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웃음 / 출구 동문선 문예신서 222
엘렌 식수 지음, 박혜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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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수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두드러지는 페미니스트 작가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이와 더불어 엘렌 식수는 197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의 핵심 인물이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 살짝 언급되었던 ‘메두사의 웃음’을 보고 즉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시작한 책이다. 크리스테바의 글이 어렵듯, 당연히 식수의 글도 어려울 것이라 각오하고 책을 펼쳤는데 어라? 이것은 시인가? 수필인가? 대체 장르가 뭐지? 문장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느낌이다. 특정한 형식이나 범주를 벗어난 식수의 글이 마음에 든다.

  ‘메두사의 웃음’은 여성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남성 중심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그 저변에 깔린 여성에 대한 억압을 읽어낸다. 메두사는 남성을 향해 괴물이 아닌 아름다운 미소를 날린다. ‘출구’는 ‘메두사의 웃음’을 풀어 쓴 듯 한 에세이로 같은 문장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어 금방 책장이 넘어간다. 두 수필 모두 식수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성적 글쓰기’와 ‘남성 중심주의’의 해체이다. 이미 버틀러의 사상에 감염되어버린 나로서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것 자체가 이분법 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삐딱한 시선으로 보기도 했지만, 식수의 논의는 매우 설득력 있고 감동스럽다. 특히 문체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아무 곳이나 펼쳐놓고 읽어보라.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읽고 받아들이면 한 편의 시처럼 은유적이면서도 명료하다. 다시 힘을 내어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 조화, 욕망, 공훈, 추구. 이 모든 움직임은 여성의 도래에, 그리고 바로 여성의 일어남에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누워 있고, 남자는 서 있다. 여자가 일어나면 꿈은 끝난다. 그후는 사회, 문화적인 것이다. 그는 여자에게 자식을 많이 만들어 주고, 그녀는 잠자리와 해산으로 젊음을 보낸다. 침대에서 침대로, 더 이상 여자가 아니게 되는 나이까지.

  ‘신부의 침대, 해산의 침대, 죽음의 침대’ 이것이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새겨진 여성의 행로이다. 침대에서 침대로 가는 것이 여성의 행로인 것이다. 서 있는 율리시스 블룸은 여행한다. 끊임없이 더블린을 관통하며 항해한다. 그것은 보행이며 탐험이다. 페넬로페의 항해는 모든 여성의 항해이기도 하다. 어머니들이 끝없이 죽어가는 고통의 침대, 퓌르푸아 부인이 끝없이 해산하는 병원의 침대, 아내 몰리의 간통의 침대, 무한히 에로틱한 몽상의 틀, 어렴풋한 기억의 항해이다. 그녀는 떠돈다. 그러나 누워서 방랑한다. 꿈속에서 떠돌며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한다. 여성의 여행은 육신으로서의 여행이다. 마치 여자는 문화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고, 역사가 문제되는 사회적 장애서부터 멀리 떨어져, 남자들이 제정해 놓은 배분 속에 비-사회적이며, 비-정치적이고, 살아 있는 구조 속에서 비인간적인 반쪽으로, 물론 언제나 자연 쪽에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 자신의 복부, 자기 집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귀 기울이며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식욕, 정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위험을 (그럭저럭) 무릅쓰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공적 무대의 한 작은 부분, 한 동인이 되는 책임을 걸머지고 살아간다. 반면 여자는 이 활동적인 시간에 대한 무관심 혹은 저항을 나타낸다. 여성은 불변의 원칙이다. 어떤 의미로는 언제나 동일하다. 일상적이며, 또한 영원하다. 56-7.

 

* 이러한 방황의 능력, 그것은 힘이다. 이 방황의 능력은 고유한 것, 재확인, 재산권 부여의 챔피언들에게 여자를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적 질서에 비해 아무리 여자가 순종적이고 온순하다 해도 여자는 여전히 야만의 위협적인 가능성, 모든 길들여진 것의 미지의 부분으로 남아 있다.

  여자는 불가사의하다. 여자는 계산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자들은 이런 여자와 함께 셈을 해야 한다. 여자는 불가사의하다. 그렇다. 사람들은 여자가 수수께끼 같다고 비난한다. 여자가 불가사의하기에 항상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 데서 기쁨을 이끌어 내면서도 말이다.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하다. 여자는 그 점에 대해 오랫동안 불안해해 왔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리고 자신을 알지 못함에 대해 죄의식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여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앎’과 ‘통제’이기 때문이다. -정돈된 것으로서-앎, 제어로서의 앎, 억압, 장악, 체포, 소환, 지역화 위에 확립된 (앎의) ‘통제’이기 때문이다. 111.

 

* 그녀(클레오파트라)는 유일한 여자, 그 어떤 남자보다 더 위대한 여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름다움일 뿐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삶을 만들고, 사랑하며, 몰두하는 무한한 지성이기 때문이다. 창안해 내고, 창조하며, 하나의 감동에서 1만 가지 아름다움의 형태를 이끌어 내고, 하나의 기쁨에서 1천 가지 유희를 이끌어 내며, 하나의 고통에서 무한한 열정의 증대를 이끌어 내는 데 골몰하는 무한한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삶이다. 여성이 된 삶이다. 그녀는 예술이 된 여성이다. 안토니우스와 함께한 그녀의 역사 한순간 한순간은 불타오르도록 창조되었고, 동시에 그렇게 체험되었다. 또한 그 순간들은 즉각적으로 끊임없는 긴장들, 변화들, 오락들로 복수화되었다. 또한 이는 사랑이 무한에 대한 욕수를 무한이 새길 수 있는 수천의 장면들을 열고, 반향한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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