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Toots Thielemans - Chez Toots
투츠 틸레망 (Toots Thielemans) 연주 / Sony(수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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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츠 틸레망의 <Chez Toots>에는 보컬이 없는 연주곡이 반, 보컬이 있는 연주곡이 반이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다 좋았지만 그 중 제일은 11번 트랙. Les moulins de mon coeur (The Windmills of Your Mind) 이었다. 연주는 이러하다. 버트 판 덴 브링크의 피아노가 곡을 연다. 터벅터벅 먼 길을 걷는 듯한 피아노를 조니 마티스의 목소리와 투츠 틸레망의 하모니카가 애절하게 쫓는다. 고독의 정서는 깊어진다. 한참이나 창 밖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 위로 발자국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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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살인자의 성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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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살인자’라는 말보다는 ‘시카리오’가 더 적절할 것 같은데, 번역된 제목은 <청부 살인자의 성모>이다.


소설은 화자의 구술로 진행된다. 화자가 ‘청부 살인자’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을 하고 있고, 소설의 상당 부분에 소년이 저지르는 살인 행각이 등장한다. 소년이 무심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때로는 갱단과도 연결이 되고, 사회는 부정부패와 마약이 만연하다는 건데, 이런 상황은 콜롬비아 사회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청부 살인자라는, 어느 사회에나 다 있는 말보다는 시카리오라는, 콜롬비아적인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영화 시카리오도 있고, 넷플릭스 나르코스도 있고, 시카리오라고 써도 괜찮을텐데, 왜 청부 살인자라고 제목을 썼는지 모르겠다.


화자는 이 지역 출신 중년 남성으로 문법학자이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곳은 옛날과 그대로로,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화자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죽음 또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출구없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 내내 펼쳐지는, 죽음이 일상적인 사회보다 소설의 마지막. 출구없음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문장에서 ‘그러니까’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A 그러니까 B. 라는 식인데, B는 A를 부연한다. ‘그러니까’ 때문에 문장이 술술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에서 한 번 멈추게 되었는데, 그러자 문장이 부연하는 것. 즉 소설이 묘사하는 사회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몰입이 방해받으므로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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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을유세계문학전집 124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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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 앞쪽에는 ‘탐미주의 소설’이라고 쓰여 있고, 띠지 뒤쪽에는 ‘유미주의적 삶은~’이라고 쓰여 있다. 탐미주의와 유미주의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사상으로, 둘은 사실 같은 말이다.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에서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말이 같다고 해도 탐미주의라는 말에서 더 강한 인상을 받곤 한다. 탐미라는 단어에선 탐닉이라는 단어가 연상이 되는데, 탐닉하여 현실을 도피하고, 탐닉하다가 붕괴되는, 부정적인 어감이 탐미라는 단어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윤리적인 행위를 해서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의 소설에선 규범이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은 규범에서 벗어나 살려고 하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특히 규범에서 벗어나서 사랑을 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원래 사랑의 논리라는 게 맹목적이므로 이런 설정은 자연스럽다.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물들에게 죽음이라는 결말을 선물한다. 사랑은 왜 이뤄지지 못하고 실패하나. 사랑이 죽음이라는 결말로 끝난다는 것은 비극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게다가 죽음은 독자에게 사랑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장치라서 많은 영화와 소설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비극적인 정서로 선명하게, 인물들이 처한 한계와 의지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이 자연을 묘사하는 대목도 재밌는데, 자연 현상은 인물의 심리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물가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에드제와 페터가 물고기를 세고 있는 것을 보는 동안 나는 내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밤이 점차 밝아지고, 회색이 되어 투명해지고 시작하고, 사물들이 무채색으로 무미건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내게 한없이 거슬렸다.” p310, <무더운 날들>


그가 묘사하는 자연은 아름답기에 탐미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의 심리를 자연 현상으로 투영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한편으론,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제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인간은 자연 현상 즉 자연의 본성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뜻 같기도 하다.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은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데, 인류가 만든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 라고. 소설의, 패배하는 사랑, 붕괴하는 인간한테서 애틋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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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소설의 요괴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24
이후남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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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에서 요괴는 인간을 조종하기도 하고, 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요괴로 동물, 나무 등이 등장하는데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에 따르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여우라고 한다. SBS 동물농장에서 본 여우는 귀여웠는데, 옛사람들은 왜 여우를 요괴로 등장시켰나.

여우가 호랑이처럼 인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지만, 잡식성이라 닭을 잡아먹기도 하고 농사를 방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여우는 영리해서 여우가 하는 짓을 막겠다고 인간이 애를 아무리 써도 골탕을 먹기 십상이니 그것도 옛사람들이 여우를 고전소설에서 요괴로 등장시킨 이유가 될 것이다. 여우는 애교를 잘 부리기에 여우를 가까이 대한 사람들은 마음을 뺏긴다. 고전소설의 구미호라는 존재는 그 때문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는 고전소설에서 악인은 회과를 하면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괴는 회과를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한다는데, 요괴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회과가 눈속임이라는 것이고 요괴를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여우에 비춘다면, 사람은 반성을 하고 남한테 피해를 안주려 애쓰지만 여우는 반성하지 않고 인간한테 피해를 준다는 뜻일 것이다.

여우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다. 본능에 따라 했을 뿐인데 반성을 안 한다고 하니 말이다. 인간 입장에서는 화가 날 것이다. 여우가 농사를 방해하고 닭을 물고 가니 여우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여우를 요괴로 만들어 소설에서 잘근잘근 씹어댔겠나. 그런 소설을 돌려보고, 설화를 집안 대대로 전하고. 그러면서 분노와 두려움을 달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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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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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나간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서 읽는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그러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비밀이나 욕망처럼 마음 속 깊게 감춰진 것이 밖으로 새어 나와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사람의 관계가 낯설게 바뀌고, 내가 속한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존재하는 것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절묘하게 포착한다고. 이를테면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에서 수녀들은 남자인 메리를 여자로 둔갑시켜 몰래 키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메리한테 수녀들은 은인이 될 수 없었다. 메리가 비밀을 알아채자 수녀와 수녀원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가 되었다.

강박을 표현하는 문장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평온한 세계를 어떤 생각이 지속적으로 침범하고, 불안과 두려움이 세계에 퍼져간다. 그것에 이끌려(또는 물리치려) 합리적인 행동을 하지만 강박 속에서 합리적인 것은 사실 비합리적이다. 결국 파멸하고야 말 뿐이고 남는 것은 깊은 외로움이다. 일련의 과정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따라갈 때 기가 막힌다. 그래서일텐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범죄를 저지르는 주인공을 보는 내 마음 한 쪽에서 측은한 구석을 발견한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선 마지막에 반전이 등장하고 놀라움을 주며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반전을 만들기 전 소설 초중반이 매우 정교하다. 말이 설득력이 있어야 나중에 그 말이 가짜라는 게 밝혀질 때 놀라움이 크다는 것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알고 있다. 인물과 상황을 설득력있게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강박에 이르는 인물의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이겠지만 에로티시즘을 다룰 때도 그는 감정에 주목한다. 에로티시즘은 육체와 마음 두 가지에 작용한다. 섹스가 몸의 언어이면서 마음의 언어이기 때문인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마음의 언어를 파고드는 것이다. 그가 마음의 언어를 행간에 숨겨 놓을 때가 많아 문장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이상을 품고 있다.

그러니 읽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신간 <레이디스>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샀다. 수록된 단편 모두 좋았지만 특히 <최고로 멋진 아침>, <모빌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공튀기기 세계챔피언>, <영웅>,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루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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