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상실에 대한 153일의 사유
량원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흐름출판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홍콩 작가이다. 낯선 이름이라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제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 소개를 보니 홍콩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치유에 관한 글인가 싶어 슬쩍 들춰봤는데 콘래드와 에드워드 호퍼가 언급된다. 음, 관심이 가는군. 이 책은 153일 동안 작가가 사랑의 상실에 관해 매일매일 쓴 일기체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다. 원래는 신문의 칼럼에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적혀있다. 작가의 사적인 목소리이기에 글들은 무겁지 않다. 어느 쪽을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읽다보면 작가의 개인사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나 의문이 드는 부분도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작가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의 사적 이야기도 무척 관심을 갖고 읽었을 것 같다. 무더운 여름 가만히 앉아 한가로이 읽기에 좋다.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면서 말이다.

 

*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분류할 수 없는, 심지어 이상형에서 벗어나는 그 특성으로 강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사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놀라운 순수함이다. 순수함은 뜻밖에,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어떤 유형으로도 분류하지 못한다. 언어는 항상 뭔가를 분류하기 때문이다. 문자 언어에 색을 입힐 수 없듯이, 아토포스(분류되지 않는 것)는 이처럼 분류될 수 없는 순수함이다. 20.

 

*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듯이 작품의 고독은 가장 근본적인 고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중단, 나와 언어가 하나로 결합된 연계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에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언어가 자신을 표현해주리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작품은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어떤 것도 소통하지 않는다. 병속에 담긴 편지처럼 완성되는 그 순간 작자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독자들과의 관계도 단절된다. 존재하는 동시에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97.

 

* 덕분에 그(헨리 제임스)는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사랑도 좋아한다.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만 가장 깊이 고독을 만날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루지 말아야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혼자 살면 진정한 고독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자신의 작은 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부터 고독은 더 완전하고 아름다워진다. 132.

 

* 전화도 없고 이메일도 없고 휴대전화는 더더욱 없던 시대에 우리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통해 시공의 광활함을 느꼈다. 시공의 거리와 예측 불가능성이 전부 한 통의 편지에 체현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가 이미 날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를 쓴 후에, 또는 편지를 부치는 그 순간에, 그것도 아니면 편지가 바다를 건너 내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이미 날 미워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도 한순간에 사라지는데 사람의 감정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편지를 읽는 그 순간에 그의 감정이 어떤 상태로 변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네가 밉다”라는 문구를 읽을 때 나는 그가 지금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나를 미워했던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편지는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우편배달부가 필요하던 시대에 우리는 편지를 읽으면서 적어도 잠재의식 속에서 이 점을 고려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변화가 열독의 배경이자 맥락이 되었다.

  편지를 읽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기도 했다. 편지에 있는 모든 문자와 부호의 의미가 시간과 공간의 거리 안을 떠돌고, 우리는 이를 읽으면서 발신자가 이 편지를 쓰는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문자들이 드러내는 감정을 발신자는 여전히 견지하고 있을까. 심지어 아직 살아있을까.

  만일 내가 답장을 한다면, 내가 그 순간의 생각과 느낌을 사실대로 기술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과거에 남긴 것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그가 내 답장을 받으면 그가 읽게 되는 것 역시 과거의 메아리일 뿐이다. 이처럼 편지란 일종의 지연이자 돌아봄이다. 편지는 영원히 우리 두 사람의 ‘현재’를 따라잡지 못한다. 우리가 편지에서 읽는 현재는 전부 과거일 수밖에 없다. 328-9

 

*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라는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30초 후에 “하지만 나는 성실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고 회신을 보냈다. 약 5초 뒤엔 그는 나의 회신을 읽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직접 전화로 했다면 우리는 35초를 절약하고 거의 실시간으로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시간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보행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철도로, 철도에서 비행기로 변천해오면서 우리는 공간을 암축했고, 이제 세상에는 ‘너무 멀리 떨어지 구석’이 없어졌다. 모든 위치가 사실은 동일한 위치인 셈이다. 기술이 모든 공간을 압축해버렸듯이 시간도 각종 기술과 기기에 의해 압축되었다.

  시간의 암축이란 교통과 통신에 필요한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과거 중국에서 미국으로 편지를 보내려면 일주일이 걸렸지만 지금은 5초면 해결된다. 이러한 시간의 암축은 생활 전체의 시제를 변화시킨다. 과거가 없어지고 현재만 남는다.

  과거에 편지를 한 통 읽는 것은 두 개의 시간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시간점과 편지를 읽는 순간의 시간점이다. 한 통의 편지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횡단한다. 하지만 실시시간 통신 기술이 시간의 간격을 소멸시켜버렸다. 심지어 시간대의 틀을 허물어버렸다. 프랑스의 기술 사상가 파울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 이런 사회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는 사회다. 공간의 외연도 없고 시간의 확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쪽과 저쪽이 밀집된 상태로 모든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사회나. 다시 말해서 전자 전송의 과정에서 세계 전체가 드러나는 사회다.”

  사랑은 원래 일종의 시간 현상이고 연애편지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징이다. 시간의 확장이 소멸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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