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클래식 클라우드 13
고영범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이 책에는 세 명의 화자가 있다. 한 명은 여행가로, 레이먼드 카버를 찾아 워싱턴주, 캘리포니아주를 여행한다. 또 한 명은 애정 있는 독자로, 카버 소설과 시의 한 장면을 인용하여 카버한테 갖는 의미와, 작품의 의미를 말한다. 또 한 명은 르뽀 기자로, 인용한 장면에서 미국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여행기이면서 평전이고, 소설-시평론집이면서 르뽀르타주이다.

고영범 선생님이 카버가 어릴 때 살았던 집에 가셨던 장면이 있다. 


“카버의 집으로 가는 내내 동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평일 낮인데도 몇몇 집에서는 러닝셔츠 차림의 사내들이 현관문 앞에 나와 집 앞을 지나가는 동양인 남자를 지켜봤다. 먼저 인사를 건네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난 이런 사내들을 잘 안다. 미국에서는 한때 산업 지대였던 소도시 어디를 가든 이런 사내들을 볼 수 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들, 위협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은 스스로가 쉽게 위협을 느끼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자극을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고 그 도전에서 자기를 보호해줄 수단은 자신의 육체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 폭력의 가능성이 담배 연기처럼 항상 몸 주위를 떠돌고 있고, 그것을 삶의 기본 방식으로 삼아버린 사람들, 그런 태도의 시작은 아마도 아무런 대안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실직이었을 것이다.”p48-49

그 집에 살고 있는 중남미 여성에게 집을 보여줄 수 있냐 물으니 여성은 난처해하며 거절한다. 거기서 중남미계 노동자와, 실업자가 된 야키마 백인 노동자의 갈등을 읽는데 이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아쉬운 대로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카버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여인은 즐거워하기는커녕 별 흥미를 느끼는 기색도 없이, 그래도 이곳을 빠져나가 제대로 산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라고 말했다.”p51 

이 장면은 시 <멜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문학여행기인데 미국 사회에 대한 르뽀르타주같기도 하다. 왜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느냐. 라는 신문기사와 트럼프가 혐오발언을 했다는 신문기사가 동시에 떠올랐다. 개 짖는 시끄러운 소리와, 주민의 침묵(무기력과 분노를 품고 있는)이 들리는 것 같아 책 읽다가 귀를 몇 번이나 만졌다.

좋은 평전은 유년시절의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유년시절의 사건,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가치관, 부모의 습관은 자식의 삶에 뿌리 내리기 때문이다. 삶이란 부모를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부모를 찾으려는 몸부림,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따라하고,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부모와 화해하는 일 아닌가. 이 책이 좋은 평전인 이유가 그렇다. 카버가 가진 사랑과 증오의 근원, 소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처벌 장면이 가진 의미를 탐색한다. 선생님은 “삶과 사람과 사랑이 결렬되고 또 말라붙고, 그래서 고통 받은 것이 카버의 삶이고, 그 고통의 기록이, 그 결렬의 봉합 가능성을 보여 한 것이 그의 문학이다.” p19 라고 카버의 문학을 정의내린다.  

고영범 선생님이 카버의 소설을 비평하며 공간을 말씀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비타민>에서는 화자가 마치 지옥으로 내려가듯이 흑인들의 공간으로 들어갔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중립적인 공간에서 앤이 흑인 가족에게 다가간다면, 이 작품(<대성당>)에서는 자신의 장애와 인종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흑인 사내가 백인 부부의 공간(집)으로, 그리고 남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행위의 주체가 바뀌었다.”p140 

사람은 공간에서 삶을 살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꾸기 때문에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공간의 이면을 말하며(<기생충>에서 반지하, <살인의 추억>에서 지하실) 사람의 이면을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텐데, 비평의 도구로 공간은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비평이 꽤 수록이 되어 있다. 카버의 시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서는 레이먼드 카버가 소설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카버의 시는 소설과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어서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당신의 어떤 시들은 단편소설같고, 어떤 단편소설은 시같다고 말했다.”p34) 카버는 시와 소설을 함께 읽어야 한다. 카버의 소설-시평론집으로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가 이 책으로 더 좋아졌다. 이 책을 팔이 뻗는 범위에 항상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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