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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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억해.
인간은 언어야.
살아 있는 모든 건 언어야.
우리는 전체의 부분이고 언어는 세계의 파편이야.
우리는 언어야. -338p

인간과 비인간의 소통은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어느 나라의 언어? 아니, 어쩌면 언어가 아니라 행동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면, 언어란 대체 무엇일까?

인간과 비인간의 소통을 목표 하는 프로그램 커뮤니케이터의 개발자 조성원 박사는 울성에서 고래연구에 몰두중인 유코 박사의 권유로 그녀가 연구관찰 중인 고래 '이드'를 대상으로 커뮤니케이터의 실용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더디지만 조금씩 연구를 해나가던 그들은 오래지 않아 이드에게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인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줄거리만 봤을 땐 이 과학자들이 고래와 소통하는 소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지만.... 그 인간 친구의 정체가 티베트에 살고있는 한 어린 소녀라는 사실은 의외로 이야기 초반에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등장한다. 그 때 직감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내가 짐작하는 방향으로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혹은 네 가지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
   울성 바다에서 이드를 관찰하며 연구하는 성원과 유코, 퍼시.
   세계 곳곳에서 부조리함을 파헤치는 NGO단체 사계(포시즌)의 활동가들, 현지와 쿠날과 동섭.
   그런 사계의 새로운 활동지인 티베트에 살고있는 소녀, 돌마.
   그리고 고래를 사냥하고자 하는 울성의 토박이 어부, 석기와 원구.

이들은 각자의 관계에 따라 서로 합쳐졌다 나뉘어졌다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사방에 감시의 눈이 깔려있는 티베트 현지의 상황, 언제고 이드를 사냥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석구와 원구. 이런 외부의 위협 때문에 이야기는 예상 외로 꽤나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스펙타클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독자에게 그런 서사적인 쾌감을 주기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상실, 소통, 이해, 사랑과 치유 같은... 진부하다면 진부할 무형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그런 이야기이다.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는 장비를 두고 단호하게 그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서로가 원할 때, 마음의 연결이 필요한 것이라는(사실은 그것조차 커뮤니케이터를 빌려 이해하게 된 단어 파편의 모음이지만) 이드의 말은, 어쩌면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수도 있겠다. 마치 승희가 성원에게 남긴 마지막 문장처럼.

소재가 고래라는 이유로 서평을 신청하여 받은 도서인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선한 얼굴을 한 바다 아래 고래로 태어난 신이 잠들어 있다는 문장이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누구
성원은 손가락 끝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너는 누구인가. 고래가 묻고 있었다. 되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러는 너는 대체 누구인가.
성원은 다음 문장을 준비했다. - P270

하지만 이제 넌 돌마가 아니라도 사람과 얘기할 수 있어. 지금처럼 장치를 쓰면 돼.
그것. 가짜.
가짜?
진짜. 마음. 연결. 필요. 서로. 원하다. 시기. - P296

기억해.
인간은 언어야.
살아 있는 모든 건 언어야.
우리는 전체의 부분이고 언어는 세계의 파편이야.
우리는 언어야. - P338

이드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성에 쨍한 해가 떴다. 잔잔한 파도 위로 태양으로 만든 꽃잎이 부딪혀 깨지는 듯했다. 조사단은 부두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다를 봤다. 선한 얼굴을 한 바다 아래 고래로 태어난 신이 잠들어 있었다. - P359

"이건 그냥 물이야 선배. 바다를 나눈 건 사람이고. 파도에는 이름이 없어."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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