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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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의 중요한 키워드는 두 가지로, 이중성과 환상이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중성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인데 환상을 경험한 뒤 괴로움과 화해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지식인이 있다. 라고 할 때 이걸 예민한 한 개인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문제는 시대의 문제라는 걸 생각한다면 당대 시대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념의 충돌인 전쟁, 빠르게 변하는 시대와 변화에 저항하는 시대의 충돌, 혼란 같은 것이다. 하리 할러는 그 충돌에서 고립되어 있다가 자살을 결심한다. 이때 등장하는 게 환상인데 환상은 그가 느낄 수 없었던 사건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그가 억누르고 있던 분열된 자아들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고, 두 세계의 충돌이 반드시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황야의 이리>를 읽고 윌리엄 S. 버로우즈의 <네이키드 런치>가 떠올랐다. <네이키드 런치>는 마약의 환각 상태가 내면의 노래를 듣게 해준다고 했고 <황야의 이리>도 하리 할러가 내면의 여러 자아를 만나고 깨달음을 얻은 건 코카인 때문이었다. <황야의 이리>가 나왔을 당시 반시민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네이키드 런치>도 당대에 문학이냐 아니냐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네이키드 런치>는 마약중독자의 경험담일 뿐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황야의 이리>에도 같은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황야의 이리>는 <네이키드 런치>보다는 덜 노골적이다.


어찌되었든 <황야의 이리>에 들어 있는, 괴로움과 소망, 이중성과 환상은 개인과 시대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개인과 시대의 정신상태-충돌과 소외가 당대만 그랬을까 질문하면 지금도 그럴 것이라는 대답을 하게 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황야의 이리> 마지막에서 깨달음을 얻은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을 한다. “아,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중략)...다시 한 번 게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고통을 다시 한번 맛보고, 그 무의미함에 다시 한번 전율하며, 내면의 지옥을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고 자주 통과하는 여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언젠가 나는 체스 게임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p324 여기서 체스판이 의미심장하다. 나는 ‘나’의 형상을 한 무수한 체스말을 가지고 나의 인생이라는 체스판을 둔다. ‘나’라는 체스말은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지만 어느 하나 하찮지 않고 모두 소중하다. 나아가 체스판이 이 시대라고 하면 체스말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은 모두 의미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다중 속에서 개성이 함몰된다고 여겨 괴로워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환상을 통해 깨달았다. 결국 <황야의 이리>는 이렇게 묻는다. 다중 속에서 개성이 함몰되는 게 아니라 개성은 다중이 있어야 존재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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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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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망자들>의 구성이 흥미롭다. 일단 소설은 1930년대 스위스 영화감독 에밀 네겔리와, 그와 영화 합작을 하려는 일본인 관료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에밀 네겔리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영화 합작을 하려는 일본인 관료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로 귀결되는가. 라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들이 두 세 페이지의 작은 챕터로 영화 스토리보드처럼 이어져 있다. 글로 만들어진 스토리보드라고 할까. 게다가 소설은 일본 전통 연극 ‘노’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큰 챕터는 1부 조, 2부 하, 3부 규 이다. 조-하-규는 노의 본질로, “1막 ‘조’에서는 사건의 템포가 느리게 출발하여 기대를 고조시키고 2막 ‘하’에서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마지막 ‘규’에서는, 단박에,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절정으로 치닫는다.” p101 그 말처럼 1부 조가 분량이 제일 길고,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느리게 진행되고, 2부 하에서 갈등이 생기며 속도가 빨라지다가 3부 규에서 절정에 이르고 소설이 끝난다. 3부가 분량이 제일 짧다.


그러면 <망자들>이 왜 영화와 노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나 질문할 수 있는데, 소설은 노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채플린은 사전에 노에서 가장 빼어난 이야기는 행위의 부재, 대표적 인물의 부재, 더 나아가 혼령의 존재를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배웠다.” p100 인물의 부재는 <망자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죽음과 엮인다. <망자들>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 소설 첫 장면은 한 일본 장교의 할복자살이고, 마지막 장면은, 에밀 네겔리와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연인이었던 이다의 죽음이다. 그런데 장교의 할복자살은 사실은 카메라가 촬영한 연기이고, 이다의 죽음은 그가 폭행당하는 게 카메라로 찍힌 뒤에 (카메라를 상징하는) 헐리우드 간판 H 위에 올라가서 자살하는 것이다. 사진기자는 죽은 이다를 찍는다. 소설은 인물의 부재라는 죽음을 카메라와 연결시킨다.


1. 그 카메라는 폭력적인 카메라이다.

카메라는 물리적 폭력, 죽어가는 모습, 시체를 찍고, 사랑에 대한 폭력(불륜)도 찍는다. 칼 없는 전투를 수행하는 전쟁선전용이며, 영화배우는 연기하는 모습이 아니라 총을 들고 폭력을 행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어릴 때 폭력을 경험했다.

2. 그 카메라는 피사체를 존재하게 만든다.

카메라가 보는 것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자 관객이 보는 것이다. 풍경이 프레임으로 잡힐 때 프레임 안의 것만 볼 수 있고 밖은 볼 수 없다. 프레임 안의 것은 존재하고 밖에 있는 것은 부재한다. 그러나 관객은 프레임 밖에 있는 것을 추론하고 이야기하고, 부재하는 것은 다시 존재한다. 한마디로 영화는 존재와 부재의 예술인 것이다. ‘존재-부재-존재’는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네겔리는 이다와 마사히코를 찍은 영화(존재)를 상영했다. 이런 소문이 일어난다. 스크린에 등장한 이다가 마사히코와 결혼해서 헐리우드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네겔리는 언젠가 헐리우드에서 이다를 만나면 영화를 같이 찍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다와 마사히코는 이미 죽었다(부재). 실제로는 부재하지만 스크린에서 본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고 여긴다(존재).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존재와 부재를 말한다. 카메라의 눈이 폭력, 그리움, 우월한 시선, 호기심을 표출하기도 하는데 무엇을 표출하더라도 부각되는 것은 존재와 부재이다. 존재와 부재는 노의 특징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 수많은 죽음이 등장하는 것, 영화감독과 배우의 이야기(영화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 소설이 영화와 노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연결이 된다. 정말 좋은 소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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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미첼 - 삶을 노래하다 현대 예술의 거장
데이비드 야프 지음, 이경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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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마녀사냥이다. 사회의 지배이념과 인간의 이기심은 광기를 만들고, 광기는 인간과 사회를 파괴한다. 마녀사냥은 광기가 운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련>을 무대에 올리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생긴다. (아서 밀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녀 티투바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인데 티투바가 흑인 하녀이기 때문이다. 흑인 배우를 쓰면 될 것같지만 한국에서 연기를 할 수 있는 흑인 배우를 구하기는 어려우니 연출가는 얼굴이 누런 한국인 배우를 검게 분장을 시킨다. 그러면 레이시즘이라는 비난이 생긴다.


티투바는 카리브해 바비도스 출신 하녀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데 노예와 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다. 흑인 하녀라는, 티투바의 정체성은 작품과 긴밀히 묶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출가는 티투바를 흑인으로 표현할 필요를 느낄테고, 분장을 시켜야겠다 생각할 것이다. 2015년 국립극단이 박정희 연출로 <시련>을 무대에 올렸을 때 티투바 역을 한 한국인 배우의 얼굴은 완전히 검은색이 아니고 적갈색이었다. 2019년에 강민재 연출로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시련>을 올렸을 때 티투바 역을 한 한국인 배우의 얼굴은 분장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옅어졌다. 분장을 옅게 한 것에서 연출가가 고민했을 것이라 짐작이 되는데 그래도 항의는 따라붙었다. 분장을 옅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흑인을 표현하기 위해서 분장을 했다는 그 자체가 레이시즘이라는 것이다.


연출가가 레이시즘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어 논란이 될 때 연출가는 고민할 것같다. 내가 연출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네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1) 배우를 검게 분장시킨다. 일부러 논란을 만들며 같이 생각하자고 한다. 2)실제 흑인을 배우로 쓴다. 3)연극의 설정을 바꾼다. 티투바를 바비도스 출신 흑인 하녀가 아니라 베이징 출신 중국인 하녀 또는 한양 출신 조선인 하녀로 바꾼다. 4)작품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한다. 하녀 티투바를 조선족 가정부로 설정한다. 나는 4번을 선택할 것같다. 재해석하는 게 매력이 있고, 조선족에 대한 낙인이 있는 요즘을 생각한다면 <시련>을 지금의 문제로 더 가깝게 볼 수 있을 것같다.


연극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때 아서 밀러의 <시련>은 내 옆에 있는 마녀사냥, 나도 저지르는 마녀사냥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현 시대의 레이시즘을 비추는 거울도 되고 있다. 흥미롭다. <시련>을 왜 생각했냐면, 데이비드 야프의 평전 <조니 미첼>에서 <Don Juan‘s Reckless Daughter> 앨범 뒷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앨범 재킷에는 춤을 추는 세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명,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은 흑인 남성이다. 그런데 그 흑인 남성은 조니 미첼이 분장한 것이다. 이것을 몰랐던 사람이 많았는데 흑인 잡지는 호의적인 리뷰를 썼다고 하고, 흑인들은 이 앨범을 흑인이 만든 앨범으로 알고 구입했다고 한다. 조니 미첼은 자기 안에 흑인인 자아가 있고 흑인 남성과 강한 유대를 느낀다고 말했다.(이름이 아르 누보이고 포주이다.) 당시 조니 미첼은 돈 에일리어스라는 흑인 음악가와 사귀고 있었다. 이 앨범에는 웨인 쇼터, 차카 칸, 돈 에일리어스라는 흑인 뮤지션이 참여 했다. 그들은 조니 미첼의 저 행위에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같다. 차카 칸은 “그녀는 흑인의 삶을 살고 노래로 불렀으며, 흑인 그 자체였어요. 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건 참 멋진 작품이었어요. 훌륭했고요.“ p480 라고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레이시즘에 대한 감수성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하나? 이들이 조니 미첼의 본심을 알았기 때문인가? 앨범 재킷은 지엽적일 뿐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인가? 조니 미첼이 이 문제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2015년 뉴욕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조니 미첼은 즐거웠던 기억으로 회상하고 있다. 평전은 “조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 모습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그런 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p481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조니 미첼이 이 앨범을 발표한다면 똑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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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클래식 클라우드 13
고영범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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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이 책에는 세 명의 화자가 있다. 한 명은 여행가로, 레이먼드 카버를 찾아 워싱턴주, 캘리포니아주를 여행한다. 또 한 명은 애정 있는 독자로, 카버 소설과 시의 한 장면을 인용하여 카버한테 갖는 의미와, 작품의 의미를 말한다. 또 한 명은 르뽀 기자로, 인용한 장면에서 미국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여행기이면서 평전이고, 소설-시평론집이면서 르뽀르타주이다.

고영범 선생님이 카버가 어릴 때 살았던 집에 가셨던 장면이 있다. 


“카버의 집으로 가는 내내 동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평일 낮인데도 몇몇 집에서는 러닝셔츠 차림의 사내들이 현관문 앞에 나와 집 앞을 지나가는 동양인 남자를 지켜봤다. 먼저 인사를 건네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난 이런 사내들을 잘 안다. 미국에서는 한때 산업 지대였던 소도시 어디를 가든 이런 사내들을 볼 수 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들, 위협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은 스스로가 쉽게 위협을 느끼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자극을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고 그 도전에서 자기를 보호해줄 수단은 자신의 육체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 폭력의 가능성이 담배 연기처럼 항상 몸 주위를 떠돌고 있고, 그것을 삶의 기본 방식으로 삼아버린 사람들, 그런 태도의 시작은 아마도 아무런 대안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실직이었을 것이다.”p48-49

그 집에 살고 있는 중남미 여성에게 집을 보여줄 수 있냐 물으니 여성은 난처해하며 거절한다. 거기서 중남미계 노동자와, 실업자가 된 야키마 백인 노동자의 갈등을 읽는데 이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아쉬운 대로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카버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여인은 즐거워하기는커녕 별 흥미를 느끼는 기색도 없이, 그래도 이곳을 빠져나가 제대로 산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라고 말했다.”p51 

이 장면은 시 <멜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문학여행기인데 미국 사회에 대한 르뽀르타주같기도 하다. 왜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느냐. 라는 신문기사와 트럼프가 혐오발언을 했다는 신문기사가 동시에 떠올랐다. 개 짖는 시끄러운 소리와, 주민의 침묵(무기력과 분노를 품고 있는)이 들리는 것 같아 책 읽다가 귀를 몇 번이나 만졌다.

좋은 평전은 유년시절의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유년시절의 사건,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가치관, 부모의 습관은 자식의 삶에 뿌리 내리기 때문이다. 삶이란 부모를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부모를 찾으려는 몸부림,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따라하고,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부모와 화해하는 일 아닌가. 이 책이 좋은 평전인 이유가 그렇다. 카버가 가진 사랑과 증오의 근원, 소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처벌 장면이 가진 의미를 탐색한다. 선생님은 “삶과 사람과 사랑이 결렬되고 또 말라붙고, 그래서 고통 받은 것이 카버의 삶이고, 그 고통의 기록이, 그 결렬의 봉합 가능성을 보여 한 것이 그의 문학이다.” p19 라고 카버의 문학을 정의내린다.  

고영범 선생님이 카버의 소설을 비평하며 공간을 말씀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비타민>에서는 화자가 마치 지옥으로 내려가듯이 흑인들의 공간으로 들어갔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중립적인 공간에서 앤이 흑인 가족에게 다가간다면, 이 작품(<대성당>)에서는 자신의 장애와 인종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흑인 사내가 백인 부부의 공간(집)으로, 그리고 남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행위의 주체가 바뀌었다.”p140 

사람은 공간에서 삶을 살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꾸기 때문에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공간의 이면을 말하며(<기생충>에서 반지하, <살인의 추억>에서 지하실) 사람의 이면을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텐데, 비평의 도구로 공간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비평이 꽤 수록이 되어 있다. 카버의 시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서는 레이먼드 카버가 소설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카버의 시는 소설과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어서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당신의 어떤 시들은 단편소설같고, 어떤 단편소설은 시같다고 말했다.”p34) 카버는 시와 소설을 함께 읽어야 한다. 카버의 소설-시평론집으로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가 이 책으로 더 좋아졌다. 이 책을 팔이 뻗는 범위에 항상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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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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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생각한다. 모자 기술자의 속병을 낫게 한 것은 약도 기도도 사랑도 아니었다. 갈대밭에서 그의 외침이었다. 응어리를 꺼내자 병이 나았다. 페터 한트케의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도 모자 기술자처럼 응어리를 꺼낸다. 

소설은 액자구조로, 약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버섯을 찾아다니고 매일 중세 서사시를 읽는 약사가 있다. 실어증이 있는 그는 부인과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 약사는 저명한 시인과 스키 영웅을 만나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그 둘은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가는 길에 시인과 스키 영웅한테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난다. 압권은 시인과 아이의 재회이다. 시인이 아이와 재회하자 아이는 경찰에 끌려간다. 그런데 그것은 약사의 사건이기도 하다. 약사는 아들이 절도를 하자 때리려 했던 적이 있었고, 아들은 약사를 떠났던 것이다. 여행을 계속하지만 시인과 스키 영웅이 청년들과 싸우자 약사는 그들과 헤어진다. 헤어지는 순간 스키 영웅과 시인은 노래를 부른다. 자기 안의 상실, 외로움, 고통,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스키 영웅과 시인은 약사와 겹친다. 성찰하기 전 약사의 모습이었다.

혼자가 된 약사는 스텝 지역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도플갱어가 총에 맞는 것을 보고 다시 아들을 떠올린다. 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때 나타난 한 여자는 그에게 실어 상태를 떨쳐버리라고 말한다. 실어 상태는 기억을 파괴하고. 당신도 파괴할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을 새로 만들고, 큰 소리로, 아니 소리라도 내보세요. 당신의 말이 비록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는 사실이에요.”p198

이후 약사는 달라진다. 스텝지역을 떠나며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을 테다!” p199 소리친다. 자기 안에 상처로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하여 살겠다. 다짐하고, 아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반성한다.

약사의 행위가 여행을 기점으로 바뀌는 것이 재밌다.(여행 전에 버섯 따러 다니고 중세 서사시 읽다가 여행 후에 하지 않는다.) 버섯은 실어증을 치료하려는 목적이면서 자기 내부로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매개물이었다.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약사의 여행이 환상처럼 서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약사는 중세 서사시를 읽었지만 여행을 떠나서는 읽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다시 읽으려 하지만 고통을 느껴 읽지 않았다. 중세 서사시가 여자에게 약물을 먹여 여자를 구속하는 것, 사랑으로 위장된 폭력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드러난다. 중세 서사시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에서 약사가 성찰을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약사는 ‘나’에게 부탁을 한다.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를 글로 옮겨달라는 것이다. 이제 약사는 중세 서사시를 읽는 대신 자기가 말한, 자기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말하기(쓰기)’는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밖으로 쏟아내게 한다. ‘읽기’로 감정은 전이된다. ‘말하기(쓰기)’와 ‘읽기’는  이해, 치유, 성찰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약사는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약사의 여행이 중세 서사시같기도 하다. 고통에 빠져 있던 약사가 여행을 떠나서 여러 사건을 겪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기사가 지옥에 내려가서 모험을 하며 보물을 얻는 것을 연상시킨다. 보물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지옥에 내려가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 소설이 모호한 것도 재미있다. 과거의 이야기인지 현재의 이야기인지, 환상인지 실재인지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지시대명사와 문장부호도 딱 구분되지 않는다. 약사가 버섯을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페터 한트케가 가지고 있는 독창적 언어. 즉 문학적 실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같다. 어쩌면 자기 안의 고통을 여러 시각으로 보기 위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안의 문제는 단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하니 말이다.

어렸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읽고 따라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렀다. 때로는 외마디 비명일 때도, 때로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이야기일 때도 있었다. 억울함, 미움, 짜증, 슬픔, 미안함, 짝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풀렸다. 이후로 옥상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누가 밤에 소리를 지른다는 소문이 돌아 경비 아저씨가 옥상 문을 잠갔다.) 일기를 썼다. 손은 아팠지만 마음이 풀렸다. 그러다 누가 내 일기를 본다는 생각이 들어 (서랍 속 일기장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쓸 걸 그랬나? 그랬다면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동생을 때리지 않았을까. 친구한테 말을 매섭게 하지 않았을까.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 약사가 그러했듯이 나도 나를 쏟아내고 싶다. 내 주위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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