는 로맨스는 긴장감에 불을 붙인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콘돌은 오랫동안 스파이 업무에 종사해서 (<콘돌의 6일>당시 배경은 1970년대 중반이고 <콘돌의 마지막 날들> 당시 배경은 2013년 보스턴 폭탄 테러 이전이다.) 망상에 시달리고 망상은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백미는 감시 통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CIA 국장이 역설하는 여섯 페이지였다.


국장은 높은 가치를 위해서는 불법을 저질러야 하며, 통제를 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통제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떠올랐다. 국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빅 어스(Big Us)' 여서 그것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기도 했고 어스(Us)라는 이름이 미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1984>가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뉴스까지 생각이 나 온 몸이 찌릿했다.

"빅 브라더는 세상에 없어. 빅 어스(Big Us)만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 우리에는 당신(u)하고 s가 있는데, s는 시스템(system)을 뜻할 수도 있고, 반드시 존재를 알면서 살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똥 덩어리(shit)를 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가 선택한 기회를 가질 경우, 숫자로 세어지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숫자를 세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도록 하라고. 이보게. 내 친구, 내 전우, 내 동료, 그냥 u가 되는 건 엿 같은 일이야. 하지만 s에 연결되는 u가 되는 건, 그렇게 us가 되는 건......그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이야...(중략)...중요한 건 us의 정신과 혼을 대표하는 사람이 누구냐, 통제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거야. 전체적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게 잘못될 수 있는지를 아는 누군가가 그 일을 맡아야 하는 거야...(중략)...V는 그 수준을 넘어서서 진행된 프로그램이야. 우리는 전쟁 전체를 이런 식으로 싸워나가게 될 거야. 인생 전체를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될 거야. 우리는 모두 한데 접속돼 있어. 꽤 이른 시간 내에 우리(the we)보다 접속(the wire)이 더 중요해질 거야. 자네가 그건 그리 영리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자네 생각은 중요치 않아. p453-455

"지식은 그 소유자의 수준에 알맞은 수준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페이가 말했다. "다음에는 압도적인 분량의 데이터가 몰려올 거요." 콘돌이 말했다. "사전에 철저하게 계산을 마친 상태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산탄총을 난사하는 거지. 모든 ‘사실들‘로, 그 많은 데이터로 사람들이 훤히 볼 수 있는 곳에 엄청난 비밀을 숨기는 수법을 쓸 거요." p317

* 콘돌은 무척이나 많은 누군가가 그가 죽거나 침묵하기를 원했던 곳, 또는 그가 그들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노예가 되기를 원했던 곳인 대리석 꿈들의 도시에서 묘비들이 이룬 정원 가운데에 그를 따라다니는 유령들과 함께 서 있었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그는 저 멀리로 훨훨 날아갈 수가 없었다.
네가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참된 존재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것 뿐이야.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레누와 릴라라는 두 친구를 축으로 진행된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 나폴리 4부작 중 2부>는 청소년기에서 20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들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한다.


두 소녀가 성장하며 인식이 넓어지고, 사랑과 인생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눈을 뜨는 것을 보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같은 느낌이 났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내 독서취향과 맞지 않아 잘 읽지 않는데 <나폴리 4부작>도 처음에는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페이지를 넘겼다가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 들어, 새벽 1시에 혼자, 헉! 레누한테 왜 저런 일이....해 뜰때까지 읽었다.


<나폴리 4부작>은 <제인 에어>,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보다 더 격정적이다. 레누와 릴라. 두 친구를 축으로 질투, 애증, 허세, 그리움, 사랑같은, 인물들의 심리적 거리에서 태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두드러졌다. 여성의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예컨대, 난 네 남편을 사랑해. 네 남편의 아이를 가졌어. 이 더러운 집안 꼴 좀 봐. 네 남편이 너무 불쌍해. 나는 네 남편을 행복하게 해줄거야. 넌 여기를 떠나야 돼. 안 그러면 네 애를 죽여 버릴거야... 자기 남편과 내연관계이며 아이를 가졌다고 집에 와서 난리치는 여자를 보고 릴라가 차분히 듣고 있다가 “너 지금 네 어머니처럼 행동하고 있어.” 감정없이 말하는 대목이 좋았다. 머리끄댕이를 쥐어 뜯어도 부족할 판에, 차분히 듣고 감정을 뺀 응수라니, 그 여자의 어머니가 유부남한테 버림받고 동네가 떠나갈 듯 행패를 부렸던 과거와, 그 때의 충격으로 어머니가 정신병에 걸린 현재를 떠올리며 릴라가 쓸쓸함과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사회와 가난이 여성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리는 릴라의 목소리가 적적했다.


소설의 배경이 2차 대전 이후 가난한 나폴리라는 것도 이 소설을 격정적으로 만든다. 가난한 동네주민들은 서로 악다구니를 하고, 무식하고 잘 사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람과 무식하기에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공존한다. 검은 손은 가난한 주민들을 쥐어 짜며 주민들은 욕을 하면서도 순응하며 살아간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관습과 자유가 부딪친다.


격동의 시간 속에서 레누와 릴라는 그리워하고 질투한다. 응원하고 경쟁한다. 둘은 한 몸 같았다. 한 몸이 되어야만 격동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전 아름다움이란 속임수라고 생각해요...(중략)... 네. 어느 청명한 날의 바다처럼요. 아니면 석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밤하늘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아름다움이란 공포 위에 뿌린 가루와도 같아서 아름다움을 걷어내면 우리는 홀로 각자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는 거죠. p452

*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 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릴라의 공책을 보고서야 첫날밤 경험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분노 때문에 또는 음흉한 계획이나 비열함 때문에 남편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할까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변형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이 물집 같은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체액으로 꽉 차서 물집이 터지면 살이 흐물흐물해져 흘러내릴 것을 두려워했다. 가구와 아파트와 스테파노의 아내인 릴라 자신까지도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부서져서 살아 숨 쉬는 더러운 그 물질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했다. p496-497

* 만약 릴라가 나 대신에 노르말레 대학에 입학했다면 릴라도 나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을까. 로마 출신 여학생의 뺨을 때렸을 때, 나는 릴라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릴라가 어떻게 내 가식적인 온화함을 걷어내고 내게 필요한 결단력을 주었으며 욕설까지 퍼붓게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까지 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프랑코의 방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릴라의 과감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내 말라붙은 감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의 불만도 릴라가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중략)...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p470-471

* 릴라는 불현듯 어린 시절 우리에게 희망이자 위안이었던 부자가 되겠다는 꿈이 머리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았다...(중략)... 돈과 소유욕의 관계는 그녀를 실망시켰다. 자신을 위해서도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릴라에게 부유해지는 것이란 니노를 가지는 것이었다. 니노가 떠나버린 지금 릴라는 가난해졌다.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빈곤함이었다. p513

*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p6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친구 사이인 소녀 릴라와 엘레나 둘의 이야기이다. 유년시절부터 사춘기를 지난 때까지 둘이 성장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둘은 어찌나 친한지 고민거리가 있으면 같이 나누기도 하고 떨어져 있으면 편지를 보내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대한테 경쟁심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를 질투하기도 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나폴리4부작 중 제1권으로 엘레나 페란테의 자전 소설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한길사에서 출간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도 자전 소설이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류의 소설을 낸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해 하다가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시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것, 작가의 사적인 경험에 독자의 사적인 경험이 공명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SNS에 자신의 일상을 사진으로, 단상으로 기록하고, SNS가 일기장인 것 마냥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요즘의 모습이므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자전 소설이 현 세태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테고, 작가와 비슷한 시기를 살고 있는 독자는 작가가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친구와 가족과 연인과 갈등하며 사랑하는 이야기를 독자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경제적인 문제로 릴라의 부모가 릴라의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릴라를 약혼시킨 대목에서, 사랑이 밥먹여 주냐. 있는 집안과 결혼해라. 우리 집이 너무 힘들다 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했다가 곧 이혼을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놈의 돈이 뭔지. 하며 소주잔을 비우던 친구 옆에서 나는 친구가 한 잔 마실 때 속상해서 두 잔 마시고야 말았다.

 

엘레나가 좋아하는 남자의 아버지이자 시인인 도나토 아저씨가 엘레나한테 치근거리며 강제로 입을 맞추고, 엘레나가 도나토 아저씨한테 혐오를 느끼고 자신한테는 경멸을 느끼는 대목에선,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문단 내 성폭력, 글을 가르쳐 준다며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문인들이 생각났다. 새벽 3시에 xxx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한다면서 피해자가 내게 페메를 보냈을 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고민하고 있었구나, 오죽했으면 나한테도 보냈을까 싶어서 가엾었다.

 

자기를 얼마만큼 드러내느냐에 따라 소설에 '자전'소설, '사'소설 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모든 소설에는 작가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소설은 그 자체로 자전소설이다. 작가의 경험이 독자의 경험과 공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작가가 얼마나 진실되게 이야기 하느냐,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작가가 보여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괜찮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우리 존재를 확고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소중한 사람들의 ‘경계의 해체‘를 막아줄 시멘트 같은 돈의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구체성과 일상적인 행동, 그리고 협상이었다.
사춘기 시절 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세상에 둘도 없는 신발 같은 어린 시절의 공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귀족처럼 돈을 쓰고 싶어 하는 리노의 광폭한 욕구의 형태로 나타났다. 또 부는 환심을 얻으려고 텔레비전, 파스타, 반지를 사는 마르첼로에 의해서도 나타났고, 온갖 종류의 햄을 팔고 빨간색 오픈카를 가지고 있으며 4만 5천 리라쯤이야 푼돈이라는 듯이 돈을 쓰고 릴라의 그림을 액자에 넣고 치즈 같은 식료품 말고도 신발을 팔기 위해 자재비와 인건비에 투자하고 자신이야말로 동네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도래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스테파노에 의해서도 체현되었다. 부라는 것은 생활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도 화려함도 없었다. p330

* 릴라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네겐 치근덕거릴 수도 있어. 그런 수작을 부리면 알려줘."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릴라를 바라보았다. 겨우 열세 살인 우리들은 제도나 법률이나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은 것을 따라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원래 정의는 폭력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알프레도 아저씨가 돈 아킬레를 죽인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와 릴라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릴라가 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복해졌다. p152

* 집에서 도망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p3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