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With Frida Kahlo 활자에 잠긴 시
박연준 지음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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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바람을 사랑하던 사람은 여전히 벌거벗었으리라. 바람은 자주 숨고, 느닷없이 불어오고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오래 두어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 고독은 서로 다른 종種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 책은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사랑, 침묵, 재앙, 절망 등을 박연준 작가가 서술했다. 미술과 시의 만남이란 늘 이렇듯 반갑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프리다'란 영화도 챙겨봤다. 영화는 오로지 프리다의 삶, 인간으로서 그녀의 서사에 집중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2시간 분량의 영상으로 그녀의 삶을 압축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리라. 내가 감각한 그녀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 생이었다. 어린 시절 버스 사고로 온 몸이 부서지면서 신체적 고통을, 미술을 시작한 뒤 그의 남편인 디에고를 만나 결혼을 한 후에는 그의 여성편력과 자유분방함으로 심적 고통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삶이란 길에 안개처럼 깔린 고통으로 그녀의 예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혹은 감쪽같이, 현란하고 자유롭게 타인을 속일 수 있는 것. 나 자신. 혹자는 말할 것이다. 살다 보면 자기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그렇다고 나에 대한 정의, 표현을 타인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그렇듯, 그래서 그녀의 그림들이 곧 그녀 자신이었다. 


책은 그녀의 사랑에 시선을 집중한다. 우리가 감히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숭고함, 동정, 존경, 무의미, 책임, 집착...... 많은 이들이 정의하는 사랑은 각기 다른 결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랑이 있음으로 우린 살아간다. 


그녀가 몰두하는 '사랑'은 특별한 데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통에 짓눌려 죽지 않기 위해 사랑에 집착한 영혼이다.


텍스트로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는 무난히, 술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영화를 볼 때는 아무래도 시각에 직접적으로 꽂혀서 그런지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게 됐다. 나는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사랑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평생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희생적이고 집요한 사랑. 살기 위해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늘 간절해보였다. 프리다에게 디에고가 어떤 존재일지 나름 머리를 굴려 고민해봤다. 우선 그는 예술적인 부분에서 그녀의 선생님이었고,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그리는 세계의 영감. 그리고 애증. 끝나지 않는 내전같은, 감정들의 주축. 나는 이런 식으로 가늠만 할 수 있을 뿐. 그녀의 마음, 넓고 원대한 범위를 감히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부모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을 두고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 이라고 했다. 정확한 말이다. 비둘기가 하필 코끼리를 사랑해서, 슬픈 일을 나눠 갖는 일. 결이 다른 두 종이가 만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어떤 종이는 더 많이 젖고, 더 많이 찢어지고, 더 많이 닳을 것이다. 사랑이 그렇다. 젖고, 찢어지고, 닳을지라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박연준 작가는 사랑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 같다. 그녀가 사랑에 관련한 글을 적어주면 그게 내게 정답같이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완벽히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감정을 나눈다면 당연히 불공평하게 비율이 산정될 테지만. 어릴 땐 내게서 끝나지 않은 사랑이 상대방에게서 먼저 끝나면 참 억울했었다. 후회도 많이 했었다. 참, 찌질하게 후회는 왜 했는지. 지금도 썩 쿨하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몇날며칠 후회를 끌어안고 우는 일이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는 사랑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성애의 감정. 그 갈래들에 관해 말이다. 연인, 가족, 친구. 예컨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현실의 친구보다 더 많이 아끼고 걱정할 때도 있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건만.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 감정은 뭐라고 표현하지? 사랑? 어떤 사랑? 세상이 넓은 만큼 인간의 감정들도 복잡한 것 같다. 이리저리 뒤얽힌 실타래들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사랑'이란 감정을 단적으로 나눠선 안 된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조금 더 단순하게 보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인간의 감정, 성애의 종류를 나누는 건 심리학자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그저 좋으면 좋은 걸, 싫으면 싫은 걸 굴절시키지 않고 곧대로 믿으며 바라보면 되는 거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 마음 속 어느 부분을, 이 세상에서 어떤 종류에 해당하는지 재고 따지기엔 시간이 아깝다.



그런 면에서 프리다 칼로는 실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설령 상처를 받았음에도 관용과 배려로 디에고를 사랑하고 용서했다. 용서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그 때문에 받은 상처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그 사람과의 남은 시간을 온전히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죄를 기꺼이 사하고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야 가능한 일.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용서를 구하는 일이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다. 애초에 발생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 피하고 외면하는 게 더 쉬운 사람. 


저는 제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사랑 불구자" 라고요. 그리고 그건 제가 너무 많은 슬픔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라고, 너무 많은 종류의 슬픔을 예감하고, 과하게 느껴버리기 때문이라고 얼마 전에 알게 됐어요. 



책에서 유독 공감을 많이 했던 페이지는 작가와 채빈이란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부분이다. 특히 채빈이 작가에게 보낸 편지 속 그녀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어쩌면 나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해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도망치는 게 익숙해서, 발을 자주 빼곤 했다.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은 슬픔이 미리부터 두려워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걸 택하곤 했다. 어떨 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리듯, 대뜸 사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미처 도망가기 위한 수로를 파놓지 못한 그 사이에 내가 그 사랑 안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도 고난의 연속이다. 수시로 겁을 내서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들기를 반복한다. 그런 갈등들이 기어이 끝이 되고, 나는 또 사랑으로부터 멀리 도주한다. 가난한 마음에는 계속 빈곤이 찾아온다. 빈 마음에 무엇이든 쌓아야 한다.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을. 대담하고 씩씩한 것들을 서슴없이, 공허를 용납하지 않고.






프리다, 당신의 걸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열심히 운명과 맞서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나요. 나는요. 할 수 있다면 당신의 눈썹을 어루만져 보고 싶어요. 당신이라면 왠지 허락해줄 것 같거든요. 검은 눈썹의 결을 따라 엄지로 가만히 쓸어보고 싶습니다. 향기를 맡아보고 싶어요. 당신 주변을 메우고 있는 담대의 내음을, 할 수만 있다면 향수로 만들어 눈물이 날 때마다 뿌리고 싶어요. 당신의 그림들이 세계를 떠돌아요. 당신의 얼굴이 전 세계를. 이 작은 땅에 사는 나에게까지 당도했어요. 우리, 언젠가 무기체가 되어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랑이 깨졌을 때 그리움은 정확히 말하면 ‘몸에 대한 그리움‘이다. 실물을 향한 그리움, 여기, 없는, 실체를 향한 그리움이다. - P45

"정말 나를 힘들게 하던 게 결국엔 내 몸에 배어,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 같아. 나를 지불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 결국 그게 귀한 거야." - P76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곱씹어보며, 나는 최선을 다해 미래 따위는 모르길 바랍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두렵고, 약해집니다. 당신과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나이를 먹고 무거워지지 말아요.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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