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읽었던 <휴먼 스테인>을 영화로 보았다. 포니아로 분한 니콜 키드만의 붉은 파마 머리를 바라보며 다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Human stain. 필립 로스는 인간의 오점이 무엇이라고 보는 걸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점이라... 책을 읽는 며칠 동안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은 좋은 책이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는 나머지 생각이라는 걸 할 틈조차 주지 않는 소설들도 많으니까.

  소설의 화자인 주커먼은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콜먼을 관찰하는 관찰자이다. 콜먼 실크는 매사추세츠 서부 버크셔에 있는 가상의 대학인 아테나 대학의 학장을 지낸 후, 다시 교수로서 생활하고 있다. 어느 날 콜먼은 출석을 부르는 동안 오 주 동안 한번 도 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두 학생을 스푸크(spooks)-유령, 검둥이 라는 뜻-라고 부른다. 여기서 그가 의도했던 것은 ‘유령’이란 의미였다. 하지만 두 학생이 흑인으로 밝혀지고 그들은 콜먼이 자신들을 ‘검둥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콜먼은 그 문제를 해명하려고 맞서다가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사직한다. (문득 브리오니의 한 마디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어톤먼트>의 로비가 떠오른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아내 아이라스는 사망하고, 콜먼은 분노로 시간을 보내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며 외딴곳에 살고 있는 작가 주커먼을 찾아간다. 그리고 콜먼이 대학교 청소부인 서른네 살의 여자 포니아 팔리와 만나 연인이 되면서부터 이야기가 펼쳐진다.

  위대한 학장이자 교수인 콜먼과 밑바닥 인생을 산 포니아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잣대로 보기엔 미친 짓이다. 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두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멋진 결합은 없다. 그들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있고, 그 상처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된다. 인습을 끊고, 가면을 벗어버린 둘의 사랑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단지 영화가 주는 영상미 때문일까? 내가 콜먼이라면, 혹은 포니아라면, 상대방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나에겐 그만한 자유로운 마음이 있을까?

  인간의 오점.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떨치고 싶지만 떨쳐낼 수 없는 것.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함께 공존하는 것. 인간의 오점.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다. 당당해야 할 때 비굴하고, 정직해야 할 때 거짓으로 외면하는 것. 인간의 오점. 그것은 인간의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이다. 평생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없는 치부. 홀로 신 앞에 안고 가야 할 그 무거운 짐. 인간의 오점.  그것은 인종이라는 굴레이다. 피부색으로 판정되는 그 어처구니없는 편견들. 인간의 오점. 그것은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며 만들어지는 흔적. 인간의 오점. 그것은 무엇일까...

 

 

* 이웃인 콜먼 실크가 일흔 한 살이나 된 자신이 아테나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서른네 살 먹은 여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1998년 여름이었다. 1권 11.

 

* **가 언제나 삶의 일부인데도 어떻게 “아니다, 이것 삶의 일부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를 타락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탈이상화하는 구원의 타락이자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니 말이다. 1권 77

 

* 실크 씨는 자식들이 적절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다. 자라나면서 아이들은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저 멍멍이 좀 봐.” 아이들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저 강아지 좀 봐.” 이렇게 말해야 했다. “저 도베르만 좀 봐. 저 비글 좀 봐. 저 테리어 좀 봐.” 아이들은 사물이 일정한 체계에 따라 분류된다는 것을 배웠다. 아이들은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갖는 위력에 대해 배웠다. 그는 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었다. 1권 175.

 

* 콜먼은 비밀을 정말로 좋아했다. 자신이 생각하려는 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돌아가고 있는지 누구도 모르게 하는 비밀 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 나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떠들어대는 곳에는 힘이나 즐거움, 어느 쪽도 존재하지 않았다. 콜먼에게 힘과 즐거움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자신이 반격을 장기로 하는 선수이듯 뭔가를 술술 털어놓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반고백적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고 콜먼은 누가 이야기해줄 필요도 없이 이미 그런 이치를 터득하고 있었다. 콜먼이 섀도복싱과 무거운 펀치백을 치는 훈련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담긴 비밀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육상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는데, 권투의 경우가 훨씬 좋았다. 어떤 친구들은 그저 죽어라 무거운 펀치백을 쳐대어 힘이나 뺀다. 콜먼은 그렇지 않았다. 콜먼은 생각을 했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경주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했다. 다른 모든 것은 배제시키고, 다른 어떤 것도 개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그 상황, 그 과목, 그 시합, 그 시험에 침잠시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숙달해야 할 때는 그것이 무엇이건 아에 그것에 되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1권 187.

 

* 비밀 없이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서 뭔가가 부족한 즐거움이랄까. 그가 천진난만함을 되찾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건 엘리가 준 것이었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천진난만함이라는 걸 어디에 쓴단 말인가? 아이리스는 그 이상의 것을 준다. 그녀는 모든 것을 또다른 높이까지 끌어올린다. 아이리스는 콜먼이 살고 싶어하는 규모의 삶을 되돌려준다. 1권 250.

 

* 적절하다. 이것은 건전한 지침에서 벗어나는 대개의 일탈을 통제하여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면적으로는 온건하지만 공격적 의미를 감춘 말이다. 1권 279.

 

* “상상해봐요.” 그녀가 말한다. “매일 과시하는 걸요. 그리고 이걸 말이에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를요. 무엇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를요. ”

그녀는 단 한 번도 뭐든 그 이상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는 모든 걸 소유하고 싶어하죠.” 그녀가 말한다.

“그런 여자들은 당신의 우편물을 소유하고 싶어하죠. 그런 여자들은 당신의 미래를 소유하고 싶어하죠. 그런 여자들은 당신의 환상을 소유하고 싶어하죠. ‘감히 어떻게 나 말고 다른 여자와 **를 하려 들 수 있는 거야. 난 당신의 꿈속의 여인이 되어야겠어. 내가 집에 함께 있는데 포**는 왜 보는 건데?’ 그런 여자들은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소유하고 싶은 거에요. 콜먼. 하지만 쾌락은 그 사람을 소유하는 데서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요. 쾌락은 바로 이것이니까요. 당신과 함께 있는 방에 또 다른 경쟁자를 두고 있는 것 말이에요. 아, 이제 당신을 알겠어요. 콜먼, 난 내 인생 전체를 당신한테 줘버리면서도 여전히 당신을 소유할 수 있어요. 그저 춤을 추는 것으로 말이죠. 사실 아닌가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당신은 이걸 좋아하나요, 콜먼? 2권 59.

 

* “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알게 되었을까요? 바로 당신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격노해 있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있어줄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내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나 있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게 바로 최고의 **를 가능하게 한 조건인 거죠, 콜먼. 모든 것을 평정해버리는 분노.” 2권 62-63.

 

* 우리는 오점을 남기고, 우리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자국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능욕, 실수, *, 정*, 이런 것 말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곤 없다. 불복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은총이나 구세 혹은 구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한다. 내재되어 있다. 애초부터 타고난 것이다. 규정지어버리는 것이다. 표지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오점이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오점은 표지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본질적이다. 불복종을 선행하고, 불복종을 포함하며, 모든 설명과 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오점.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농담에 지나지 않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야만적 농담인 셈이다. 순수함에 대해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미친 짓이다. 보다 많은 불순함을 찾아내지는 못할지언정, 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들다니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오점에 대해 그녀가 하는 말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전부다. 당연히, 그것은 오점이라는 것에 대한 포니아의 견해다. 우리 인간은 불가피하게 오점을 지닌 존재라는 것. 끔찍하고 자연적인 불완전함과 화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일 뿐. 2권 77-78.

 

* 그녀(델필)는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그녀들이 무슨 말들을 떠들고 다니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지내던 시절과 예일에서 지내던 시절들을 떠올리며 이 어휘들을 위해 살아간다. 그녀는 훌륭한 문학비평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 어휘들을 익혀야 한다고 여긴다. 그녀는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짜라는 의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녀가 분류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어떤 집단에서는 그것을 그녀가 지닌 신비한 매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테나대학처럼 궁벽한 지옥 같은 곳에서는 그저 아주 조금 분류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은 아서 수스먼조차도 짜증을 내게 만든다. 빌어먹을, 도대체 이 여자는 왜 폰** 같은 것도 하려 들지 않는 걸까? 여기서 분류 불가능한 존재가 되면, 그들은 그걸 이유로 당신을 들볶는다. 하지만 바로 그 분류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그녀의 성장소설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녀가 분류 불가능한 상태에서 언제나 성공을 거둬왔다는 것을 아테나대학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2권 130.

 

*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은 연기이자, 그녀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요구된다고 판단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권력의 근원이었나? 그녀가 지닌 유일한 권력의 근원이었나? 그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무엇이었지?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맹으로 맹세함으로써 스스로를 괴롭혔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유아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 세상에 어울리도록 원시적 자아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배움을 숨이 턱턱 막히는 교양의 한 형태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한층 효과적이고 우선하는 지식으로 눌러 이겨버리자는 것이다. 그녀는 일기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녀가 반대하는 것은 그녀에게 옳다고 느껴질 수 없는 것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사를 흥미롭게 만든다. 그녀는 단지 그런 독소를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없을 뿐이다. 어떤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것을 보여줘서 안 되고, 어떤 것을 말해서는 안 되고, 어떤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그런 모든 것이 아니라, 싫건 좋건 있는 그대로의 나로 행동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로 생각하는 것. 2권 174.

 

* “그렇다면 끝까지 오빠답게 행동한 셈이군요. 뭔가를 하려고 달려들면 그걸 해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점은 어렸을 때부터 오빠의 비범한 부분이었어요. 어떤 계획을 세우면 거기에 완전히 달라붙어 해치우는 거죠. 오빠는 자신이 내린 모든 결정에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어요.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의 동료 교수들에게 해야 했던 커다란 거짓말에 필요했던 온갖 거짓말, 그건데 오빠는 그걸 죽을 때까지 고수했던 거군요. 심지어 유태인으로 무덤 속에 들어가기까지 하다니. 세상에, 콜먼 오빠.” 그녀(어니스틴)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2권 221.

 

* 하지만 증오의 위험성은,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예상 했던 것보다 백 배 정도는 더 괴롭다는 점이죠. 일단 시작하고 나면, 멈출 수도 없고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통제하기 힘든 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증오심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술을 끊는 게 훨씬 쉬어요. 그건 중요한 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죠.“ 2권 2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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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 작품집 지만지 고전선집 549
한무숙 지음, 김진희 엮음 / 지만지고전천줄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명륜동에는 한무숙 문학관이 있다. 가끔 그곳을 지나며 한무숙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미안함이 있었다.

   한무숙의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단편집엔 다른 단편들이 몇 편 더 있는데, 찾아보니 절판이 되어 이 책으로 링크를 걸어놓았다. 늘 이름만 듣다, 처음으로 작가의 단편을 읽었는데, 참 좋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정갈하고 깊이가 있다. 각 단편마다 어투와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 그 맛을 음미하여 읽는 재미가 있다. 소재는 독특하고, 내용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돌> <감정이 있는 심연> <그대로의 잠을> <축제와 운명의 장소> <이사종의 아내> <생인손> 을 읽었는데, 몇며 단편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옮겨 적어본다.

 

* 그러고보니 ‘나’가 너무 벅차다. 다섯 자 일곱 치 열여덟 관의 육체가 ‘나’의 전 내용이라고 끊어 생각해 온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나’가 이렇게 벅차고 보니 어떤 것이 짜장 ‘나’인지 흐러터분해지는 것이다.

어젠가 해질 무렵 강에 비낀 무지개를 본 일이 있는데, 그렇게도 치밀하게 결합되었던 빛이 일곱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흐트러지는 것에 넋을 잃었다. 그것은 아름답기보다는 황홀하였다. 아침해에 아롱지는 풀 이슬같이 불안한 아름다움이기도 하였다. 무지개는 오 분을 그대로 지탱하고 있지 못하여 이내 사라지고, 무지개가 사라진 하늘에 엷은 구름이 모래처럼 흐르고 있었다.

허전하고 아쉬우면서도, 무지개가 사라지고 언제나와 같이 하늘이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체념이라고 할까, 무슨 안도 같은 느낌이 가슴에 번져 갔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우발된 현상을 삶에 비겨본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지만, 사실 삶이란 허망한 하나의 과제이고 ‘나’라는 것은 무지개처럼 그것을 다양화하고 산일시킬 따름인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돌 -

 

 

* 돈화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싹트기 시작한 가로수의 자줏빛이 도는 연두색 윗가지를 쳐다보면 전아가 낮은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아까 그 백제 관음 말이에요. 난 그리면서 느꼈어요. 우린 지금 그것을 한 가지 유품으로만 취급허구 있지만 그걸 만든 사람은 하나의 의미를 그렇게 구상시킨 게 아니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전제인지 몰라서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다안 지나가 버리구 마는 거지요. 사람두 의미까지두!”

그녀는 말을 끊고 한참 잠잠하다가 이번에는 딴사람 같은 잠긴 듯한 음성으로 다시 나직히 말을 이었다.

“나두 어떤 의미가 되구 싶었는데 -선생님헌테-”

“나헌테? 그야 말루 무슨 의미지?”

나는 어떤 기개 같은 것으로 음성이 겉떴다.

“글쎄 사랑일 것이라구 생각해 봤어요. ”

오히려 무감동할 정도로 조용한 어조였다. 단정하게 앞으로 향한 무표정한 옆얼굴이 창백하게 고상했다. 지금 내 옆을 거닐고 있는 바로 이 옆얼굴이다. -감정이 있는 심연 -

* 북받쳐 오르는 분노, 있는 대로의 벽마다에 머리를 부딪쳐 부숴 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 이제야 안 것이다. 막연히 느껴 오던 그 거미줄에 얽힌 것 같은 느낌, 언제나 문턱에서 거절당하는 인생에의 참가, 남들이 일상이 그리도 어려웠던 일들 - 그렇다. 한 벌 한 벌의 남저고리가 입혀질 때마다 한 인격으로부터 자유와 주체성을 박탈해 간 것이다.

숨이 가빠 왔다. 어디로든 우선 그 곳을 떠야 했다. 발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것을 아무렇게나 차 버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달은 없으나 창 너머 바라보는 밤하늘에 별이 차갑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못 오는 별빛, 저만치 북쪽 하늘에 돋아난 일곱 개의 보석들, 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오해가 저 별들을 두고 이어져 왔던 것인가.

........

영호를 낳던 그 더운 날의 광경이 눈 앞에 떠오른다. 이윽고 그 깨끗한 어린 몸에 입혀졌던 남저고리, 앞으로 올 날들이-그에게도 터부가 많이 생기리라. 슬기롭고, 힘이 다른 아이보다 세더라도 골목 대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골목 대장이란 억세고 잔인성을 가지는 것이 일쑤니까. 그리하여 이니셔티브를 잃어버리리라.

무엇에든 흥미와 탐구심을 가져 사물의 있는 모습을 알고 싶어해도 안 된다. 장난감이라든가, 기계 같은 것의 구조가 알고 싶어 그것을 뜨기라도 해 보라. 어른들은 그런 행위에 흉행의 징조를 보고 기겁하여 말릴 것이다. 아이는 모르는 사이에 사물에 대한 관심을 잃고 밍숭하고 착한 아이가 되어 버리리라.

........

철창 이쪽에 끼워져 있는 창 유리에 겨울 밤이 빙화를 얼리는 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읽은 불란서 상징파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나를 잠재워 다오.

그대로의 잠을 재워 다오     - 그대로의 잠을 -

 

 

* 언덕 위는 온통 옥수수밭이어서, 달콤한 옥수수숲의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오곤 하였다. ‘그이’는 이 언덕을 사랑하고 마날 때는 언제나 그 곳을 택했다. 흰 저고리에 자주 치마를 받쳐입고 언덕으로 ‘그이’를 만나러 가는 옥희는 갓스물이었다. 용모가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또한 재질이 뛰어나지도 않았으나, 옥희는 왠지 자기는 친구들처럼 여학교를 마친 후에도 집에서 가사 같은 것을 익혀 평범하게 결혼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기는 그런 살림 때가 묻지 않은 여성이 되리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소위 ‘희망’이라는 것-그것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그것은 어느 가능성에의 신앙이 아니고, 젊음에의 신앙이었다. 누구나가 젊은 한 시절 가지는 것이나, 언젠가는 잃어버려야 하는 이 신앙에서 그녀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태는 그 본질의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가끔 사람에게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전옥희 여상의 존재는 이제 친구들의 빈축 거리도 못 되었다. 모두들 어이가 없어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축제와 운명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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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hlomo Mintz - 파가니니 : 24 카프리스(Paganini : Caprices for solo violin, Op.1 Nos.1-24, Complete)(CD)
Shlomo Mintz / IUM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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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모 민츠의 연주로 듣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가격도 저렴하고, 연주도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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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Western Eyes (Paperback)
Conrad, Joseph / Oxford Univ Pr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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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 저렴한 가격에 이토록 좋은 책을 살 수 있다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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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 The Sea (Paperback) Vintage Classics 561
Murdoch, Iris / Vintage Classics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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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쪽이 넘기 때문에 매우 두껍다. 그런데 페이페백이라 놀랍게도 매우 가볍다. 번역본은 두 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왠지 이럴 땐 원서를 사는 게 훨씬 이득을 보는 느낌이다. 왜 번역본들은 조금만 두꺼우면 2권으로 나누어 출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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