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회화 파레시아 총서 1
마리본 세종 엮음, 미셸 푸코 외 지음,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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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이유가 있다. 마네도 푸코도.

 

* 마네가 한 일-아무튼 그것은 서구 회화에서 마네가 일으킨 변혁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은 말하자면 그림에 재현된 바 안에서 서구 회화의 전통이 그때까지 숨기고 피해 가려 했던 캔버스의 속성, 특질, 한계가 다시 튀어나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각형의 표면, 커다란 수평축과 수직축, 캔버스를 비추는 실제 조명, 감상자가 그림을 이 뱡향 저 방향에서 바라볼 가능성, 이 모든 것이 마네의 그림에 현존하며, 마네는 자신의 그림들 안에 이것들을 다시 부여하고 재현했습니다. 그리고 마네는 오브제로서의 그림, 물질성으로서의 그림, 외부의 빛을 받고 감상자가 그 앞에 서거나 주변을 돌게 될 채색된 사물로서의 그림을 재발명-어쩌면 발명?-합니다. 이러한 오브제로서의 그림의 발명과 재현된 것 안에 캔버스의 물질성을 다시 삽입시킨 것이 마네가 회화에 일으킨 중대한 변혁의 핵심을 이루며, 또 이런 의미에서 저는 마네가 인상주의를 준비한 것에 한정되지 않고 초기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에서 근본적이었던 바를 흔들었다고 생각합니다. 26

 

* 요컨대 <올랭피아>의 나신을 향하면서 나신을 비추는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올랭피아>의 나신을 가시적으로 만듭니다. <올랭피아>를 향한 우리의 시선은 횃불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랭피아>의 가시성과 나신의 책임자입니다. 57

* 따라서 세 가지 양립 불가능성의 체계가 존재합니다. 요컨대 화가는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또 오른쪽에 위치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또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의 광경을 보기 위해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삼중의 불가능성, 즉 감상자가 위치해야 하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장소의 배재가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이 그림을 볼 때 체험하는 매력과 거북살스러움을 설명합니다. 70 -푸코

 

* 오랫동안 회화에는 정서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가르치기도 하고 즐거움을 주기도 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정념은 단순히 회화의 주제인 것만이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감상자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정서를 발생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감상자가 침묵하는 회화와 만나게 되면 정서의 전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대되었던 정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107

 

* (마네는) 물질적 표면으로서의 그림을 강조함으로써 그림이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라는 것을, 그리고 피라미드식 시각의 교차가 믿게 하려 했던 회화의 정의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마네는 캔버스의 투명성이라는 착시 효과와 결별하고 회화의 빗물질성이라는 환상을 고발합니다. 115-6 -카롤 탈롱-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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