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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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한 초등학생 아오야마가 사는 작은 마을에 펭귄이 나타난다. 아오야마가 좋아하는 누나가 콜라를 던져 펭귄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같은 반 친구인 우치다, 하마모토와 함께 숲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관찰하며 누나와 ‘바다’의 연관성을 깨닫는다. 여름과 어울리는 판타지였다. 아오야마와 우치다의 탐험은 어릴 적 동네를 구석구석 뒤지고 다니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_P.32
이번에는 노트를 점검하다가 새 색인을 붙였다. ‘펭귄 하이웨이‘라는 항목이다. 펭귄에 관해 메모하는 것이다. 펭귄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올 때 으레 지나가는 루트를 ’펭귄 하이웨이’라고 부른다고 책에서 읽었다. 그 말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번 펭귄 출현에 대한 탐구의 제목을 ‘펭귄 하이웨이‘로 했다.
_P.254
”매일 발견을 기록해둘 것. 그리고 그 발견을 복습해서 정리할 것.“
_P.405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건 나의 소중한 연구예요. 난 이 연구의 비밀을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예요.“
_P.411
그렇게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을 노트에 기록했다. 그것을 지금 와서 다시 읽어봐도 도저히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 없다.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내 인생에 한 번밖에 없다.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경험을 노트에 기록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걸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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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점
이비 우즈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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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시간차로 에밀리 브론테의 두 번째 원고를 찾는 오펄린과 헨리. 또 백 년의 시간차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오펄린과 마서. 자신을 억압하고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남자에게서 도망쳤으면서 왜 또 남자를 찾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으니 그것 또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펄린의 말이 옳았다. 나는 강해졌다.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더 차분하고 지혜로워졌다. 드디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준비를 마친 것처럼.(P.466)

_P.126
그때의 그 남자는 평소의 셰인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질투심에 잠시 정신이 나갔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를 우리 둘 다 믿었다. 그해 여름 나는 시험에 떨어졌고, 그때를 마지막으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셰인과 다시 사귀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룸메이트들의 눈빛이 어땠는지 생생히 기억난다. 배신감을 느끼고 당혹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자기를 때린 남자에게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갈 수 있지? 나는 그들의 비난 어린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엔 그들이 옳았으니까. 그의 약속은 무의미했고, 그를 믿은 난 더 멍청한 바보였다.
_P.176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게 뭘까?“ 정답은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선택이니까.
난 너무 무서워서 대학에 등록하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건, 제자리에 틀어박히겠다는 이 결정이 내 능동적인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이 사실이 훨씬 더 무서웠다.
_P.328
분노한 남성은 주도권을 잡는 반면, 분노한 여성은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나는 잠자코 있기로 하고 호흡을 고르는데 집중했다.
_P.407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매일 말해주지 않은 게 후회되는구나. 그때 나는 온전히 살아 있던 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살아가는 척만 하고 있었던 거지. 자신의 일부를 숨겨두고 있으면 그렇게 돼버려. 아무튼, 너도 알았으면 해서 말해주는 거야. 넌 언제나 충분했단다, 마서. 그저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본 거야, 자기들이 너무 힘드니까 남을 살필 여유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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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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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괴담들. 무섭기보다 유머가 느껴지고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여성이 칼을 들고 벽을 부수는 주체적인 행동에 속이 시원해진다. 소설집의 제목처럼 신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스스로 구할 수밖에.

_P.39
걔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저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걔는 죽었잖아요. 노란색이 무서워서 도망가버린 남귀처럼 말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귀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요.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성주단지』

_P.100
세 사람은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온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시 원서 접수와 중간고사, 수능 그리고 기말고사였다.
『야자 중 XX 금지』

_P.121
젊은 여인이 홀로 살기에는 참으로 흉악한 세상이었다. 혼인하지 않으면 어찌 혼인하지 않냐며 들볶고, 과부가 되면 수절을 하라며 들볶았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은 더했다. 밭일과 길쌈, 빨래와 청소 그리고 끼니까지 도맡아야 했다. 지아비와 시부모의 구박은 덤이었다. 그래도 옹녀는 가정을 갖고 싶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면 입 한번 맞추는 놈, 젖 한번 쥐는 놈, 흘레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놈, 손 만져보는 놈, 심지어 치맛귀에 씨물을 묻히는 놈을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낭인전』

_P.182
”언니. 이건 꼭 내가 언니를 위해서 쓸게. 언니도 그렇게 해줬잖아. 나 그거 안 잊었어.“
『풀각시』

_P.260
마을 사람들에게 옛일을 들을 때마다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거였습니다. 박해의 폭풍이 조선을 집어삼켰을 때, 교우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제님처럼 대단하신 분들은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가진 것이나 배운 게 많았던 교우들도 장살이나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같은 평범한 교우들은 마을 안이나 길 위에서 변을 당하였지요. 교우들이 포졸이나 외교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능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을 때, 이웃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삼절린은요?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탄하였을까요? 아니면 이때다 싶어 자기 탐욕을 채웠을까요.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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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콰마린
백가흠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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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보다 집단일 때 가해자나 방관자가 되기 쉽다. 집단에는 더 나쁜 놈이 있고 나는 지켜만 봤다는 자기합리화 이후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소설에서 지칭하는 인물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데 그렇기에 나는 더 무력감을 느꼈다. 악인들의 말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하지 않기에. 그들이 쌓은 권력과 부가 아직도 세습되기에. 그래서 분노와 무력감이 함께 오는 것 같다.

_P.17
’오전 7시, 청계천에서 잘린 손 발견, 여성의 것으로 추정됨.‘
_P.100
”이 계정들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한데, 대략 1년 전쯤이에요. 이 계정들의 게시물은 물론이고 1년 동안 서로 주고받은 멘션을 추리고 단어를 통계 냈더니, 복수, 희생, 고문, 아버지, 청계천, 경찰, 80년대, 조작, 국회의원, 국무총리, 대통령, 언론, 그리고 K 같은 단어입니다. 통계 낸 단어들로 이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유추할 수 있거든요.“
_P.108
”잠깐, 아주 잠깐 했어. ......나는 적성에 안 맞더라고,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공무원이 돼서 꿈도 야무졌었는데, 나는 아니더라고.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잡아다가 많이 때리고 그랬잖아. 나는 그게 힘들더라고.“
_P.126
”전도가 아니라......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수라는 종교를 믿어요. 우리는 그 일부분이고요.“
_P.211
”우리는 복수하지 않음으로 복수한다.“
_P.242
”우리에게 미안할 건 없어. 넌 그게 잘못됐어. 네가 미안해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잖아. 잘 생각해봐. 그렇게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는 일이 없을 거야. 제발, 좀 잘 살아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말이야.“
_P.257
”처음 한쪽을 자를 땐 두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두 번째는 다르지요. 우리도 정말 가능할까, 싶었는데 대단한 의지를 가진 부류들이에요. 저런 의지로 그런 일들을 저질렀으니,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_P.313
”그냥 병든 노인이더라고요. 이렇게 공평하게 끝을 맞이할 텐데,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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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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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먹고 싶어질 줄 알았는데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산문이다. 아직도 이렇게 읽을 책이 많구나. 다시 한번 죽기 전에 이 재밌는 책들을 다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_P.33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가리고 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창피해서, 상처를 줄까 봐, 원망을 들을까 봐. 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 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처럼, 켜켜이 쌓은 페이스트리의 결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빛과 어둠이 술렁이며 그려놓는 그림. 그것이 마음의 풍경이다.
_P.132
루시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말한 것처럼 삶은 소설과 달리 다시 쓸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럼에도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다양한 색으로 물드는 해 질 녘의 하늘처럼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 삶이라고 알려준다. 모든 생이 감동을 준다는 루시 바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끝끝내 그토록 서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툴고 서툴렀던 당신들. 경이로운 생의 주인인 당신들의 이름을 나는 오늘 나직이 불러본다.
_P.155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겪은 무수한 일들이, 만난 사람들이 우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데, 우리는 경험만이 아니라 그중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버리는가 하는 선택에 따라 빚어지기 때문이다.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어린 시절을 통과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 인간에 대한 혐오나 절망을 말하는 대신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미쉬카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보살피고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려 노력하는 마리와 제롬의 이야기는 선의의 힘을 다시 한번 믿어보게끔 이끈다. 악의가 시끄럽고 요란하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 순간에도 선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번져나간다. 고요하지만 멈추지 않고. 겨울의 한복판이라도, 우리는 볕을 찾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할 수 있다.
_P.259
『디어 라이프』를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나의 내밀한 고백에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읊조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과 내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인 한 인생은 아직 친애할 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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