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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에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팔지 않아 이 작가가 쓴 또다른 책 <맛>을 표지로 올려놓았다.
여기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부자 아파트의 54살의 수위 아줌마 르네가 있다. 그녀는 사회의 통념과 전혀 부합되지 않은 지적이고 박식한 여인이다. 그 아파트에 사는 여러 인물들 중 부유한 부모를 둔 열두 살 천재 소녀 팔로마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자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두 명의 화자가 교차하며 자신의 심정을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몇 년 전에 사놓고 단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한편으로는 처음 보는 작가라 왠지 손이 가지 않아) 책장에 방치해 두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읽게 되었다.
르네와 팔로마의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우리가 느끼는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부자들, 가난한 자들은 그들 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속에서 두 화자는 사색하고, 비판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이때 빛처럼 등장한 한 남자가 있으니 부자 아파트에 새로 이사를 온 일본인 카쿠로 씨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 대해 편견이 없는 그는 단번에 르네와 팔로마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차츰 함께 어울리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예술적 장치들이 있다. 네덜란드의 정물화,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 데카르트와 칸트의 사유, 톨스토이와 오즈 야스지로. 소설에 언급되는 여러 작품들이 한층 더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
아쉬운 점은 결론 부분이 르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것으로 갑자기 마무리되는 것이다. 단지 지적이고 대화가 통한다는 이유로 곧 르네를 사랑하게 되는 카쿠로의 태도도(이것이야 말로 백마 탄 왕이 아닌가) 살짝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는데 르네가 죽기까지 하니 어라 이렇게 끝나는 거야 하는 당혹감이 들었다.
* 우리 가족과 어울리는 사람들 중 거의 모든 이들이 이런 길을 걸었다. 자신의 지능을 보상받고자 애썼고, 학업의 기회를 레몬 마냥 쥐어짰고,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보낸 청춘, 그리고 그 희망들이 왜 그토록 하잘것없는 삶으로 귀결되었는가를 망연자실한 채로 자문하는 데 보낸 평생 동안의 삶. 사람들은 별들을 쫒는다고 믿지만, 결국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들처럼 끝을 맺는다. 나는 차라리 처음부터 어린애들에게 삶을 부조리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큼 더 간단한 것은 없지 않나 생각한다. 26.
* 그러니 한 잔의 차를 마시자. 침묵이 형성되고, 바깥에서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 가을 나뭇잎들이 살랑대며 날아가고, 고양이는 따뜻한 불 아래서 잠잔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은 승화된다. 129.
* 난 문법이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말하거나 읽거나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었거나 그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아름다운 표현이나 문체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법을 공부하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문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언어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고,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언어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이다. 229.
* 그렇다. 이건 분명 어른들의 수다지만 그래도 카쿠로와 있으면 좋은 것은 그가 모든 걸 예의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설사 그가 하는 말이 별 재미가 없어도 아주 유쾌하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말하며, 당신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난 처음으로 누군가 내게 말할 때 날 배려해주는 사람을 만난 셈이다. 그는 찬성이나 반대를 노리는 대신, “넌 누구니? 나랑 얘기하고 싶니? 너랑 있으면 정말 즐거워!” 라고 말하듯 날 바라보았다. 난 바로 이게 예절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건 자신이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태도라고 생각한다. 245.
* 그러나 우리가 한 폭의 정물화를 바라볼 때, 우리가 사물들의 고양되고 정적인 형상화가 안겨주는 이 아름다움을 찾지 않고도 맛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갈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을 향유하며, 우리가 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을 감상하며, 우리가 욕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을 아끼게 된다. 그러므로 정물화는 우리의 욕망에 말을 걸지만 다른 사람의 욕망에서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어떤 계획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즐거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욕망하려는 노력 없이도 우리에게 헌신하기 때문에 정물화는 예술의 정수, 즉 비시간성이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다. 삶도 움직임도 없는 무언의 장면 속에서, 계획에서 벗어난 시간, 지속과 지친 탐욕에서 벗어난 완벽함이 구현된다. 욕망이 배제된 즐거움, 시간이 배제된 삶, 의지가 배제된 아름다움. 왜냐하면 예술, 그것은 욕망이 배제된 감동이기 때문이다. 296.
* 걱정마요, 르네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불태우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나는 이제부터 ‘다시는’ 속의 ‘언제나’를 추적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건 바로 이 세상 속의 아름다움.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