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거의 마음먹은 대로 생겨나고 변형되고 그리고 폐기된다. 삼십대 중반을 넘긴 나에게 지금까지 사랑으로 인한 가벼운 비탄과 회환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것도 달콤한 구색이었을 뿐이다. 나는 사랑이란 것은 기질과 필요가 계기를 만나서 생겨났다가 암시 혹은 자기최면에 의해 변형되고, 그리고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p.11



나는 언제부터 사랑을 믿지 않았던가.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람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내게 머물다 간 사람들은 머문 게 아니라 스쳐갔다. 그들도 내게 오래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이 오래 머물 줄 알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어그러지면서 관계는 산산조각이 난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다. 그들을 사랑할 때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다. 그들을 버리고 나서야 나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법을 깨우쳤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과 와해가 가져온 성장이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누구는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며 이루어지는 거라고 하지만, 타인에게 가지는 감정 자체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은 무뎌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써 돌봐야 하며 어떤 감정은 오래오래 사포질을 하며 둥글게 조각해야 한다. 사랑을 할 때조차 그렇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이기일 뿐이다. 상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려하며 그에 맞게 내 감정의 형태를 변형시켜야 한다. 사랑이 이렇게나 힘들다. 사랑은 아주 예민하여 여름날의 복숭아 껍질처럼 상해버릴 수도 있다. 자질구레한 벌레가 들끓어 결국 쓰레기통에 직행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열두 살의 진희는 삶에 대해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나'와'나'를 분리할 줄 알며 저보다 철이 없는 이모의 표정을 보고도 상황을 읽어내고 또래 친구를 이용할 줄 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여서 때로는 보잘 것 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심통을 부린다. 삶의 언저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진희의 냉소는 버려져 본 자의 방어기제와도 같았다. 자라기 위한 성장통이 뼈저리고 말아서 진희는 전진보다 후진을 택한 것이다. 화자가 열두 살의 소녀라 할지라도 그의 시선을, 세계를 창조해낸 것은 은희경 작가일 테니 나는 작가의 통찰력에 매 순간 감탄을 잊을 수 없었다. 소녀 진희가 서른살의 나고, 서른 중반의 진희가 마흔의 나인 것만 같아 에필로그를 몇 번이고 읽었다. 담담하게 어투에서는 쌉쌀한 연초 향이 풍겼다. 이미 모든 걸 다 겪은 사람의 무심하면서도 회의적인 시선. 그 시선에 공감해버린 나 또한 비관이 익숙하다는 증거이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 마음이 쓰였던 인물은 광진테라 아줌마다. 


그의 남편은 스스로를 풍운아라 일컬으며 동정해 마지 않는 박광진이라는 남자다. 광진테라 아줌마, 즉 순분이는 박광진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녀의 아내로 살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제가 일을 하며 번 돈을 남편 양복점에 쏟고,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대신해 양복점 일에, 집안일, 육아까지 도맡아한다. 박광진은 낮이면 오토바이에 동네 여자들을 태우고 나들이를 가고 밤에는 술에 취해 순분이에게 폭력을 가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남자에게서, 생활 속에서 벗어나고자 몇 번이나 망설였다. 아이를 등에 업고 정류장 앞에 서서 버스에 올라 탈까, 말까. 제 앞날에 대한 망설임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p.75


이 글 속 아줌마는 이곳에서만 살고 있지 않다. 순분이는 나의 본가가 있는 아산에도, 작은 이모가 살고 있는 서울에도,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살았던 부여에도 남아있다. 그네들은 제게 주어진 삶이 자기의 삶인 줄만 알고 평생을 산다. 엄마는 술에 취한 아빠에게 머리채를 잡히곤 했다. 남자의 악력은 너무도 거세서, 여자 홀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나와 내 동생은 너무 어려 술에 이성을 빼앗긴 남자를 밀어내지 못 했다. 내가 머리가 크고 나서는 엄마에게 이혼을 하라고 했다. 이제 나와 동생도 다 컸으니 엄마도 아빠와 헤어지라고. 저런 남자는 버려져도 싸다고. 굶어 죽든 말든 엄마 인생을 살라고. 하지만 엄마는 그 남자를 떠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운명이라 여기며 개간하던 밭에 꽃이 피고 작물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거다. 내가 서른이 된 이후에 말이다. 그녀는 적어도 30년 동안 삐죽한 자갈이 깔린 밭을 징하게 일구었다. 기우제를 지내고 거름을 주기도 했지만 땅은 척박했다. 가뭄이 몇 차례 찾아오고도 그녀는 그 땅을 버리지 못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에 광진테라 아줌마는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갔다가 남편 손에 이끌려 돌아온다. 남편이 친정까지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졌을 뿐더러 집에 두고온 갓난쟁이 아이 재성이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던 것이다.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p.270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p.275



나는 몇몇 집을 나간 여자들이 왜 지옥불을 다시 찾아올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자신이 가진 불행의 서사를 뒤바꾸지 못 할까. 은희경의 완벽한 통찰력이 그간 내가 풀지 못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고, 속이 시원했다. 우리 엄마도 '내 팔자려니.' 하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이렇게 불행한 까닭은 태어나면서 하늘이 정해준 팔자의 일부이며 살다 보면 또 복이 올 것이라고. 마치 오랜 수련을 마치고 해탈한 사람처럼 태평한 소리를 해댄다. 팔자소관이라는 건 일종의 자기합리화나 자기최면 같다. 사건의 원인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해결하려 하기 보다 주체를 아예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린다. 그렇게 삶에 잡아먹혀버린다. 시간이 지나도 이런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작은 광진테라가 계속해서 개업한다.


나는 이 책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이 좋았다. 회색 세계에 주인공인 진희만이 분홍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파란색이었다가 하며 자라났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 한다면 진희보다 진희의 이모인 '영옥'이 주인공으로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배신으로 처절하게 막을 내렸으며 배신을 한 두 사람 중 가장 친했고 믿었던, 배반의 주인공인 친구가 공장 화재로 목숨을 잃는다. 그런 그녀는 오빠의 친구와 사랑에 빠졌으며 나중에는 그 남자의 아이를 낙태한다. 이토록 이 세계의 인물들은 각각의 사연이 있고 성장하거나 도태하거나 제자리에 꿋꿋이 서 있는다. 지금쯤 서울 어딘가에서 중후한 주름을 가진 진희라는 여자가 위스키 한잔을 삶이라 여기며 무심히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나의 작은 바램이다.

나는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비밀이란 심술궂어서 자기를 절대 보이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공유되어지기를 간청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 P20

군인과 그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긴 머리의 여자. 이형렬과 이모의 뒷모습은 어쩐지 상징적으로 보인다. 군복이 한시성을 표상한다면 긴 머리는 처녀성을 나타내고, 또한 군복이 구속을 나타낸다면 긴 머리에서는 자유로운 젊음이 풍겨나온다. 군복이 제한된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를 자극받았을 때 긴 머리의 처녀성은 제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긴 머리의 젊음이 자유를 구가할 때 군복에게는 그녀의 배신을 돌이킬 수 있는 개인적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군복과 긴 머리 여자의 뒷모습에는 배신의 뇌관이 들어 있다. - P99

내게 있어서는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었다. ‘고뇌‘라는 그 자양이, 삼촌 방의 다락에서 이루어진 ‘독서‘라는 자양과 합해지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나의 통찰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 P116

금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금기를 깨뜨리는 죄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고에게 죄책감은 부당하게 강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무죄를 선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사실은 피고 자신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다만 강요된 죄책감을 치러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 P125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 P138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 작은 친절일 뿐인데도 자기의 환심을 사려는 조바심으로 보이고, 스쳐가는 눈빛일 뿐인데도 자기의 가슴에 운명적 각인을 남기려는 의사표시로 믿게 만드는 어리석은 맹목성이 사랑에는 있다. - P202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 P251

새 삶에 대한 아줌마의 용기는 풍화작용으로 이미 모서리가 다 깎여서 자갈돌처럼 하찮게 발밑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 P271

어둑어둑한 방 안에 하얗게 떠오른 현석오빠의 얼굴은 수려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같지 않고 마치 뛰어난 솜씨로 빚어놓은 신성한 석고조각 같다. 검은 속눈썹마이 물에 적신 빗으로 빗어놓은 것처럼 가지런하고 촉촉하여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할 뿐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P300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준다. - P307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모처럼 감상적인 사람은 삶을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한다. 아니 삶이 자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자기의 행복과 불행의 조종간을 통째로 타인의 손에 쥐여준다면 그 타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 P339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P346

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나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 P363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에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 P365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 P372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 P401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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