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의 개정판. 김훈 산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사 칼럼이다. 김훈 작가의 산문은 살아있다. 담백하다. 군더더기 말이 하나도 없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표현되어 있다. 신기하다. 그의 산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감사히 읽을 뿐.

 

#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20

 

# 단언하건대, 배가 고파서 미군의 초콜릿을 얻어먹은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버린 닭다리로 UN죽을 끓여먹은 것도 치욕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불가피한 생명현상이다. 초콜릿이 던져지는 방향으로 몰리던 배고픈 아이들의 민첩한 동작은 생명의 발랄한 힘인 것이다. 이만한 자의식을 회복하기에도 세월이 필요했다. 23

 

# 여자의 몸에 대한 이 사회의 미의식은 날씬한 여자를 우대하고 숭배하며, 뚱뚱한 여자를 모멸하고 혐오한다. 이 혐오감은 이미 미의식을 넘어서서, 사회적 폭력에 가깝다. 그것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도 뚱뚱한 여자를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은 사물화되어 간다. 이 사물화의 목표는 ‘잘빠진 여자’이다. 43

 

# 심하다, 이 난장판이여. 심하다, 이 무지함이여. 우리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처럼 삶의 기율과 법도를 모조리 부수워버리고 권위와 경건성에 먹칠을 하고, 삶의 외양을 이토록 쓰레기통처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아야만 하는 것인가. 대학 졸업생들이 식장을 비워놓고 기어이 핫도그를 먹어야 하는가. 55

 

# 이 판국에 술이 약해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드는 신문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는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89-90

 

# 오징어와 뻥튀기는 길 막힘의 식품이다. 막히는 길 위에서는 시간이 막힌다. 시간은 길바닥 위에서 죽어가고, 오징어나 뻥튀기를 씹는 사람들 입 속에서 죽어간다. 오도가도 못하는 차 안에서 오징어나 뻥튀기를 씹는 사람들의 입놀림은 수족관에 갇힌 붕어들의 입질과 닮아 있다. 168-69

 

#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177

 

#.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치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돈과 밥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시 흥부의 박이다. 246

 

# 수박은 속이 빨간데, 자두는 껍질이 빨갛다.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서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박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풀의 향기다. 풀의 향기가 수분에 풀려서 넓게 퍼진다. 자두의 향기는 전혀 다르다. 자두의 향기는 육향에 가깝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이 통채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은 여름의 즐거움이다. 248

 

# 화장을 할 때,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무섭게 집중한다. 여자들이 얼굴에 그려넣고 싶은 것은 존재의 개별성과 개별화된 존재의 자유일 것이다. 여기까지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자들의 그 개별성과 자유를 거느리고 섹스어필까지 가야 한다. 어려운 대목이다.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 나오면 여자들의 개별성과 자유는 억압의 세련된 형식으로 변한다.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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