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에서의 실험 동문선 현대신서 103
C.S. 루이스 지음, 허종 옮김 / 동문선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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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 가서 어떤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 책 옆에 C.S.루이스 작가의 책이 있길래 제목도 보지 않고 얼른 가져왔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책을 모조리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읽어야 할 책의 분량이 점점 늘어나 감당이 안되긴 하지만. 지금까지 루이스의 책은 <순전한 기독교>와 또 한권의 책(제목을 까먹었다) 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두 권만으로도 얼마나 글이 깊이가 있는지 쓰는지 느낄 수 있다. 기독교 관련 도서를 많이 쓰기는 하나, 아동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나니아 연대기>. 극과 극의 글쓰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놀랍다.

   <문학 비평에서의 실험>은 딱딱한 제목에 비해 무척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적인 사람들의 독서와 비문학적인 사람들의 독서 방법을 비교하는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비평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또 소수와 다수가 그림과 음악을 보고 듣는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부분도 공감이 간다, 읽는 내내, 맞다, 맞아, 그렇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완고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곱씹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 이 책은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와 준 우리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책에 별을 클릭하여 평점을 매기는 것이 더 싫어졌다...

 

# 그들에게 한번 읽은 책은 죽은 것이다. 마치 다 타버린 성냥이나 날짜가 지난 기차표나 어제 신문처럼 말이다. 그들은 이미 그 책을 사용해 버렸던 것이다. 반면 명작을 읽는 사람들은 같은 책을 일생동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도 넘게 읽을 것이다.

 

# 비문학적인 청취자들이 오로지 선율만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문학적인 사람은 오로지 사건만을 원한다. 비음악적인 사람은 오케스트라가 실제로 만들어내고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무시한다. 그는 선율만을 따라서 흥얼거린다. 비문학적인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거의 모든 단어를 무시한다. 그는 다음에 일어날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을 알고 싶어한다.

 

#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의 매력이 오로지 이기적인 성 쌓기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성공 스토리, 특정한 러브 스토리, 그리고 특정한 상류 사회의 이야기가 그런 것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최하층 계급의 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독서 유형이다. 왜냐하면 독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최소한 벗어나도록, 이미 그들이 빈번히 사용한 탐닉 속에서 자신들을 확신하도록, 그리고 책과 인생 두 가지 모두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부터 외면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정직한 시험관과 같아서, 그가 의견을 달리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그런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조직적이고 설득력 있는 시험지에 최고의 점수를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시험관 같은 사람이다.

 

#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는 작품을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독서하는 동안 판단을 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작품의 완전한 수용은 점차 더 실패하게 된다.

 

# 고금을 막론하고 극소수와 모든 여성, 특히 나이 든 여성들은 엘라 휠러 월콕스나 파티언스 스트롱의 운문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시는 언제나 격언적인, 따라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인생에 관한 논평이다.

 

# 하지만 나는 운율의 훈련 없이도 자유시를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걷기도 전에 달리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 이런 의미에서 ‘취향’은 주로 연대기적인 현상이다. 여러분의 출생 연도를 나에게 말해보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이 홉킨스 또는 하우스먼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토머스 하디 혹은 로렌스를 선호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다. (생략) 내 취향에 관해 여러분이 말한 모든 것은 정말로 낡은 유행이 고작이다. 여러분의 취향 또한 얼마 못 가 낡은 유행이 될 것이다.

 

# 이와 유사하게 그가 좋아하는 책이 계속 나쁜 것처럼 보여서, 우리는 그의 취미를 어린 시절의 연상이나 다른 심리적인 사건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확실하게 남아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언제나 그런 책 안에도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비평가들의 신랄함은 빛을 희생한 대가로 얻은 열기이다. 그들은 좋은 독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의 취향을 수선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그 사람의 현재 취향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이들 불침번학파에게 비평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위생학의 형태가 된다. 그들은 모든 분명한 사고와 실재의 모든 의미와 인생의 아름다움들이 광고와 건전과 영화와 텔레비전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디어의 주인들은 ‘먹이를 찾아 배회하면서 주위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활자화된 단어 위를 가장 위험스럽게 배회하고 있다. (중략) 이와 같은 독약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의 불침번학파들은 우리의 충실한 경비원이자 탐정이다. (중략) “내가 복음을 전도하지 않으면 나에게 재난 있을진저”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울처럼, 그들은 내가 천박함과 표피성과 그릇된 감상과 그들이 무엇을 감추었든지간에 그것을 찾아내 폭로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재앙이 있을진저라고 말이다.

(중략) 인생의 불침번 철학이 잘못된 것으로 마침내 드러난다 하더라도, 불침번 비평이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결합하는 많은 행복을 이미 방해해 왔음에 틀림없다.

 

#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우등생의 페이퍼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책이라는 안경을 통해 책을 통독하는 것이 증가하는 추세임을 우울하게 주목해 왔다. 모든 희곡, 시, 소설에 관해 그들은 유명한 비평가의 견해를 반복한다. 초서와 셰익스피어 비평에 관한 놀랄 만한 지식이 초서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대단히 부적절한 지식과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개인적인 반응과 만날 기회가 없어지고 있다. (중략) 그와 같은 비평의 폭식은 이험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치료가 요구된다.

 

# 문학 예술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 문학 에술은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말해진 어떤 것)임과 동시에 시학(만들어진 어떤 것)이다.

 

# 문학적인 경험은 특권이나 개별성을 훼손시키지 않고도 상처를 치유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대한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특권을 파괴한다. 그런 감정들 속에서 우리의 분리된 자아들은 고여 있게 되고, 우리는 개별성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하지만 위대한 문학을 읽을 때, 나는 수천의 자아를 가지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시에서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는 무수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자는 여전히 바로 나 자신이다. 참배 속에서, 사랑 속에서, 윤리적인 행위 속에서, 앎 속에서처럼 바로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한다. 그리고 나는 이때처럼 더 이상 나 자신이 된 적이 없다.

 

# Festina lente '신속하게, 그러나 서두르지는 말고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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