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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의 수수께끼 -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ㅣ 호모사피엔스
최창모 지음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최창모의 <금기의 수수께끼>를 흥미롭게 읽었다. 최창모는 성서에 나오는 금기에서 여러 문화권, 인간과 환경을 공시적으로 재구성하여 의미를 찾는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주류 기독교의 성경해석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인류학적인 해석을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 창조, 예수의 구속사에 맞추어 해석을 하지 인류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은 카인한테 표식을 줘서 만나는 사람한테서 보호하도록 하는 구절을 (그 앞 대목에서, 동생을 죽였으니 앞으로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카인은 유리하다가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애원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죄지은 자도 사랑하신다고 해석을 한다.
최창모는 이렇게 말한다. 1) 카인의 징표는 문신이다, 2) 살인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카인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고 또 다른 아들인 아벨은 죽었기에 카인을 해칠 사람은 세상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카인한테 준 징표는 죽은 자(동생)의 유령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약속, 즉 살인자가 받게 될 공포를 진정시켜 주는 의미를 갖는다. p286-287
그러면서 최창모는 고대 관습에서 신체 장식은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마술적인 힘을 일으킨다고 했다. 물의 위험을 막으려고 라오스에서는 물고기 비늘 무늬를 즐겨 넣고, 살인자를 변장시켜 혼령이 그를 못 알아보도록 하는 문신이 아프리카 콩고의 바야카족, 남동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통가족...등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문신의 주술적 기능은 이후 씨족의 표시로, 씨족 표시에서 사회적 지위 상징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형벌의 기능으로, 미적 기능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p284-288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으니 재밌다. 교회에서는 카인의 질투와 아벨의 신실한 마음,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주제 사라마구와 미겔 데 우나무노의 소설에서 카인과 아벨의 변주를 읽었을 때도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었을 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계획 때문에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하찮은 인간의 서글픔과 분노를 느껴서 짜릿했고, 미겔 데 우나무노의 <아벨 산체스>를 읽었을 때는 행복의 원인으로서 비교와, 비교의 결과로서 질투를 느껴서 좋았다. 최창모의 <금기의 수수께끼>에서는 문신의 주술적 기능과, 문신이 유령이라는 공포로부터 막아준다는 보호기능을 읽어서 참 좋았다.
기존의 성경읽기는 통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의 해석만이 시간을 관통할 수 밖에 없다. 인류학은 텍스트를 공시적으로 읽으므로 인류학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속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성경은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과연 성경을 공시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읽을지 의문이다. 기독교계가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의 인류학 연구를 보고 스미스를 이단으로 몰았던 것이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기독교계와 충돌할까봐 두려워 <황금가지>의 특정 내용을 삭제하고 논란이 될 해석에 언급을 피한 것이 과거의 일 같지가 않다.
기독교에서는 금기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금기하므로 자신들의 세계를 보호하기를 원하고 성스러움이 훼손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터부는 ‘금지’와 ‘성스러움’이 결합된 이중의 개념이고, 금기와 터부는 두 세계를 분리시킴으로써 두 세계를 한꺼번에 보호해준다. p272
* 역사가가 소멸해버린 사회의 당대 모습을 현재로서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인류학자는 현재의 사회가 지금의 모습으로 되기까지 걸어온 역사의 각 단계를 재구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인간과 환경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며, 문화를 하나의 ‘의미의 총채’로 성서 이야기에서 심층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를 얻기 위한 공시적 읽기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통시적 성서 읽기는 결코 성서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였다. p329
* 결론적으로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베기(문신)를 금한 것은(레위기 19:28; 21:5; 신명기 14:1) 이러한 의식적인 자해가 사람을 사자의 영역으로 인계한다고 생각하는 이방인(가나안인)의 관습과 믿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로서 그 자신을 드러내신 언약의 하나님 ’야훼의 자녀‘(신명기 14:1)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이라는 확신때문이었다. 즉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구별하셨다는 근거 아래 이스라엘이 ’야훼의 거룩한 백성‘(신명기 14:2) 이라고 강조한 점, 삶과 건강에 대한 신성한 개념 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신에 대한 금기는 그 당시 주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문신을 하던 습관이 있던 이스라엘이 문신을 금지하여 다른 나라와의 사회적, 민족적, 종교 적 차이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내적 또는 외적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질서, 그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구조의 특성이다. p303-304
* 결론적으로 왼손잡이 금기는 오른손잡이 중심 사회가 낳은 하나의 사회적인 억압기제였다. 금기는 억제를 통해 사회의 질서와 통합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터부가 사회적 일체감(때로는 복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손잡이 금기가 바로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통제는 통제자에게 우선권을 주게 되고, 그 우선권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를 낳게 되며, 이데올로기는 고착되어 영속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고대사회의 질서로부터 질서를 위한 ‘차이’가 지배를 위한 ‘차별’이 되어, 차이의 본질은 거세되고 차별의 작용만 남게 되었다. 사고 패턴의 차이는 차별화된 사회적 조건과 긴밀히 작용한다. p277
* 터부는 ‘금지’(prohibition)와 ‘성스러움’(sacred)이 결합한 이중의 개념이다. 모든 금지는 ‘위험’한 상황에서 발생하며, 성스러운 곳에서는 언제나 위험이 발생한다...(중략)... 터부는 ‘위험한 곳’에서 발생하는데, 위험한 곳은 항상 ‘애매모호한’ 즉, ‘어중간한’ 중간지대에 속한다. 이곳은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곳이다. 동일성을 교란하는 곳, 여기서 금기가 발생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턱’을 밟는 것이 금기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구조주의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문턱’(stile)은 어중간한 곳, 곧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곳으로서 모순, 대립되는 것들을 매개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영과 육을 오고가는 영매들에게 사로잡힌 곳으로 여겨진다....(중략)...따라사 이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장소는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광야’ 라는 어중간한 곳(그들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다.)이다. 성서의 모세, 엘리야, 세례 요한, 예수, 바울로 등은 모두 ‘광야’에서 신을 만난 자들이다. 제사장이나 왕처럼 특정한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 특히 많은 개인적 금기가 뒤따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성한 힘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p32-35
* 성서는 아버지의 우월성과 힘을 빼앗으려는 아들의 욕망의 주체적, 상징적 행위로 나타난다...(중략)...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첩들과 벌인 근친성교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의 행위로 공개적으로 벌어진다...(중략)...압살롬의 의도는 아버지의 후궁들과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할 뿐 아니라, 부왕의 세도를 꺾고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선언하면서 부왕의 정치적 힘과 권위가 자신에게로 완전히 옮겨왔음을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6:21) 고대부터 남근이 힘과 권력을 상징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중략)...압살롬의 최후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쟁 중 노새를 타고 달리다가 남성성의 또 다른 상징인 긴 머리카락이 큰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죽었다. 또는 그는 아들이 없었는데, 이는 분명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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