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장아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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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가 비명을 터뜨렸다.
"왜 하필 곤줄박이야!" -24p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이다. 사람과 사람 사는 동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글이라,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까지 미소를 머금은 채 읽었다.

이야기는 굉장히 빠르게, 그리고 허무맹랑하게 시작한다. 소녀, 희미는 동네의 오래된 신목에 짝사랑 하는 상대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러 간다. 하지만 순간의 질투 때문에 소원은 말 그대로 '삐끗'하게 되고, 소원은 짝사랑 상대인 준후와 희미를 이어주기는커녕 준후를 웬 작은 새 한 마리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왜?'를 물을 수도 있겠지만 희미는 '왜?'를 묻지 않는다. 희미와 함께 사건을 목격한 민진과 새별 역시 '왜?'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갑자기 조별과제 조원으로 강제로 묶인 사람들처럼 삐걱거리며, 하지만 최선을 다해 준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에 집중한다.

오래된 한옥과 우물, 신목, 조왕신 같은 아주 낡고 오래된 전통적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낡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막 개발이 되기 시작한 신도시를 배경으로, 즉석사진, 와플에 젤라또, 인스타 같은 현대적인 요소들이 한데 모여 마법 같이 잘 어우러진다.
신시가지에 살지만 도저히 그 집을 자신의 집이라 느끼지 못하는 민진, 동네가 점점 세련되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양옥도 아닌 한옥에 살고 있는 목수의 딸 희미, 그리고 그런 모든 도시를 너무나 사랑하는 새별. 소설은 이 세 소녀가 도시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분투하는 모습을 사랑스럽지만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분당 옆 구시가지(사실은 분당이 성남시 '분당구'인 것이지만 오래 살던 사람들은 분당을 그냥 분당, 그리고 분당이 아닌 성남을 '구시가지'라고 불렀다. 요즘은 다들 이런 표현을 최대한 삼가는 것 같다)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나에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시가지'라는 호칭과 변화해가는 도시의 풍경은 결코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내 중학교 하교길은 언제나 재개발 이슈와 관련된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소음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실제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떠난 빈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적막으로 바뀌었다. 마치 게임에서 채널을 바꾼 것처럼 길 하나만 건너면 풍경이 변하는 동네. 곧 헐릴 예정이라 깨진 창문도 무너진 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 동네. 그런 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없어도 될 예민한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기억해야 할 게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니까.
이 소설은 말하자면, 지금 한국 여기저기에 생겨나고 있는 그런 신도시, 신시가지에 대한 애정의 기록이기도 한 셈이다.

준후는 결국 이들의 힘으로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재미있게도 결말에서 사랑의 행방은 쏙 빠져있다. 준후는 부외자로 밀려나고, 오히려 이야기 내내 서로 결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던 희미와 민진, 새별은 은근한 단짝친구가 되어 있다. 일종의 전우애라고 하면 조금 우스울까? 그들은 같이 도시의 땅을 밟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냄새를 공유한 사이가 됐다. 변화해가는 도시를 기억하는 유일한 공범자가 된 셈이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맺어지는 것이 완결성도 있고 아름답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세 명이 함께 보내는 2학년 생활이 보고싶다는 욕심도 조금 들었다...

말은, 언어는 힘을 가진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사랑과 다정을 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소설이다. 고등학생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성장소설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희미가 비명을 터뜨렸다.
"왜 하필 곤줄박이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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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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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
인간은 언어야.
살아 있는 모든 건 언어야.
우리는 전체의 부분이고 언어는 세계의 파편이야.
우리는 언어야. -338p

인간과 비인간의 소통은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어느 나라의 언어? 아니, 어쩌면 언어가 아니라 행동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면, 언어란 대체 무엇일까?

인간과 비인간의 소통을 목표 하는 프로그램 커뮤니케이터의 개발자 조성원 박사는 울성에서 고래연구에 몰두중인 유코 박사의 권유로 그녀가 연구관찰 중인 고래 '이드'를 대상으로 커뮤니케이터의 실용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더디지만 조금씩 연구를 해나가던 그들은 오래지 않아 이드에게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인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줄거리만 봤을 땐 이 과학자들이 고래와 소통하는 소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지만.... 그 인간 친구의 정체가 티베트에 살고있는 한 어린 소녀라는 사실은 의외로 이야기 초반에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등장한다. 그 때 직감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내가 짐작하는 방향으로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혹은 네 가지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
   울성 바다에서 이드를 관찰하며 연구하는 성원과 유코, 퍼시.
   세계 곳곳에서 부조리함을 파헤치는 NGO단체 사계(포시즌)의 활동가들, 현지와 쿠날과 동섭.
   그런 사계의 새로운 활동지인 티베트에 살고있는 소녀, 돌마.
   그리고 고래를 사냥하고자 하는 울성의 토박이 어부, 석기와 원구.

이들은 각자의 관계에 따라 서로 합쳐졌다 나뉘어졌다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사방에 감시의 눈이 깔려있는 티베트 현지의 상황, 언제고 이드를 사냥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석구와 원구. 이런 외부의 위협 때문에 이야기는 예상 외로 꽤나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스펙타클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독자에게 그런 서사적인 쾌감을 주기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상실, 소통, 이해, 사랑과 치유 같은... 진부하다면 진부할 무형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그런 이야기이다.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는 장비를 두고 단호하게 그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서로가 원할 때, 마음의 연결이 필요한 것이라는(사실은 그것조차 커뮤니케이터를 빌려 이해하게 된 단어 파편의 모음이지만) 이드의 말은, 어쩌면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수도 있겠다. 마치 승희가 성원에게 남긴 마지막 문장처럼.

소재가 고래라는 이유로 서평을 신청하여 받은 도서인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선한 얼굴을 한 바다 아래 고래로 태어난 신이 잠들어 있다는 문장이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누구
성원은 손가락 끝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너는 누구인가. 고래가 묻고 있었다. 되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러는 너는 대체 누구인가.
성원은 다음 문장을 준비했다. - P270

하지만 이제 넌 돌마가 아니라도 사람과 얘기할 수 있어. 지금처럼 장치를 쓰면 돼.
그것. 가짜.
가짜?
진짜. 마음. 연결. 필요. 서로. 원하다. 시기. - P296

기억해.
인간은 언어야.
살아 있는 모든 건 언어야.
우리는 전체의 부분이고 언어는 세계의 파편이야.
우리는 언어야. - P338

이드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성에 쨍한 해가 떴다. 잔잔한 파도 위로 태양으로 만든 꽃잎이 부딪혀 깨지는 듯했다. 조사단은 부두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다를 봤다. 선한 얼굴을 한 바다 아래 고래로 태어난 신이 잠들어 있었다. - P359

"이건 그냥 물이야 선배. 바다를 나눈 건 사람이고. 파도에는 이름이 없어."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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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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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명심하렴, 우리 세이디. 인생은 아주 길어, 짧지만 않으면." 세이디는 그 말이 동어반복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진실이었다.

사실...아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면 제목에 흥미를 느껴 집어들었다가 줄거리 소개를 보고 다시 내려놨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창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질리도록 읽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다가, 이야기가 재밌거나 지루하거나 양극단이 너무 심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단을 신청한 것은 이게 개브리얼 제빈의 신작이기 때문이다ㅎㅎㅎ 너무 속보이나? 하지만 믿고 보는 작가인 걸요……. 「섬에 있는 서점」에서 느꼈던, 침착하고 잔잔한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드라이하면서도 시니컬한 문장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서도 그 재치와 센스는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소설도 사건 위주로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밋밋하기 그지없다. 한 때 게임이라는 공통분모로 우정을 다지다가 잠시 멀어졌던 소년과 소녀가 우연히 대학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함께 게임을 만든다. 그들이 또다른 친구 마크스와 함께 게임 회사를 차리고,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망하기도 했다가 대박이 나기도 했다가, 싸웠다가 멀어졌다 화해하고 사랑하는 이야기. 그게 이 소설의 전부다. 거대한 사건도, 범죄도, 두근거리는 액션도 없는, 나쁘게 말하자면 밋밋한 사건의 연속. 그럼에도 불구하도 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들고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리게 만드는 건 작가가 가진, 언어를 마음대로 다루는 놀라운 능력 때문일 것이다.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도 안 가는 전개로 서두를 연 이야기는 지하철역에서 샘이 세이디를 발견하게 되는 장면쯤 되어서야 비로소 윤곽이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재회장면은 일견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그저 놀라움과 반가움 같은 우호적인 감정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이는 재회장면이지만, 사실 그들의 우정은 거리가 멀어진다든가, 사춘기라든가 하는 평범한 이유로 서서히 옅어진 게 아니라 꽤 심각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는 것이 이후 드러난다.

어린 샘과 세이디의 우정이 단절됐던 것은 세이디가 샘과 놀며 아무 생각 없이 받은 봉사활동 시간기록지 때문이었다. 세이디는 그것이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우정의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샘은 동정과 연민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절된 우정은 그들이 처음 말을 트게 만들어주었던 게임 덕분에 결국은 봉합된다. 세이디는 당시 샘과 보낸 시간의 기록 증빙으로 받은 크리스탈 상패를 샘에게 주며 이것이 수치화할수 있는 우정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우정, 사랑, 믿음, 이런 무형적인 가치는 결코 수치로 증빙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확하게 재어진 수치만이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샘과 세이디는 그 '가끔 어떤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넌 어떻게 그걸 모르니? 연인은……흔해빠졌어.” 세이디는 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랑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도 괜찮았지만, 그보다는 너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인생에서 합이 딱 맞는 협업 파트너는 아주 희귀하니까.” - 629p
물론 그들이 교과서적인 우정만을 다진 것은 아니다. 읽다보면 아마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되겠지만……샘은 세이디를 사랑한다. 사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샘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세이디나 마크스, 그리고 그 외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수많은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한 마디를 그는 아주 신중하게 마음에 품고만 있다.
세이디는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마크스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고, 샘은 고백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친구로 남는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냥 우정보다 더 나쁠 수도 있지만…글쎄,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들이 입 밖으로 내어 말한 다짐만이 진실하다.
"약속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말도 안 하고 6년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넌 나를 무조건 용서하는 거야. 나도 너를 무조건 용서하겠다고 약속할게." 이것은 물론, 생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쟁여놨는지 쥐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함부로 맺는 서약의 일종이다. -103p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540p
소설 속에서조차 샘과 세이디에게 핀잔만 듣고 폐기된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라는 아이디어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마크스의 그 말이 그들의 삶을,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단어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천재'라고 부를 만한 샘과 세이디지만 그들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샘은 동양계 혼혈이고, 불행한 사건을 목격해 삶의 터전이던 뉴욕을 떠났고, 엄마를 잃었고, 엄마를 잃은 그 사건으로 장애도 얻었고, (세이디 덕분에 나아지긴 하지만) 실어증도 얻었었다. 그에 반해 세이디는 꽤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대학 교수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충돌한다. 찬사가 쏟아졌다가 비난이 쏟아지기도 하고, 잘 될 줄 알았던 게 잘 안 되기도 하고, 호의로 시작한 일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며 일시정지 버튼 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계속 움직이도록 하는 원동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사랑하는 게임이 가지는 가능성 때문이다.

혼혈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둘을 합한 것의 반쪽이라는 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얘기라고. 그런데 나는 유대 것이든 한국 것이든 별로 아는 게 없고 딱히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지도 않다, 어쩌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게 돼서. -132p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오직 불타는 청춘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작가 자신이 유대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만큼 혼혈만이 느낄 수 있는 시선과 묘한 차별, 군중 속의 고독감, 이질감 등을 굉장히 날카롭게 그려냈다. 오직 이것만이 주제는 아닌데도 (오히려 주제는 젊은 친구들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힘껏 달려가는 인생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짐)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도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런 동시에 이 이야기가 결코 메인 서사를 넘어서 비중과 무게를 잡아먹지도 않는다. 샘이, 마크스가 혼혈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현실의 차별과 이질감 만큼 정확하게 존재한다. 이 탁월한 균형감은 단순히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정도를 넘어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샘이 실종된 그날 밤, 보기와 달리 인생에는 확고부동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놀이가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친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을 차단하려 애쓰긴 하겠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린 모두 기껏 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거야, 세이디는 생각했다. -231p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시선이 어떻게 게임이라는 형태로 구현되는지, 그 이후 그들의 삶은 또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문장에서 문장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야기가 독자를 매혹시키는 소설이다. 서사적으로 스펙타클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음에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영화화 제작 소식도 소개문에 슬쩍 끼어있던데 이 가슴아프면서도 따뜻한 성장 러브 스토리가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지도 몹시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서평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항상 명심하렴, 우리 세이디. 인생은 아주 길어, 짧지만 않으면." 세이디는 그 말이 동어반복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진실이었다.
- P76

"넌 어떻게 그걸 모르니? 연인은……흔해빠졌어." 세이디는 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랑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도 괜찮았지만, 그보다는 너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인생에서 합이 딱 맞는 협업 파트너는 아주 희귀하니까." - P629

"약속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말도 안 하고 6년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넌 나를 무조건 용서하는 거야. 나도 너를 무조건 용서하겠다고 약속할게." 이것은 물론, 생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쟁여놨는지 쥐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함부로 맺는 서약의 일종이다. - P103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 P540

혼혈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둘을 합한 것의 반쪽이라는 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얘기라고. 그런데 나는 유대 것이든 한국 것이든 별로 아는 게 없고 딱히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지도 않다, 어쩌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게 돼서. - P132

샘이 실종된 그날 밤, 보기와 달리 인생에는 확고부동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놀이가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친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을 차단하려 애쓰긴 하겠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린 모두 기껏 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거야, 세이디는 생각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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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일본어 회화사전 - 일상의 모든 표현을 한권으로!
미즈노 슌페이 지음 / 제이플러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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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PT 1급을 따긴 했는데 뭔가 부족한 기분이라 좀 더 깊게 독학하고 싶어서 찾아보던 와중에 좋은 도서를 알게 되어 서평 신청을 했고, 운 좋게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게 되었다.

N1 시험 공부할 당시에 일본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하루에 한 개씩 짧은 뉴스꼭지를 듣고 쉐도잉하면서 받아쓰는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 들어서 귀에 익은 문장이 보여서 반가웠다. 정말로 현실에서 쓰는 구문을 모아놨다는 느낌?!

비슷한 표현이나 관련용례 등을 체크할 수 있어 그것도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된다. 파트마다 QR코드를 찍으면 문장을 귀로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좋음!! 

완전 초보자용은 아닌 것 같고, 나처럼 일본어 공부가 어느 정도는 되어있는 상태인데 책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보다 좀 더 심화된, 현실적으로 사용되는 구문의 학습을 원한다면 잘 맞을 것 같다. 당분간은 계속 이 책으로 공부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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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이름의 숲
아밀 지음 / 허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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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눈 앞의 풍경이 현실이 아닌 시대, 모든 사람이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근미래 서울에 가상현실저항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소녀, 숲이 있다. 그러니까 숲은 말하자면 세계에서 반쯤 추방된 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숲의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 유일한 빛은 아이돌 '이채'다. 가상현실 속에 만들어진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기에 숲이 보고 듣는 이채는 반쪽짜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숲은 이채를, 이채의 노래를 좋아한다. 말 그대로 이채는 숲의 '아이돌'이다. 그런 숲에게, 이채의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에 엑스트라로 참여하는...즉 이채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아이돌로서 이채를 사랑하던 숲이 선을 넘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람은 언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말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만들어낸, 내가 사랑하고 싶은은 어떤 가공된 상상의 형태일 뿐인가? 상대가 원하는, 잘 꾸며지고 필터링된 모습이 아닌 진짜 모습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 진실된 모습을 마주했을 때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경멸하고 실망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영원히 진실을 감추고 꾸며낸 모습으로 존재해도 되는 걸까? 그걸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과 미움은 상쇄될 수 없다. 1만큼 미움받지만 10만큼 사랑받으니 괜찮은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10만큼, 100만큼, 1000만큼 사랑받아도 1만큼의 미움에 상처받는 것이 인간이다. 이채가 너는 네 머릿속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네 눈 앞에 있는 나는 경멸하는 거라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숲은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스스로도 부정해왔던 진심을 내보인다. 


『너라는 이름의 숲』은 아칸다바이러스라고 하는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대면이 최소화되고 가상현실이 일상이 된 서울을 배경으로, 무대 위의 가공된 형태로 아름답게 존재해야 하는 '아이돌'과 그런 아이돌을 사랑하는 '팬'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모든 선을 넘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칠 때 어떤 불꽃이 피어오르는지, 그리고 그 불꽃이 그다지 아름답고 귀여운 형태만은 아니라는 것까지도 솔직하게 말하는 소설이다.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 사람을 사랑하려면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쳐야한다고 말하는 소설.

간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사랑스러운 SF소설을 읽었다


#너라는이름의숲 #아밀장편소설 #동아시아 #허블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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