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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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원서 The writing of the disaster 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몇 장 읽자마자 카오스에 빠져 번역본을 펼쳤다. 그러나 분명 한국어로 되어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블량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박준상 교수의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라는 책을 읽었음에서 불구하고, 여전히 블량쇼의 사상은 어렵다. 철학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인문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글을 볼 때마다 우울하다. 철학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 공감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야 되는데 말이다.

   이 책은 단상 형식으로 쓰여 있고, 그 사유는 매우 압축적이고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번역하신 박준상 교수도 이 책은 어찌보면 ‘흩뿌려져’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블량쇼는 자신이 다루었던 주제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명확히 밝히면서 마치 일기를 쓰듯이 하루에 일정 분량을 쓴 것이며, 자신의 이전 글쓰기들을 충실히 따라왔고, 그것들에 익숙한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아직 독자가 될 수 없다. 블량쇼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니.

 

   옮긴이 해제에서 옮긴이는, 가장 중요해 보이는 하나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원초적 장면?’이라는 제목하에 세번에 걸쳐 무대화된다. 이것은 세르주 르클레르의 중요한 저작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와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르클레르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 나타난 친부살해의 공포가 정신분석학에서 끊임없이 되돌아가 보아야 할 중요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게 부각되어 온 반면, 오이디푸스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기 이전 유아 시절에 살해당할 위기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과, 신이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음을 의문과 함께 강조한다. 우리 무의식 안에는 결코 완전히 죽어서 사라지지 않은 채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대표 표상이 있다. 우리 각자는 그 어린아이를 그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살해해 나가야만 하는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신 안에 갇혀 사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타인들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고, 동물이나 그야말로 ‘아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주 르클레르에 의하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가는 것과,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 또는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은 정확히 같다. 어린아이에 대한 지속적인 살해 행위에서 무기는 칼이나 총이 아니고 언어이다. 따라서 무한하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어야만, 무한하게 언어를 유통시키려는 시도를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데 언어의 무한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죽은 채로, 언제나 이미 죽은 채로 다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언어도 자연으로 승격되어 자연을 대치할 수 없으며 존재와 우리의 삶이 어떠한 언어, 담론으로도 수렴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 어떠한 언어, 담론도, 설사 무한이라는 지점에 이른다 할지라도, 찢긴 존재로서의 아픈 인간을 치료할 수 없고, 인간 안의 찢긴 틈과 뚫린 구멍을 메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죽음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완료되어 버린 남의 이야기가 에피소드가 전혀 아니고 하나의 신화도 아니며, 바로 ‘내’가 삶 가운데에서-또한 타자와의 관계에서-살아가면서, 삶에 묶여 있는 한에서 반복해야만 하는 죽음이다. ‘나’는 어차피 말 못하는 자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그를 대신해서 말하기, 떠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말할 줄 아는 자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내로 진입했으며, 거기서 살아가기 시작했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 사회적 삶이, 간단히, 삶 그 자체가 흔들리고 위태로워지고 나아가 파탄에 이를 때, 입이 틀어막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과연 ‘말하는가’-시작한다. 즉 침묵을 침묵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침묵의 현전으로서의 말, 모든 말의 원천으로서의 침묵, 모든 말의 근거를 되묻는 말, 이번에는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죽어 있었던,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규 또는 죽은 자연의 침묵, 죽은 자연이 또다시 빠져 들어가는 침묵, 침묵의 침묵, 침묵으로 또다시 열리는 침묵.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 그러나 그들이 물론 실제로 한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아니며, 언어가 모든 사회적인 것을 규정하고-의식적이자 사회적인 모든 동일화를 가능하게 만들고-있다고 본다면, 바로 언어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개’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처럼, 가령 ‘내’가 눈앞에서 여기 지금 꼬리치면서 짖고 있는 새까만 작은 이 개를 ‘개’라고 부르자마자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 개를 즉시 ‘일반적인 개’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즉시 변형시킨다. 바로 여기 지금 생생하게 나타나는 단수적인 감각적, 구체적 존재자를 어떠한 구체적인 시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하나의 관념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그것이 ‘언어가 살해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모든 언어의 작동원리인 부정성이 폭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내’가 이 개를 ‘개’라고 부르는 것조차 사실상 폭력인데,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하면서 이 개가 차지하고 있는, 여기 지금이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공간, 시간을 이 개로부터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르시스, 즉 그 어린아이가 바로 ‘내’ 안에 뚫린 구멍이고, ‘나’와 ‘나 자신’의 동일성을 항구적인 것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나’의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타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유아는 우리 모두 안에 파여있는 심연이다. 왜냐하면 그 유아는 우리의 모든 의식적, 사회적 자아들이 존재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가장 먼, 절대적 수동의 과거로부터 우리 모두의 공동 영역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유아는 기억될 수 없는 가장 먼 과거에 우리 모두 안에 남은 결핍된 존재, 결핍으로서의 비존재일 것이다. 우리를 가장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찢긴 존재로 예정해 놓은 자, 우리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존재로 미리 규정해 놓은 자, 우리에게 책임이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책임져야 할 ‘망각된 불행’을 애초부터 가져온 자, 그 불행을 우리 모두의 탄생 이전의 태고의 죽음을 견뎌내는 것을 블랑쇼는 ‘참을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신 안에 뚫려 있는 구멍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공동의 틈새)임을, 우리 공동의 타자임을, 인간 스스로가 비존재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타인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되고 타인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타인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타인을 책임진다 할지라도 그 공동의 구멍은 매워지지 않으며, ‘나’는 또 다시 찢긴 존재로 예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예외없이 찢겨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그러나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이다. 소통이 어떠한 고정되어 결정된 지점에서도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 소통의 확고한 토대의 부재, 그러나 그에 따르는 소통의 역동성, 소통의 무한성, 아마 그것을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했을 것이다.

 

# 읽는다는 것의 고뇌, 즉 모든 텍스트가,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즐거움을 주고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또는 그러한 인상을 줄수록) 비어 있다는 것-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심연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37

 

# 너는 속속들이 작가인가, 말하자면 너의 모든 점에서 너 자체가 살아있고 역동적인 글쓰기인가? 작가에게 던져진 이러한 물음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그것은 즉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거나 그의 장례식에서 바보같은 찬사를 보내는 격이 될 것이다. 116

 

# 수용소, 전멸의 수용소,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드러나 있었던 형상들. 한 문명의 특성들이 밝혀지거나 벌거벗겨진 채로 드러났다(“노동은 해방을 가져다준다‘, ’노동을 통해 복권하자‘). 노동을 노동자에게 힘을 가져다주는 물질적 움직임이라고 분명히 찬양하는 사회에서, 노동은, 개발도 잉여가치도 문제가 될 수 없는 극단의 징벌이, 모든 가치가 파괴되는 한계가 된다. 또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할 수 있는 힘을 재충전하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지도 못하는데, 노동이 더 이상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고 죽어가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노동, 죽음, 그것들은 같게 된다. 어디에서나, 모든 순간에 노동한다. 억악이 절대적일 때, 더 이상 여가가, ’자유 시간‘이 없다. 잠도 감시 속에 놓여 있다. 이제 노동의 의미는,노동을 통해서, 노동하는 가운데 파괴되는 데에 있다.....145-46

 

# “낙관주의자들은 글을 잘 못쓴다”(발레리). 그러나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 “들으십시오. 귀를 기울이십시오.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책들, 중요한 책들이 죽어가면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습니다”(르네 샤르).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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