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지만지 드라마 이론
장뤼크 라가르스 지음, 임혜경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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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뤼크 라가르스의 희곡 <단지 세상의 끝>. 자비에 돌란 감독 영화의 원작이다. 희곡은 ’루이의 귀환-가족과의 불통-루이의 떠남.’ 라는 구조인데 희곡에서 장소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배우는 몸으로 연기하지 않고 말로 다 한다. 대사는 시 같아서 리듬이 느껴진다. 배우가 무대에서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과 가족은 대화를 하지만 그 대화가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말을 쏟아낼 뿐이라서 대화가 독백이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불통. 귀환과 다시 떠남 사이에 불통이 있다. 회귀하는 연어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면 연어가 갈 곳은 어디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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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 - 마이 웨이, 내 방식대로 현대 예술의 거장
앤서니 서머스.로빈 스완 지음, 서정협.정은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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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작업실이 탤런트 김혜자씨 집 앞에 있었을 때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씨가 담배를 피는 것을 자주 봤다고 했다. 국민 엄마가 담배를 피는 것이 놀라워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엄마라는 이미지와 모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화 <마더>를 구상했고, 김혜자씨를 캐스팅 했다고 했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는 여성이 담배를 피는 것에 대한 통념이 있었다. 통념에 따르면 할머니는 담배를 펴도 되지만 엄마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술집 여자는 담배를 피지만 일반 여자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그러므로 봉준호 감독의 작업실 앞에, 전원일기 할머니인 탤런트 정애란씨 집이 있었고, 정애란씨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봉준호 감독이 봤다면 영화 <마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김혜자씨는 지금은 딸의 기도로 담배를 끊었다고 하지만 한창 담배를 필 때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밖에서 마음 놓고 담배도 못 피우고, 누가 담배 피우냐고 물어보면 거짓말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참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김혜자씨가 담배를 피웠다는 것을 대중이 몰랐던 것은 기자들이 김혜자씨의 그런 마음을 알고 일부러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담배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김혜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는지.


스타를 보는 것은 당대 사회를 보는 것과 같다. 스타는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다. 스타는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것(화려함, 가정적임, 정치적 올바름, 용기, 희망 등)을 보여주고 대중에게 거짓말(, 몸무게, 나이, 출신, 학력, 성적취향 등)을 한다. 스타는 허상이다. 허상과 실상 사이 간격이 멀어질수록 또는 실상을 숨기지 못할수록 스타는 추락한다.


시나트라는 1947년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열렬한 대중적 지지를 구했고, 가족이 지닌 가치를 전했으며, 논쟁이 될 만한 정치적인 명분을 옹호함과 동시에 바람을 피웠고, 악명 높은 범죄자들과 어울렸으며, 깡패처럼 행동했다. 기자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고 위협하면서 그는 화를 자초하고 있었다. p304”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스타는 괴로워. 프랭크 시나트라의 팬은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스타를 존경해. 스타한테 실망했어...


프랭크 시나트라의 파티, 마피아와의 관계, 여성편력, 병역미필, 폭력 스캔들, 빚투는 지금으로 치면 연예계 은퇴를 해야 할 판이다. 반면 자유에 대한 숭상, 흑인차별을 반대한 인권운동, 호방함은 연예인의 표준으로 숭상될 법하다. 누군가는 프랭크 시나트라 평전을 읽고 추잡한 속살을 봤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허상과 실상 사이에서 살아야 했던 스타의 비애를 봤다. 스타가 마지막 무대에서 흘린 눈물에는 무대를 내려가는 슬픔만 있는 게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게 될 설레임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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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코그니토 GD 시리즈
닉 페인 지음, 성수정 옮김, 구현성 / 알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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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페인의 희곡 <인코그니토>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로 모여 있다. 인물들은 기억 때문에 특정한 행동에 갇혀 있다. 속이고, 살인하고, 집착하고, 반복한다. 갇혀 있는 행동은 나의 삶을 만드는데 행동을 촉발하는 타인이 있으므로, 내 삶이 만들어질 때 타인의 삶도 같이 만들어진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 개별적인 듯 보이지만 연관이 되어 있는 삶. 그러므로 내 삶은 하나의 삶이면서 모든 삶이기도 하다. <인코그니토>는 일차적으로 기억에 대한 연극이면서 나아가 하나의 삶과 모든 삶이라는, 공간에 대한 연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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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리 GD 시리즈
닉 페인 지음, 성수정 옮김, 구현성 그래픽 / 알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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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페인의 희곡 <별무리>는 재밌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희곡은 커플의 대화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커플의 대화가 끝나면 같은 대화가 비슷하게 되풀이 된다. 그것이 끝나면 비슷한 대화가 또 되풀이 된다. 커플의 대화 하나로만 보면 대화는 끝난 것이지만, 그 다음에 비슷한 대화가 이어지니 대화는 끝나지 않은 것이 된다. 대화의 끝을 개체의 죽음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대화의 끝(개체의 죽음)은 다른 대화의 시작(개체의 탄생)으로 연결되니, 크게 보면 대화(개체)는 죽지 않은 것이 된다. 희곡 속에서 한 인물의 죽음이 예견되지만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희곡이 정녕 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불멸일 것이다.

 

별의 생애가 그러하다.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면서 성장한다. 별은 소멸한 뒤 다른 별의 재료가 된다. 별은 죽지만 다른 별은 태어나니 우주 전체로 보면 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희곡에는 <별무리>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인물의 직업은 천체물리학자이다. 닉 페인은 이런 설정으로 탄생-죽음-탄생-죽음-탄생->불멸이라는 의미를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보르헤스도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보르헤스의 글쓰기 특징은 다시쓰기인데, 보르헤스는 완결된 과거의 작품을 다시 써서 새롭게 완결시켰다. 다시 쓰고 다시 쓰는 식으로 보르헤스의 문학은 나아갔다. 보르헤스는 죽음을, 하나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 이행되는 것으로 봤다. 보르헤스한테 삶은 다른 삶으로 이행되며, 불멸한다.

 

5년 전 닉 페인의 <별무리>가 한국에서 초연되었을 때(5년 전에 공연을 못 봐서 너무 속상하다...) 류주연 연출가는 기자간담회에서 공연을 이렇게 소개했다고 한다. 심장질환을 앓던 아버지가 사망한 뒤 닉 페인은 물리학자의 다큐멘터리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를 우연히 접했고, 그때 양자 평행우주이론에 심취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닉 페인은 아버지를 애도한다. 별이 그러한 것처럼, 보르헤스가 그러한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희곡 속지에는, “미나에게, 그리고 이 희곡을 아빠에게 바칩니다.” 라고 쓰여 있다. 굉장히 좋은 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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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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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에 동물이 있다. , 사자, 나귀, 콘도르, 전갈, , 고래... 동물은 말을 하고 수사를 움켜 쥔다. 동물들은 수사를 구속하는 장면에서 나오고, 동물한테서 부각되는 것은 끔찍한 것. 이를테면 흉포함, 위압감, 간교함이다. (그래서 동물이라기 보다는 짐승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삶에서 짐승을 보곤 했는데 짐승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뒷통수 치는 직장 동료가 나한테는 뱀이었고, 당신이 했잖아. 떠넘기는 직장 상사가 사나운 침팬지였고, 눈치 없는 직장 후배가 곰이었다. 그때 나는 그들의 눈에 생쥐, 돌맹이, 잡초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뱀, 침팬지, 곰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양이었다고 믿고 싶지만...소설에서 짐승이 말을 하는 대목이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었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소설의 시점 변화가 매우 흥미로웠다. 1인칭, 2인칭, 3인칭. 다양한 시점이 나오는데, 특히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이야기가 끝나자 같은 장면을 3인칭 시점으로 다시 서술하는 대목은 정말 좋았다. 두 가지 시점이 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자 소설은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이 되었고, 일기면서 역사서가 되었다. 들은 이야기면서 말하는 이야기가 되었고, 내 이야기이면서 남의 이야기가 되었고, 환상이면서 실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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