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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쾌락의 시대 - 지젝이 본 후기산업사회
권택영 지음 / 문예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철학가 혹은 비평가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이 만들어낸 용어들의 정의가 각각 다르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철학서나 비평서를 읽다보면 대체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왜 철학자들은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비평가들은 별의별 이론들을 만들어 주장하는가? 칸트, 헤겔, 라캉, 데리다, 들뢰즈, 베르그송, 소쉬르, 푸코, 블랑쇼......그들의 책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속에 내 의식을 두드리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인내를 가지고 조금씩 다가간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으니 나에게도 기적 같은 깨달음의 날이 올 것이다.
지젝의 <삐딱하기 보기>는 라캉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책이다. 지젝은 나처럼 기본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영화(특히 히치콕의 작품)를 통해 라캉의 이론을 설명한다. 친절한 지젝씨를 통해 나는 라캉의 세계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잉여 쾌락의 시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고 재구성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쓰인 책이다. 지젝과 더불어 여러 철학자들이 설명하는 여러 개념들이 체계적으로 비교,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비평가들의 기본적인 이론을 아는 독자라면 이 책은 무척이나 재밌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너무 재밌어서 다 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도 있긴 했지만 좋은 책이다. 정리하는 마음으로 책의 중요 개념을 요약해 놓는다.
* 후기 자본사회 - 잉여 쾌락의 사회. 인간은 잉여 쾌락의 존재이기 때문에, 물건이 넘쳐도 생산을 멈추지 못한다. 잉여가치(surplus value)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멈춘다. 잉여 쾌락의 시대는 물건이 아니라 쓰레기를 낳는다.
* 잉여 - 어느 한쪽에 고정할 수 없는 두 개의 대립 관계를 억지로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녀 언제나 여분이 남는다. 이것이 잉여이다.
* 주이상스 - 주이상스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삶의 에너지이기에 에로스가 없으면 살 희망도 사라진다.
라캉: 우주 만물을 생성케 하는 에너지. 증오와 파괴의 잔인함.
프로이드: 리비도(공격성, 죽음충동, 마조히즘)
* 잉여 주이상스(오브제 프티 아) - 지젝: 잉여 쾌락(not all); 언제나 여분이 존재한다.
잉여 주이상스는 욕망을 낳는 주이상스다. 채워도 남는 결핍, 딱 들어맞지 않기에 자꾸만 지연되는 삶의 목표, 그러기에 죽음으로 퇴행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삶의 동력.
방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아늑하다. 창 밖으로 바라보는 폭풍우는 아름답다. 스크린을 통해 보는 모든 폭력은 재미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증오와 파괴적 충동은 칸막이 너머로 보이기 때문에 판타지를 만듬.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 이 둘이 일치하지 않는 한 삶은 지속된다. 젖처럼 보이지만 막상 다가가서 입에 대려는 순간 딱딱한 돌로 변하는 것이 욕망의 대상(라캉은 아무것도 아닌 텅 빈 해골이 베일을 쓰고 숭고한 이상형으로 나타나는 것이 모든 욕망의 대상이라고 말함). 주체는 모든 결핍을 충족시켜줄 것 같은 대상을 향해 다가감.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을 손에 쥐었을 때 고유 가치는 미끄러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져버리고 주체는 다시 결핍을 느낌. 그러므로 판타지 속에서 욕망의 대상은 사용 가치가 아니고 교환가치. 대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는 날, 욕망은 멈춤. 자본주의에서 사용 가치란 존재하지 않음.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주는 사용가치는 단 하나, 죽음 뿐이다.
* 잉여가치 -민주주의가 최선은 아니지만 그보다 나은 것이 없듯 잉여 가치 역시 최선은 아니지만 그보다 나은 것은 없다. 아버지의 이름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심연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러나 잉여가치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택한 아버지의 이름이요, 텅 빈 기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잉여 가치가 숭고한 대상으로 승화되지 않고 실재계인 nothing 그 자체가 되면 불안해지고 주체가 소멸한다.
* 상상계 - 꿈과 목표를 가는 시기
* 실재계 - 그것을 잡는 순간
라캉: 타자. 환상을 가로지르는 타자.
지젝: 잉여, 우수리, 여분, 유령. all을 not all로 만드는 것.
* 상징계 - 상상계와 실재계의 반복이 일어나는 삶의 현장.
*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 -편지는 바라봄과 보임을 아는 주체의 손으로 넘어감. 따라서 바라봄과 있고 보임을 모르는 왕과 경감은 상상계에 갇혀 있고, 바라봄과 보임이 교차되는 곳에서 진리(편지)를 얻을 수 있음을 아는 장관과 뒤팽은 상징계로 진입하는 주체가 됨. 그런데 편지는 내용이 아닌 편지를 소유한 자가 권력을 가지는 기표. 텅 빈 기표가 주체의 자리를 결정함.
* 칸트 -순수이성이라는 경험적 인식과 그것을 뛰어넘는, 실천이성이라는 선험적 이성 제시함. 칸트의 순수이성은 쾌와 불쾌의 감흥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므로 인간 의지의 객관적 재현은 가능하지 않고 우발성만이 인간 의지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줌.
>>그러나 의식이 아무리 옳다고 판단해도 실천의 영역에 들어서면 무의식이 주인이다. 칸트는 실천의 영역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직관이 아니라 몸이라는 사실을 모름. 법은 욕망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는 욕망을 만들어 우리를 살게 함. 지젝은 칸트가 잉여쾌락을 몰랐다고 말함. 초자아의 지나친 명령은 희생을 부르고, 희생은 쾌락을 낳고, 쾌락은 죽음을 낳음. 독일 군인들 히틀러 명령에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 주인의 명령에 따라 완벽한 대상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
* 모방욕망(mimetic desire) -르네 지라르가 만든 개념. 모든 욕망에는 매개가 있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선하게 살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할 때 그 욕망은 신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 대타자는 신. 신은 가장 숭고한 존재. 그러기에 우리는 불안하지 않음. 신의 욕망을 모방할 때는 마음이 평화로움.
*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내기 일화
제욱시스 -이교도의 신. 새들이 쪼아 먹으려 한 것은 진짜 포도. 진짜 포도를 똑같이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제욱시스는 진실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믿는 실증주의자로 상상계적 착오에 빠져 있음. 그러므로 상상계적 자아는 그 포도를 쪼아 먹으려 하며, 포도가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함.
파라시오스 - 기독교적 신. 그는 죽음이 삶의 시작이고 오직 단 하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앎.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삶을 지배하는 절대 주인이 죽음이라는 진리. 파라시오스는 기독교가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듯이 삶이 죽음을 가린 베일임을 암. 삶이 죽음에 의지할 때 우리는 신비한 베일을 벗기려 하지 말고 베일 그 자체를 숭배해야 함. 베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베일을 숭배하는 것이 사랑. 베일 뒤에 진짜가 있다고 믿고 베일을 제거하려 들면 죽음이 만연하고 베일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불신하면 죽음이 만연함. 무정주부주의와 파시즘은 똑같이 베일을 걷고 죽음을 봄.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으로 이미 원초적인 죽음을 고백했기에 텅 빔과 대적할 수 있음.
* 나치즘은 우리에게 명료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노예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31.
* 이상형이란 살기 위해, 삶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실재계와의 만남을 지연시키는 욕망의 미끼, 오브제 아이다. 55.
* 우리는 포르노를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그 장면을 상상 속에서 재현할 땐 성적 욕망을 느낀다. 베일을 벗긴 혐오스러운 ‘그것’을 주체가 상상 속에서 재현할 때 그것은 다시 판타지의 대상(잉여 쾌락)이 되기 때문이다. 59.
* 민주정치와 파시즘의 경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다. 둘 다 민중의 함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63.
* 포르노 영화와 <현기증>이 어떻게 다른지 라캉의 공식에 대입해보자. 포르노에서 관객은 야한 장면에 사로잡히며,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으로 전락한다. 관객은 폭력적인 성적 장면에 욕망을 종속시키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한다. 79.
* 삶은 죽음을 우회하여 천천히 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렇게 천천히 가도록 만드는 욕망의 미끼가 잉여 쾌락이다. 도착증은 잉여 쾌락을 인정하지 못한다. 잉여 쾌락이라는 타자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그 타자에게 먹히고 마는 것이 도착증이다. 85.
* 모든 제국주의 파시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 목표는 결코 우수리와 여분과 잉여를 남겨선 안 되면 완벽한 자아 이상을 실현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완벽한 자아 이상의 실현이란 바로 죽음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의 종착점은 죽음에 이르는 대상 파괴요 자아 파괴다. 113.
* 부러음과 증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사랑이란 승화되지 않으면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죽음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7.
* nothing이 승화되어 숭고하게 나타나지 않고 nothing 그대로 나타나는사회는 도착증에 걸린 사회다. 지젝은 후기 상품사회는 nothing을 먹는 사회라고 지적한다. 130.
* 아버지의 이름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연결짓는 잉여 쾌락이다. 그리고 이것이 숭고한 위치로 승화된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131.
* 미학은 파괴적인 증오와 악을 언어의 베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프로이트는 파괴적 리비도를 예술로 우회하여 분출시키는 것을 최고의 승화로 보았다. 163.
* 물은 사용가치를 갖는다. 콜라는 잉여 쾌락을 준다. 콜라는 처음 나왔을 때 교환가치를 갖지만 그 다음 단계에선 잉여 가치 자체를 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페인 없는 콜라, 슈거 프리 콜라, 다이어트 콜라.....이처럼 진짜 콜라의 맛은 사라지고 각종 상표가 덧붙여 잉여 가치만이 남는다.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