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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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상 명심하렴, 우리 세이디. 인생은 아주 길어, 짧지만 않으면." 세이디는 그 말이 동어반복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진실이었다.

사실...아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면 제목에 흥미를 느껴 집어들었다가 줄거리 소개를 보고 다시 내려놨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창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질리도록 읽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다가, 이야기가 재밌거나 지루하거나 양극단이 너무 심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단을 신청한 것은 이게 개브리얼 제빈의 신작이기 때문이다ㅎㅎㅎ 너무 속보이나? 하지만 믿고 보는 작가인 걸요……. 「섬에 있는 서점」에서 느꼈던, 침착하고 잔잔한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드라이하면서도 시니컬한 문장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에서도 그 재치와 센스는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소설도 사건 위주로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밋밋하기 그지없다. 한 때 게임이라는 공통분모로 우정을 다지다가 잠시 멀어졌던 소년과 소녀가 우연히 대학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함께 게임을 만든다. 그들이 또다른 친구 마크스와 함께 게임 회사를 차리고,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망하기도 했다가 대박이 나기도 했다가, 싸웠다가 멀어졌다 화해하고 사랑하는 이야기. 그게 이 소설의 전부다. 거대한 사건도, 범죄도, 두근거리는 액션도 없는, 나쁘게 말하자면 밋밋한 사건의 연속. 그럼에도 불구하도 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들고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리게 만드는 건 작가가 가진, 언어를 마음대로 다루는 놀라운 능력 때문일 것이다.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도 안 가는 전개로 서두를 연 이야기는 지하철역에서 샘이 세이디를 발견하게 되는 장면쯤 되어서야 비로소 윤곽이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재회장면은 일견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그저 놀라움과 반가움 같은 우호적인 감정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이는 재회장면이지만, 사실 그들의 우정은 거리가 멀어진다든가, 사춘기라든가 하는 평범한 이유로 서서히 옅어진 게 아니라 꽤 심각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는 것이 이후 드러난다.

어린 샘과 세이디의 우정이 단절됐던 것은 세이디가 샘과 놀며 아무 생각 없이 받은 봉사활동 시간기록지 때문이었다. 세이디는 그것이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우정의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샘은 동정과 연민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절된 우정은 그들이 처음 말을 트게 만들어주었던 게임 덕분에 결국은 봉합된다. 세이디는 당시 샘과 보낸 시간의 기록 증빙으로 받은 크리스탈 상패를 샘에게 주며 이것이 수치화할수 있는 우정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우정, 사랑, 믿음, 이런 무형적인 가치는 결코 수치로 증빙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확하게 재어진 수치만이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샘과 세이디는 그 '가끔 어떤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넌 어떻게 그걸 모르니? 연인은……흔해빠졌어.” 세이디는 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랑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도 괜찮았지만, 그보다는 너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인생에서 합이 딱 맞는 협업 파트너는 아주 희귀하니까.” - 629p
물론 그들이 교과서적인 우정만을 다진 것은 아니다. 읽다보면 아마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되겠지만……샘은 세이디를 사랑한다. 사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샘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세이디나 마크스, 그리고 그 외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수많은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한 마디를 그는 아주 신중하게 마음에 품고만 있다.
세이디는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마크스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고, 샘은 고백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친구로 남는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냥 우정보다 더 나쁠 수도 있지만…글쎄,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들이 입 밖으로 내어 말한 다짐만이 진실하다.
"약속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말도 안 하고 6년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넌 나를 무조건 용서하는 거야. 나도 너를 무조건 용서하겠다고 약속할게." 이것은 물론, 생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쟁여놨는지 쥐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함부로 맺는 서약의 일종이다. -103p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540p
소설 속에서조차 샘과 세이디에게 핀잔만 듣고 폐기된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라는 아이디어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마크스의 그 말이 그들의 삶을,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단어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천재'라고 부를 만한 샘과 세이디지만 그들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샘은 동양계 혼혈이고, 불행한 사건을 목격해 삶의 터전이던 뉴욕을 떠났고, 엄마를 잃었고, 엄마를 잃은 그 사건으로 장애도 얻었고, (세이디 덕분에 나아지긴 하지만) 실어증도 얻었었다. 그에 반해 세이디는 꽤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대학 교수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충돌한다. 찬사가 쏟아졌다가 비난이 쏟아지기도 하고, 잘 될 줄 알았던 게 잘 안 되기도 하고, 호의로 시작한 일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며 일시정지 버튼 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계속 움직이도록 하는 원동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사랑하는 게임이 가지는 가능성 때문이다.

혼혈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둘을 합한 것의 반쪽이라는 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얘기라고. 그런데 나는 유대 것이든 한국 것이든 별로 아는 게 없고 딱히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지도 않다, 어쩌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게 돼서. -132p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오직 불타는 청춘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작가 자신이 유대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만큼 혼혈만이 느낄 수 있는 시선과 묘한 차별, 군중 속의 고독감, 이질감 등을 굉장히 날카롭게 그려냈다. 오직 이것만이 주제는 아닌데도 (오히려 주제는 젊은 친구들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힘껏 달려가는 인생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짐)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도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런 동시에 이 이야기가 결코 메인 서사를 넘어서 비중과 무게를 잡아먹지도 않는다. 샘이, 마크스가 혼혈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현실의 차별과 이질감 만큼 정확하게 존재한다. 이 탁월한 균형감은 단순히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정도를 넘어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샘이 실종된 그날 밤, 보기와 달리 인생에는 확고부동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놀이가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친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을 차단하려 애쓰긴 하겠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린 모두 기껏 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거야, 세이디는 생각했다. -231p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시선이 어떻게 게임이라는 형태로 구현되는지, 그 이후 그들의 삶은 또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문장에서 문장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야기가 독자를 매혹시키는 소설이다. 서사적으로 스펙타클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음에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영화화 제작 소식도 소개문에 슬쩍 끼어있던데 이 가슴아프면서도 따뜻한 성장 러브 스토리가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지도 몹시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서평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항상 명심하렴, 우리 세이디. 인생은 아주 길어, 짧지만 않으면." 세이디는 그 말이 동어반복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진실이었다.
- P76

"넌 어떻게 그걸 모르니? 연인은……흔해빠졌어." 세이디는 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랑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도 괜찮았지만, 그보다는 너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인생에서 합이 딱 맞는 협업 파트너는 아주 희귀하니까." - P629

"약속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말도 안 하고 6년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넌 나를 무조건 용서하는 거야. 나도 너를 무조건 용서하겠다고 약속할게." 이것은 물론, 생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쟁여놨는지 쥐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함부로 맺는 서약의 일종이다. - P103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 P540

혼혈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둘을 합한 것의 반쪽이라는 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얘기라고. 그런데 나는 유대 것이든 한국 것이든 별로 아는 게 없고 딱히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지도 않다, 어쩌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게 돼서. - P132

샘이 실종된 그날 밤, 보기와 달리 인생에는 확고부동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놀이가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친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을 차단하려 애쓰긴 하겠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린 모두 기껏 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거야, 세이디는 생각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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