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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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낯선 것을 만나는 것에 있지만 알고 보면 낯선 것은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김혜순 시인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실크로드-운남성-미얀마-고비사막-몽골 등을 다닌 여행기이다. 시인이 그곳에서 안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이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여자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곳의 현재에서 한국의 과거를 발견하는데 그곳의 현재는 사실은 한국의 현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똥 덩어리 부처>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사원에 몸을 의탁해도 승려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잡무만 본다. 남자가 1층에 있을 때, 여자는 2층에 올라갈 수 없다. 여자가 남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 남자를 모욕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남자들은 말한다. 국립대학에는 여학생 수가 더 많고, 사미니들의 불경 지식이 더 풍부하고, 해박하다고...(중략)...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 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퇴폐, 슬픔, 분노, 타락을 어떤 예술 작품 형태로도 표출하지 말라는 권력자의 주문이 여성 억압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먼저 여성을 억압하고, 다음 소위 여성적이라고 규정된 것들을 억압한다. p244”


과거 한국에 있었던, 권력자의 주문과 여성 억압은 현재 한국에도 있다. 개신교 어떤 교단에서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남자 목사가 여자 성도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면 교회에 소문이 난다. 여자 성도가 유혹했다는 내용이다. 여자 성도의 품행, 외모, 옷차림, 연애사, 가정형편, 학벌, 소비행태 모든 것이 소문의 근거가 된다. 여성이 여성적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교회는 여자 성도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쫓아낸다. 여성은 가해자 남성과 싸워야 하고 자신이 섬겼던 교회와 싸워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싸워야 한다. 여성다움을 비롯하여 자신을 가두는 수 많은 ‘~다움과 싸워야 한다.


한국에서 다문화는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인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려고 하면 비난받는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TV에서 인기 있는 외국인은 한국말을 잘하고(심지어 사투리도) 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그래서 두 유 노우 김치 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TV에는 유럽과 북미 출신 백인이 더 많이 나온다. 한국사회가 서구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서구를 동경하는 우리는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은 우리도 짐승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우리도 여성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여성과 노약자만 공격한 흉악범이 동물도 학대했다는 연구가 있었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인권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기에 시인이 여자, 짐승, 아시아를 한 데 모은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시인의 글에서 명사가 자주 나왔다. ‘여행하기’,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하기’, ‘여자하기’, ‘짐승하기’, ‘식물하기’, ‘풍경하기’, ‘색깔하기등 이었다. 여행하다, 시 쓰다, 식물을 심다. 같은 동사가 아니다. 왜 동사가 아니라 명사로 썼을까. 시인이 여행을 하고 깨달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여행 속에서 낯선 것을 경험할 때 물음표가 떠오르고 물음표는 여행자를 따라 다닌다. 그러다 느낌표가 될 때 여행자의 발걸음은 멈춘다. 여행자의 오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바뀐다. 동사로 운동하는 감각은 명사에 갇힌다. 명사는 구호가 되고 신념이 된다. 시인은 자신의 글쓰기가 탈식민하기였으면, 미래로 회귀하기였으면 좋겠다.p22” 고 했다. 시인에게 여행기는 동사가 명사가 된 자취이다. 깨달음과 소망의 기록이다.


참 좋은 여행기를 읽었다. 여행을 간다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한테라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동남아든 국내든 유럽이든 상관없다. 내 안의 아시아, 여자, 짐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아시아, 여자, 짐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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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 제임스 테이트 산문시집
제임스 테이트 지음, 최정례 옮김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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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꽁트 같은 짧은 글이 모여 있다. 이 글이 시라면 시에 등장하는 말했다라는 단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물이 말한다고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많지만.(소리쳤다. 주장했다. 떠들었다. 입을 뗐다. 등등) 시는 말했다라는 단어를 반복한다. ‘말했다의 반복은 시에 리듬을 부여한다.

 

시는 일상에서 환상같은 순간을 포착한다. 이를테면 <샤일로>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결혼 예정인 선생님에 대해 질문을 한다. 선생님 결혼의 추이는 남북전쟁의 추이와 맞물리듯 전개된다. 그러다 시는 로리가 선생님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전쟁터 옆에서 야영천막을 친 그녀를 그려보았다. 초조하게 그녀의 남자를 기다리는 그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 남자를. P98” 수업을 하고 있는, 결혼을 앞둔 선생님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으로 바뀐다. 제임스 테이트는 관계를 전복시켜 환상성을 표현한다. 일상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사물을 낯선 관계 속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제사에 쓰인 너새니얼 호손의 American Notebooks 속 문구처럼 말이다. “나무들이 강물에 비친다. - 그들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그렇다. P15.

 

제임스 테이트의 현실적인 시가 초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역자 서문을 읽은 것은 시집을 다 읽고 난 뒤였는데, “제임스 테이트는 벤저민 페레, 막스 제이콥, 로베르 데스노스, 앙드레 브르통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의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p6.”는 대목을 읽고 아하.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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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지만지 희곡선집
장 아누이 지음, 안보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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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안티고네와 병사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안티고네가 오빠의 시체에 애도하다가 병사한테 발각되었을 때 병사들은 어느 술집에 갈까. 하는 대화를 한참 한다. 크레온의 명령으로 안티고네가 사형을 언도받았을 때도 병사는 경비병과 육군병사가 경쟁관계라는 얘기를 한참 한다. 병사의 말은 안티고네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장면이 부조리하게 보였다. 안티고네는 삶의 의미를 묻지만 병사들의 말은 안티고네에게는 무의미하다. 안티고네의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병사들의 상황은 희극적이다. 안티고네가 목숨을 바쳐서까지 찾는 의미는 병사들한테는 큰 의미가 없다. 안티고네와 병사의 대화는 엇나가고 그때마다 안티고네는 세계 속에서 소외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부조리한 장면이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생존을 고민할 때 누군가는 무관심한 게 현실이지 않나. 누군가의 깊은 불안은 누군가에게는 횡설수설하는 웃기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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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알레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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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의 희곡에서 인물들 사이에는 상반된 정서가 흐른다. <어느 여름날>에서는 즐거움과 불안이 흐르고 <가을날의 꿈>에서는 사랑과 죽음, <겨울>에선 떠남과 머무름(또는 가능과 불가능)’이 흐른다. 감정이 한 인물한테 고정되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니 삶은 유한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원한 즐거움도 없고 영원한 불안도 없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삶이 아이러니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희곡에서 상반된 감정들은 붙어 있는 듯, 한 뿌리에서 나온 듯 너무 가까이 있었다.

 

희곡에서 욘 포세는 인물에 특정한 이름과 직업을 부여하지 않았다. 인물들은 단지 남자여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남자와 여자의 성별특징이 부각된 것도 아니었다. 희곡의 대사에는 말과 말 사이에 (사이), (짧은 사이) 처럼 쉼이 많았다. 이렇게 인물의 외형과 말을 꽉 채우지 않을 때, 즉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때 여백이 생긴다. 여백은 대상의 구체적인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내면에 담고 있는 내용을 나타낸다. 희곡에서 인물들 간 감정이 크게 차지하고 있는데다 감정은 내면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이 희곡의 중요한 장치는 여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리면 참 재밌을 것 같다. 여백을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궁금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사실은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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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연극 지만지 고전선집 447
야스미나 레자 지음, 이용복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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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연극을 하는 친구 B군은 사람 구경하는 게 연기연습이라고 했다. 걸어가는 노인을 관찰하고 사랑에 빠진 커플의 몸짓을 관찰한다는 것이었다.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 <스페인 연극>을 읽고 연기는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스페인 연극>은 배우들이 <스페인 연극>이라는 연극을 하면서 연기론에 대해 했던 인터뷰와, <스페인 연극>이라는 희곡과, <스페인 연극>이라는 연극 속에서 배우가 <불가리아 연극>이라는 연극을 하는, 극중극중극의 구조로 되어 있다.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은 B군이 했듯이 모방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내 안의 누군가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기자가 비슷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은 연기자가 그 역할을 제일 잘 표현하기 때문에 연기자에게 맡겨진 것이기도 하지만 캐릭터 안에 숨은 정서(이를테면 연민 같은 것)를 연기자가 원해서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소설가가 작품활동을 하며 많은 소설을 쓰더라도 결국은 소설가가 정말 말하고 싶은, 소설가 내면 속의 몇 가지 주제일 뿐이고 그것들이 자기복제 되는 것이듯 말이다.

 

<스페인 연극>에서 연출은 배우에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라.”p49 고 말하고, 배우가 어떻게 연기해야 하고 이제 뭘 해야 하냐고 묻는 것을 싫어”p81 한다. 연기는 연출가가 작품에서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연기자의 연기는 연출가한테 채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스페인 연극>에서 연출은 배우한테 연기를 지시하지 않는다. 배우는 혼란에 빠진다. 연기자의,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고민은 삶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삶이 세계라는 무대에서 내가 하는 연기라면 나는 배우이다. 그렇기에 연기자의 고민이 삶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하다. 연기가 타인을 모방하고 나를 발견하는 일이듯 삶 또한 타인을 모방하고 나를 발견하는 일이니 말이다. <스페인 연극>에서 인물 간 힘의 충돌과 화해는 일상에서 사소한 것으로 표출된다. 이 또한 배우가 무대에서 하는 연기와 내가 일상에서 하는 삶이 같은 것이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스페인 연극>에서 화해는 갈등을 겪던 이들이 함께 평범한 것을 계속 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야스미나 레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문장에서 방점은 함께계속에 찍혀야 한다.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야스미나 레자는 함께계속이라고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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