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타이완 (13'-14') - Season 2 프렌즈 Friends 6
조현숙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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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홍콩 여행책은 클로즈업이 최고(특히 지도가 예술입니다) 타이완은 클로즈업이 없으니 그 대안을 찾자면 프렌즈가 가장 나은 것 같아요. 6월에 대만 여행 가는데 많은 도움 될 것 같네요. 여행 가실 계획 있으시면 을지로에 있는 대만 관광청에 들리셔서 여행 책자와 교통 티켓 무료로 꼭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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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유럽의 현대미술관 - 테이트 모던에서 빌바오 구겐하임까지 독특한 현대미술로 안내할 유럽 미술관 16곳을 찾아서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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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는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스페인을 따라 중요한 현대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미술은 유쾌하고 신선하고 재미있는 게임과도 같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아파트가 1층에서 시작해 그 위해 2층, 3층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왜 1.5층은 없는가, 2.5층은 존재하면 안되는가 라고 의문을 던지고,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층’을 짓기 위해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현대미술은 일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1. 사치 갤러리 -현대미술의 새로운 메카

2. 테이트 브리튼 -영국적인, 지극히 영국적인

3. 테이트 모던 -화력발전소의 화려한 변신

4. 루브르 박물관 -현대미술과의 새로운 소통

5.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산 미술 명품의 전당

6. 퐁피두 센터 -21세기형 복합문화공간

7. 팔레 드 도쿄 -발칙한 상상력의 창작공장

8.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유럽의 숨은 진주

9.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유럽 미술의 새로운 중앙역

10. 베를린 신국립 미술관 -경쾌한 건물 안에 담긴 진중한 메세지

11.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감정을 표현하는 건축

12. 크륄러 뮐러 미술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미술관

13. 드 퐁트 현대미술관 -방직공장의 환골탈태

14.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도시의 역사를 바꾼 미술관

15.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지역 정체성에 대한 물음

16. 카이샤 포럼 -기업의 아트 마케팅

 

총 16 군데의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고, 중간 중간 가볼만한 다른 미술관들도 간략하게 적혀 있다. 이 중 가본 곳을 세어보니 8곳. 아직도 가야할 곳이 정말 많구나. 가장 가보고 싶은 미술관은 빌바오와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꼭 가주마. 꼭.

 

* 사치 갤러리 -이라크 유대인 출신인 찰스 사치라는 현대 미술 컬렉터가 운영하는 개인 갤러리. 20대의 무명 영국 작가들을 세계적 스타작가로 만들어 YBA(young british artist)신화를 만들어 낸 곳. 데미안 허스트 <제국>, 트레이시 에민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세라 루커스 <오, 자연스러운>, 채프먼 형제 <죽은자에 대한 위대한 행위>, 론 뮤익 <죽은 아버지>

 

*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독일의 노이스라는 작은 도시에 있음. 한적하고 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 띄엄띄엄 조각같은 미술관 건물이 들어서 있어 산책하면서 둘러볼 수 있는 곳. 이곳에는 작품 설명서나 명제표가 없다. 아는 작가의 작품이 있으면 조금 반가운 거고, 모르는 작가의 작품은 신선함과 호기심으로 그저 자유롭게 감상하면 그만.

이곳의 또하나의 명소는 유기농 카페테리아이다. 자연속을 거닐며 11개의 갤러리 주변 경관을 즐기려면 최소 반나절이 소비된다. 산책 마지막 코스에서 만나게 되는 이곳. 이 지역 농촌에서 만든 신선한 무공해 과일, 잡곡 빵, 쨈, 감자, 달걀, 커피가 무료로 제공된다.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암스테르담역에서 기차로 한시간 떨어져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호헤 뵐뤼어 국립공원 안에 있다. 국립 공원 입구 매표소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자전거를 타고 30분 들어가야 한다. 거대한 조각공원 또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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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의 개정판. 김훈 산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사 칼럼이다. 김훈 작가의 산문은 살아있다. 담백하다. 군더더기 말이 하나도 없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표현되어 있다. 신기하다. 그의 산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감사히 읽을 뿐.

 

#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20

 

# 단언하건대, 배가 고파서 미군의 초콜릿을 얻어먹은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버린 닭다리로 UN죽을 끓여먹은 것도 치욕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불가피한 생명현상이다. 초콜릿이 던져지는 방향으로 몰리던 배고픈 아이들의 민첩한 동작은 생명의 발랄한 힘인 것이다. 이만한 자의식을 회복하기에도 세월이 필요했다. 23

 

# 여자의 몸에 대한 이 사회의 미의식은 날씬한 여자를 우대하고 숭배하며, 뚱뚱한 여자를 모멸하고 혐오한다. 이 혐오감은 이미 미의식을 넘어서서, 사회적 폭력에 가깝다. 그것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도 뚱뚱한 여자를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은 사물화되어 간다. 이 사물화의 목표는 ‘잘빠진 여자’이다. 43

 

# 심하다, 이 난장판이여. 심하다, 이 무지함이여. 우리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처럼 삶의 기율과 법도를 모조리 부수워버리고 권위와 경건성에 먹칠을 하고, 삶의 외양을 이토록 쓰레기통처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아야만 하는 것인가. 대학 졸업생들이 식장을 비워놓고 기어이 핫도그를 먹어야 하는가. 55

 

# 이 판국에 술이 약해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드는 신문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는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89-90

 

# 오징어와 뻥튀기는 길 막힘의 식품이다. 막히는 길 위에서는 시간이 막힌다. 시간은 길바닥 위에서 죽어가고, 오징어나 뻥튀기를 씹는 사람들 입 속에서 죽어간다. 오도가도 못하는 차 안에서 오징어나 뻥튀기를 씹는 사람들의 입놀림은 수족관에 갇힌 붕어들의 입질과 닮아 있다. 168-69

 

#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177

 

#.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치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돈과 밥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시 흥부의 박이다. 246

 

# 수박은 속이 빨간데, 자두는 껍질이 빨갛다.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서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박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풀의 향기다. 풀의 향기가 수분에 풀려서 넓게 퍼진다. 자두의 향기는 전혀 다르다. 자두의 향기는 육향에 가깝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이 통채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은 여름의 즐거움이다. 248

 

# 화장을 할 때,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무섭게 집중한다. 여자들이 얼굴에 그려넣고 싶은 것은 존재의 개별성과 개별화된 존재의 자유일 것이다. 여기까지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들의 그 개별성과 자유를 거느리고 섹스어필까지 가야 한다. 어려운 대목이다.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 나오면 여자들의 개별성과 자유는 억압의 세련된 형식으로 변한다.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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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서양음악사 1 - 개정판 모두를 위한 테마별 역사 시리즈 1
박을미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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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서양 음악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바흐와 헨델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까지의 음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 서양 예술의 중심에는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성당을 다녔으면 훨씬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 저자는 자칫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흐를 수 있는 일반 음악 교과서와는 차별하여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충분히 음악 입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생전 처음 듣는 용어들도 꽤 있었다. 중요한 부분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고대

   그리스 음악 -에토스(Ethos)론. 그리스인들의 음악관에서 음악의 목적은 윤리적 목적과 일치하는 것으로, 음악은 성품에 미치는 결과에 의해 구별되고, 또 그 가치로 평가되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이었다.

   피타고라스(B.C 582-497) -정수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네 학과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음계론을 수학, 물리학, 천문학과 연결시켜 전개했다.

 

중세(450-1450)

   그레고리 성가 -단성음악으로서, 성직자나 여러 가수들의 합창에 의해서 ‘제창’으로 불러진다. 선율을 받쳐주는 화성과 반주가 없고, 규칙적인 강세가 없는 유동적인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무일도와 미사 -카톨릭 교회 예배의식에는 두가지 기본형태가 있다. 일상기도인 성무일도이고, 성체성사의 기념인 미사이다.

   음유시인 -서양문명사의 상당기간 동안 음악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로마카톨릭 교회였다. 교회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비종교적 또는 세속 음악의 성장이 급격히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민네징거가 12-14세기 까지 활약이 왕성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노래를 창조하였다. ‘민네’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민네징거’란 ‘사랑의 가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데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주로 이들이 귀부인들의 사랑에 관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트레첸토 -14세기 이탈리아 음악이다. 선율선의 아름다운과 표현의 풍부함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종교 음악보다는 다성 세속 노래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르스 노마 -14세기. 리듬에 중요성 두었다. 모든 종류의 시가들, 쉼퓨, 당김박이 사용됨으로써 과거보다 훨씬 더 유연한 선율을 만들었다. 기욤드 마쇼(1300년경-77) 작곡가가 유명하다.

 

르네상스(1450-1600)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분 동안, 교회음악의 경우는 무반주의 아카펠라 연주가 표준이었다. 아 카펠라는 원래 ‘교회식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음악이 주로 무반부 합창음악이었기 때문에 아 카펠라는 무반주라는 의미의 음악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카펠라 전통이 점차 사라졌다. 전래 음악에서 악기 사용이 증가하였고, 오르간이 가장 많이 쓰였다.

   종교개혁과 루터의 음악 -16세기 루터는 음악이 슬픔, 즐거움, 절망, 질투나 원한 같은 인간의 모든 심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고, 건전한 음악을 통해 젊은이들의 도덕적인 성향을 보호하며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라틴어 성가를 독일어로 번역하거나, 친숙한 선율에 독일어로 된 새 가사를 붙이고, 일반인들이 부르기 쉽게 단음적 세팅의 단순한 민요풍 선율을 작곡하여 손수 음악의 틀을 갖추었다.

 

바로크(1600-1750)

   17세기 들어서면서 모노디(단음악)의 발생과 극히 축소된 간단한 형식의 반주(통주저음) 사용에 의해 호포모니라는 새로운 양식의 장을 열게 된다. 모노디의 출현으로 자유로운 개성적 표현이 가능해졌고, 가사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 양식은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악곡형식인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칸타타(노래되는 곡) - 실내 칸타타 : 사적인 사교모이에서 연주하던 세속적 작품.

   교회 칸타타 : 바흐의 칸타타 대부분 여기 포함. 그는 300여곡 의 칸타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짐.

   바흐는 신앙심이 매우 깊어 그의 칸타타와 수난곡들의 악보 초두에는 항시 Jesu Juva(예수여, 도움을 주소서)를 나타내는 문자 J.J.를 적어놓고 곡의 끝머리에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를 의미하는 S.D.G.를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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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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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원서 The writing of the disaster 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몇 장 읽자마자 카오스에 빠져 번역본을 펼쳤다. 그러나 분명 한국어로 되어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블량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박준상 교수의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라는 책을 읽었음에서 불구하고, 여전히 블량쇼의 사상은 어렵다. 철학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인문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글을 볼 때마다 우울하다. 철학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 공감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야 되는데 말이다.

   이 책은 단상 형식으로 쓰여 있고, 그 사유는 매우 압축적이고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번역하신 박준상 교수도 이 책은 어찌보면 ‘흩뿌려져’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블량쇼는 자신이 다루었던 주제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명확히 밝히면서 마치 일기를 쓰듯이 하루에 일정 분량을 쓴 것이며, 자신의 이전 글쓰기들을 충실히 따라왔고, 그것들에 익숙한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아직 독자가 될 수 없다. 블량쇼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니.

 

   옮긴이 해제에서 옮긴이는, 가장 중요해 보이는 하나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원초적 장면?’이라는 제목하에 세번에 걸쳐 무대화된다. 이것은 세르주 르클레르의 중요한 저작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와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르클레르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 나타난 친부살해의 공포가 정신분석학에서 끊임없이 되돌아가 보아야 할 중요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게 부각되어 온 반면, 오이디푸스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기 이전 유아 시절에 살해당할 위기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과, 신이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음을 의문과 함께 강조한다. 우리 무의식 안에는 결코 완전히 죽어서 사라지지 않은 채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대표 표상이 있다. 우리 각자는 그 어린아이를 그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살해해 나가야만 하는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신 안에 갇혀 사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타인들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고, 동물이나 그야말로 ‘아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주 르클레르에 의하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가는 것과,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 또는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은 정확히 같다. 어린아이에 대한 지속적인 살해 행위에서 무기는 칼이나 총이 아니고 언어이다. 따라서 무한하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어야만, 무한하게 언어를 유통시키려는 시도를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데 언어의 무한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죽은 채로, 언제나 이미 죽은 채로 다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언어도 자연으로 승격되어 자연을 대치할 수 없으며 존재와 우리의 삶이 어떠한 언어, 담론으로도 수렴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 어떠한 언어, 담론도, 설사 무한이라는 지점에 이른다 할지라도, 찢긴 존재로서의 아픈 인간을 치료할 수 없고, 인간 안의 찢긴 틈과 뚫린 구멍을 메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죽음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완료되어 버린 남의 이야기가 에피소드가 전혀 아니고 하나의 신화도 아니며, 바로 ‘내’가 삶 가운데에서-또한 타자와의 관계에서-살아가면서, 삶에 묶여 있는 한에서 반복해야만 하는 죽음이다. ‘나’는 어차피 말 못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그를 대신해서 말하기, 떠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말할 줄 아는 자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내로 진입했으며, 거기서 살아가기 시작했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 사회적 삶이, 간단히, 삶 그 자체가 흔들리고 위태로워지고 나아가 파탄에 이를 때, 입이 틀어막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과연 ‘말하는가’-시작한다. 즉 침묵을 침묵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침묵의 현전으로서의 말, 모든 말의 원천으로서의 침묵, 모든 말의 근거를 되묻는 말, 이번에는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죽어 있었던,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규 또는 죽은 자연의 침묵, 죽은 자연이 또다시 빠져 들어가는 침묵, 침묵의 침묵, 침묵으로 또다시 열리는 침묵.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 그러나 그들이 물론 실제로 한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아니며, 언어가 모든 사회적인 것을 규정하고-의식적이자 사회적인 모든 동일화를 가능하게 만들고-있다고 본다면, 바로 언어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개’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처럼, 가령 ‘내’가 눈앞에서 여기 지금 꼬리치면서 짖고 있는 새까만 작은 이 개를 ‘개’라고 부르자마자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 개를 즉시 ‘일반적인 개’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즉시 변형시킨다. 바로 여기 지금 생생하게 나타나는 단수적인 감각적, 구체적 존재자를 어떠한 구체적인 시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하나의 관념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그것이 ‘언어가 살해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모든 언어의 작동원리인 부정성이 폭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내’가 이 개를 ‘개’라고 부르는 것조차 사실상 폭력인데,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하면서 이 개가 차지하고 있는, 여기 지금이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공간, 시간을 이 개로부터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르시스, 즉 그 어린아이가 바로 ‘내’ 안에 뚫린 구멍이고, ‘나’와 ‘나 자신’의 동일성을 항구적인 것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나’의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타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유아는 우리 모두 안에 파여있는 심연이다. 왜냐하면 그 유아는 우리의 모든 의식적, 사회적 자아들이 존재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가장 먼, 절대적 수동의 과거로부터 우리 모두의 공동 영역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유아는 기억될 수 없는 가장 먼 과거에 우리 모두 안에 남은 결핍된 존재, 결핍으로서의 비존재일 것이다. 우리를 가장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찢긴 존재로 예정해 놓은 자, 우리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존재로 미리 규정해 놓은 자, 우리에게 책임이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책임져야 할 ‘망각된 불행’을 애초부터 가져온 자, 그 불행을 우리 모두의 탄생 이전의 태고의 죽음을 견뎌내는 것을 블랑쇼는 ‘참을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신 안에 뚫려 있는 구멍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공동의 틈새)임을, 우리 공동의 타자임을, 인간 스스로가 비존재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타인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되고 타인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타인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타인을 책임진다 할지라도 그 공동의 구멍은 매워지지 않으며, ‘나’는 또 다시 찢긴 존재로 예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예외없이 찢겨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그러나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이다. 소통이 어떠한 고정되어 결정된 지점에서도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 소통의 확고한 토대의 부재, 그러나 그에 따르는 소통의 역동성, 소통의 무한성, 아마 그것을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했을 것이다.

 

# 읽는다는 것의 고뇌, 즉 모든 텍스트가,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즐거움을 주고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또는 그러한 인상을 줄수록) 비어 있다는 것-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심연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37

 

# 너는 속속들이 작가인가, 말하자면 너의 모든 점에서 너 자체가 살아있고 역동적인 글쓰기인가? 작가에게 던져진 이러한 물음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그것은 즉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거나 그의 장례식에서 바보같은 찬사를 보내는 격이 될 것이다. 116

 

# 수용소, 전멸의 수용소,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드러나 있었던 형상들. 한 문명의 특성들이 밝혀지거나 벌거벗겨진 채로 드러났다(“노동은 해방을 가져다준다‘, ’노동을 통해 복권하자‘). 노동을 노동자에게 힘을 가져다주는 물질적 움직임이라고 분명히 찬양하는 사회에서, 노동은, 개발도 잉여가치도 문제가 될 수 없는 극단의 징벌이, 모든 가치가 파괴되는 한계가 된다. 또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할 수 있는 힘을 재충전하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지도 못하는데, 노동이 더 이상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고 죽어가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노동, 죽음, 그것들은 같게 된다. 어디에서나, 모든 순간에 노동한다. 억악이 절대적일 때, 더 이상 여가가, ’자유 시간‘이 없다. 잠도 감시 속에 놓여 있다. 이제 노동의 의미는,노동을 통해서, 노동하는 가운데 파괴되는 데에 있다.....145-46

 

# “낙관주의자들은 글을 잘 못쓴다”(발레리). 그러나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 “들으십시오. 귀를 기울이십시오.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책들, 중요한 책들이 죽어가면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습니다”(르네 샤르).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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