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예술 현대의 문학 이론 34
피터 브룩스 지음, 이봉지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봐도 읽고 싶어지는 책. 육체를 주로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친 문학과 서양 미술의 예를 들며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고 있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소개된 책을 당장이라도 사서 읽고 싶어진다. 저자는 육체 위에 쓰여진 이야기, 텍스트에 담겨 있는 욕망의 대상들을 차근차근 분석해간다. 이 때 많은 부분이 정신분석에 의거하고 있고, 그러기에 프로이트, 라캉 같은 인물들의 이론을 지지한다. 저자는 육체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성적인 측면(성적 존재로서의 자아개념)이라고 말한다.

    5장에 나온 에밀졸라의 『나나』(어서 읽어봐야겠다)와 6장의 고갱과 타이티 여인의 육체에 관한 글(고갱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읽는 듯한)들이 특히 재밌었다. 나체에 관한 그림들에 대한 자세한 배경과 설명도 멋지다. 이렇게 풍부한 내용이 담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다. 초반에는 살짝 지겨움을 참아야 했지만(책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에) 2장 루소의 『고백론』과 관련된 글이 시작되면서부터는(고백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은 재밌구나. 책에 소개된 문학 작품들만 다 읽어도 일 년이 걸릴 듯 싶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읽어 왔던 것인가. 요즘 소설 이외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수많은 책에서 벤야민, 톨스토이, 라깡, 플로베르에 관한 글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 근대 서사 문학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인공은 육체를 욕망하고, 또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주인공에게 있어 육체는 궁극적인 선이 된다. 책읽기의 경우, 육체와 육체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텍스트의 상징적 체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즉 지식, 쾌락, 의미 창조의 열쇠가 된다. 말하자면 육체에 대한 욕망은 텍스트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이야기와 서술의 내재적 원동력으로서의 서사적 욕망은 육체에 대한 지식과 소유를 추구한다. 서사물은 그러한 육체를 기호화하려고 한다. 즉 언어적, 서술적 기호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35

 

# 물론 응시는 매우 남근 숭배적이다. 왜냐하면 서양문학(그리고 철학과 예술) 전통은 주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것을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37

 

# 우리는 혼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설을 읽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소설의 경우 많은 부수가 인쇄되고, 또한 책을 입수한 경위야 어떻든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책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적 소비는 현대 출판 제도에 의해 책이 대중적으로 유통됨으로써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대두라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역설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독서의 사적 소비를 가능케 한 소설 장르는 역설적이게도 제작과 배포 과정에 있어 당시 태동기에 있던 자본주의에 의해 도입된 대량 생산, 복제, 유통 제도를 통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적 경험으로서의 책읽기에 대응되어 나타난 것이 사적인 글쓰기였다. 이처럼 사적으로 글을 쓸 경우 작가는 이야기꾼, 음유 시인, 극작가들과 달리 청중들로부터 아무런 즉각적 반응도 얻을 수 없다. 인류학자,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쓸 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그러나 글쓰기, 그중에도 특히 인쇄에 의해 복제된 글쓰기는 작가에게서 떨어져나와 결국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율적 담론’을 창조하게 되었다. 소설의 독자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실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직접 독자에게 확인할 수가 없게 되어 문맥 없는 담론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적 생활이란 한편으로는 고립을 뜻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 점을 “소설 독자는....다른 어떤 독자들보다도 고립되어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고독하고 고림된 독서인 까닭에 소설 읽기는 문학적인 경험 중 가장 내밀한 것이 된다. 또한 배우나 이야기꾼이라는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소설의 독자는 등장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 74

 

# 미덕의 공화국(프랑스)에서 여성이 공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의 미덕은 가정적, 사적인 것이었고 여성은 결코 나서서 설쳐대지 말아야 했다. 우트람이 지적하였듯이 “남성들이 군중 앞에 나서면 정치가가 되지만 여성들이 군중 앞에 나서면 창녀 취급을 받았다.” 126

 

# “모든 광신자들이 그렇듯 코랄리도 자기 우상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그녀의 시인에게 우아한 남자가 갖추어야 할 우아한 옷차림에 어울릴 소품을 사주느라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발자크 『고급 매춘부의 영화와 비참』중. 143.

 

# 이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남근적 자국 자신과 자기 육체를 완전히 주려는 욕망, 즉 남성의 욕망에 자신을 노예처럼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여성의 심리와 일치한다. 156.

 

# 바르트는 특히 『텍스트의 쾌락』에서 서술적 드러냄이 내포하고 있는 물신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우리 육체 중에서 가장 에로틱한 부분은 바론 ‘옷 사이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겠는가?” 210.

 

# 완전한 지식은 탐구자를 눈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화 속의 극단적인 보기일 뿐이다. 실제 현실에 있어 우리는 결코 완전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가 아닌 부분만으로, 또한 몇몇 계시적 순간들과 옷을 벗는 순간들, 그리고 베일 사이로 보이는 틈새만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245.

 

# 『에로티시즘』을 쓴 조르주 바타유에게 있어 에로틱함이란 본래 터부와 제한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인간은 원래 ‘단절된’ 존재, 즉 타인들의 육체가 그들에게 닫혀 있기 때문에 타인과 깊이 교제할 수 없는 유한하고 폐쇄적인 존재이다. 에로틱한 만남을 할 때 순간적이나마 단절과 유한성이 깨진다. 5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