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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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정신 전산화 소재는 이제 낯설지 않다. 이 기술을 독점하는 기업의 음모나 부패를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스파이라』는 인아영 평론가의 심사평처럼 낭만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타인의 이념이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타인이 선택하는 인생을 재단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_P.8
에피네프라는 이름도 낯선 전염병, 인구의 급감에 따른 온갖 마비와 장애. 기억과 인격을 데이터화하는 정신 전산화 기술의 개발과, 그 기술을 독점해 고객들에게 제2의 가상 인생 서비스를 제공하는 AE(Artificial Eden)의 설립. 알고 있던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대비해 오던 것과 조금도 대비하지 못한 것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뒤섞이는 그 혼란 속에서 우린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거기에 적응해 내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될지 조금도 몰랐다.
_P.17
"생각해 봐. 통 속에 뇌만 덩그러니 담긴 채로 한 기업이 독점하는 가짜 천국 같은 곳에 목숨을 의탁하는 거잖아. 조금 추하지 않아? 그런 내세가 보장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삶을 반쯤 내던지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 가끔 AE가 세상을 더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_P.101
이제 누군가의 죽음이란 반드시 울거나 오랫동안 슬퍼해야만 할 일이 아니었다. 죽음의 의미나 그 무게가 달라져서가 아니었다. 달라진 건 우리였다.
_P.195
"그렇긴 하지만... 저는 낙관적인 사람이에요. 이렇게 됐어도 아직 확률보다는 가능성을 믿어요.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바뀔 세상을 보고 싶네요."
_P.206
"그런 건 모르는 거야. 네가 남들 인생을 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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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풍경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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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게 인간이라는 점이 좋았다. 물체나 동물로 대체되는 것보다 현실적이랄까. 고즈넉한 소설 속 배경과 대비되는 어둡고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의 이야기였다. 특히 『이그나츠 데너』의 주술적인 부분이 소름 끼쳐서 기억에 남는다.

_P.60
"저놈을 쫓아가, 빨리 쫓아가라고, 뭘 꾸물대는 거야? 코펠리우스, 코펠리우스가 나의 최상품 자동인형을 빼앗아 갔어. 20년 동안 작업한 인형이야. 신명을 바친 거라고. 기계 장치, 언어, 동작, 모두 내 거야. 눈알, 네게서 훔친 눈알이야. 망할 놈, 저주받을놈, 저놈을 쫓아가, 올림피아를 데려와, 여기 눈알이 있군!"
『모래 사나이』

_P.86
"그때 그 낯선 남자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던 내면의 목소리가 지금도 그치지 않아. 나는 자주 내적 비난에 시달리고 있어. 낯선 남자의 돈과 함께 부당한 재물이 우리 집에 들어온 것 같아. 그래서 그 돈으로 마련한 어떤 것에도 제대로 기뻐할 수 없는 거야.(...)사랑하는 조르지나! 당신은 그 사람이 어떤 상대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거 눈치챘어? 그러면서 깊숙이 자리한 작은 눈이 이따금 아주 기이하게 번득이지. 그는 우리가 소탈한 이야기를 할 때 몹시 비열하다고 할 정도로 웃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면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고. 아,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배후에 온갖 불길한 재앙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들어. 그 낯선 남자가 우리를 교묘한 올가미로 옭아매고 나면 단번에 재앙을 불러올 것만 같아."
『이그나츠 데너』

_P.208
"(...)'상투스가 울릴 때 교회를 떠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고 반드시 벌을 받아요. 당신은 이제 곧 교회에서 더는 노래하지 못할 거요!' 그것은 농담이었는데, 갑자기 내가 한 말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들렸는지 모르겠어요. 베티나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말없이 교회를 떠났어요. 그 순간부터 그녀가 목소리를 잃어버렸거든요."
『상투스』

_P.319
"종형제, 어리석음이 모든 힘으로 너를 사로잡고 있는데, 간청하노니 그 어리석음에 저항해라! 너의 시작은 무해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라. 너는 지금 부주의한 망상으로 인해 살얼음판에 서 있고, 네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얼음판이 깨져 풍덩 빠지고 말 거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아 주지 않을 거야. 네가 스스로 빠져나올 거고, 죽을 정도로 아픈 상태에서 '꿈에 감기에 좀 걸렸어요'라고 말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러나 사악한 열병은 네 생명의 골수를 갉아먹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너는 기운을 차리게 될 거야. 네가 너의 음악으로 감상적인 여자들을 평온한 휴식에서 끌어내는 것 말고는 더 나은 일을 할 줄 모른다면, 악마가 네 음악을 앗아가 버렸으면 한다."
『장자 상속』

_P.414
"아이는 내게 맡겨! 오, 아이는 내게 맡겨. 당신은 나의 영원한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없어. 그리스도의 이름, 성모의 이름으로 간청하겠어. 아이는 내게 맡겨, 아이는 내게 맡겨."
『서원』

_P.512
작가 호프만은 인간 심리의 비밀스럽고 어두운 면에 더욱 주목한다. 이러한 후기 낭만주의를 특징적으로 일컬어 '공포 낭만주의 (Schauerromantik)'라고 한다. '공포 낭만주의'란 초자연적인 요소가 풍부한 초기 낭만주의의 환상적 이야기들 대신에 점차 세계의 악마적 힘, 인간 내면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어둡고 기이한 정신적 과정, 사악한 충동, 광기, 불안, 경악 등을 소재로 하는 경향을 말한다.
『권혁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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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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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를 읽으며 오래전 봤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영화가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감정을 나는 사랑이라 말하지 않겠다. 『멜론』은 작가가 납량 특집으로 기획했다는데 현실적인 공포라 정말 무서웠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잘라내지 않고 뜯어서 결국 피가 나는 어리석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들 그러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소설들을 읽었다.

_P.24
나도 당신과 공유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 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이나 미소나 잠깐의 체온 같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변형되는 그런 것 말고. 둘 중 하나가 잊으면 증명 불가능한 그런 것 말고.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나도 그런 걸 갖고 싶다. 나도.
『아무도』

_P.61
아침에 눈을 뜨면 원희는 전과 달리 가볍게 일어났다. 규석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줄어들었다. 매일 고주완의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고, 유튜브 연주 동영상이나 인터뷰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창가에 서서, 어느새 짙어진 녹음을 보면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들 수 있는 날이 많아졌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_P.93
구독자들은 매번 조금씩 바뀌는 제인의 필기도구와 노트 그리고 공부 내용을 궁금해했다. 제인이 입은 셔츠와 착용한 액세서리, 사용하는 립 제품의 브랜드를 묻기도 했다. 그러면 누군가 나타나 답을 했다. 아마도 어디어디 제품 같아요,라는 식으로. 구독자들은 제인이 필기하는 모습, 글씨를 쓸 때 나는 소리, 펜의 종류를 궁금해했다. 구독자들의 취향을 간파한 한나는 수익이 생긴 후 마이크를 가장 먼저 바꾸었다. 멀리 두어도 필기 소리와 숨소리까지 잡히는 성능 좋은 제품으로. 다음으로는 학용품과 소품들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카피 제품이었지만 점점 오리지널 브랜드 제품으로. 하지만 가성비 좋은 제품들을 섞어서. 대형 문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펜과 희귀하고 비싼 제품을 3 대 1 정도의 비율로. 그래야만 욕을 덜 먹는다는 것도 한나는 알고 있었다.
『제인의 허밍』

_P.131
마지막 급식소에 도착해서 사료를 채우고 물을 갈아 주었다. 이곳에는 밥그릇을 두고 갈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 벽보를 붙여놓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양이 밥 주지 마시오. 걸리면 죽인다.' 그 후로 둘은 가장 늦은 시간에 이곳에 와서 고양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후 그릇을 챙겨 왔다. 은선은 도대체 누가 그랬는지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그럼 고양이들은 어떡해? 지수가 물었고 은선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참는 거야.
『우리에게 없는 밤』

_P.194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
민희는 자신이 잘못 읽은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이나 다시 글자를 확인했다. 박재희는 민희가 선물한 운동화를 신은 채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은 자신의 하반신 사진과 이어서 누군가의 맨발이 찍힌 사진을 올렸다. 민희는 그 발을 쉽게 알아보았다. 익숙한 이불 모양과 자신의 발, 그리고 그 옆의 밍크 선인장.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찍은 사진 같았다. 민희는 소름이 끼쳤다. 자본주의의 개년이라니. 민희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점점 차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몬스테라 키우기』

_P.214
모든 식어가는 일들이 그러하듯 허공의 냉기 역시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냉기가 스친 가슴께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때 나는 관계의 실선이 이토록 손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다린다는 의식도 없이, 애정이 혐오로 바뀌는 이 순간을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

_P.230
의사는 초기 유산율이 높으니 최소 3개월 지날 때까지는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게다가 자궁경부도 매우 짧은 편이라...... 나는 고위험 임부라고 했다. 고위험. 많은 주의 사항. 조심해야 하는 것들과 하면 안 되는 것들. 특히 노산에는, 노산이라, 노산이셔서...... 노산이라는 말은 마치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데 억지로 어떻게든 낳게 해주겠으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내 탓이라는 말로 들렸다.
『멜론』

_P.253
노력과는 무관한 운이라는 것에 혜신은 완전히 매혹당했다. 그래서 다시 카지노에 갔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데리고 갔다. 대학 절친과도 함께 갔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거슬렸다. 그래서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홀로 카지노에 발을 들인 날에는 바카라 테이블 앞에서 여덟 시간 넘게 있었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셔플 타임에 혜신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화장은 지워져 있었고 눈 밑은 거뭇했다. 이게 나인가? 이게 나......라니.
『9』

_P.320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했던 남자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남자의 서랍 안에 상한 우유를 넣어두고 회사를 나왔다. 고작 상한 우유라니. 그 후로 나는 거울을 더 자주 보았다. 정말 내 얼굴에 뭔가 새겨져 있을까 봐.
『집』

_P.335
이건 내가 생각했던 죽음이 아니다. 죽는다는 건, 몸에서 생명이 사라진다는 건, 생각이나 마음 같은 것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었던 건데......
『몸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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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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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노부부가 연쇄살인범은 아닐 거라는 보편적인 생각을 깨부순다. 노쇠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더 치밀하게 범죄를 저질러서 피해자 수는 많고 발각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이런 커플을 소울메이트라고 하더라. 단순한 수사물이라기엔 팬데믹 시기의 미국의 상황과 엄마와 딸의 관계 그리고 주인공 홀리의 주변 인물까지 다양한 군상을 다룬다. 제롬이 피트 스타인먼의 엄마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장면에서는 울컥했고 어쩌면 홀리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도 들었다.

_P.127
그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산딸기 셔벗에 피터 스타인먼의 뇌를 섞은 디저트를 떠먹는다.
_P.312
그녀가 아는 세 실종자가 서로 연관이 있을 듯한 예감이 들지만 비슷한 부분이 몇 군데 있을 뿐 증거가 전혀 없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제 세상이 동아줄을 던져 주어야 한다.
_P.344
레드뱅크로의 살인마는 제물을 아무 기준 없이 선택하지 않는 것 같다. 그자는 엘런에게 가족이 없다는 걸 알았다. 캐리도 그렇다는 걸 알았다. 피트 스타인먼의 어머니에게 알코올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았을지 모른다. 보니가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아버지는 그림 안에 없으며 어머니하고는 불편한 관계라는 것도. 그러니까 정보를 파악한 뒤에 타깃을 선택했다.
_P.410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에 묻은 조그만 핏방울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7월 4일에 그 입술을 무표백 밀가루에 굴려서 조그만 프라이팬에 넣고 어쩌면 버섯과 양파와 함께 튀길 것이다. 입술에는 콜라겐이 듬뿍 들어 있어서 그의 무릎과 팔꿈치, 심지어 삐걱거리는 턱까지 기적적인 효과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에는 이 골머리 썩이던 아이가 고생한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젊음을 기증할 것이다.
_P.501
“그자가 그 사람들을 먹나요? 그래서 납치한 거예요?”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서로 흘끗 쳐다본다. 연극이 아니라 진짜다. 이내 에밀리가 놀라울 정도로 어리게 들리는 웃음을 터뜨린다. 잠시 후에 로드니도 가세한다. 그들은 이렇게 웃으며 수십 년을 해로한 커플만의 특권인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 로드니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얘기해, 뭐 어때) 에밀리가 홀리를 돌아본다.
“그자는 없어, 아가씨. 우리뿐이야. 우리가 그 사람들을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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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2
김멜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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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의 잊힌 바이브레이터처럼 곤충들이 레즈비언 커플을 관찰한다. 생식이 자연의 법칙인데 이들은 그럴 수 없음에도 같이 살아간다. 왜일까? 죽고 싶은 호랑과 조증과 울증을 반복하는 버들의 삶은 불안이 함께한다. 그래도 여전히 함께다.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김멜라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이 나는 너무 좋다.

_P.11
우리는 인간을 ’두발이엄지‘로 분류한다. 우리를 잡으려고 발달한 엄지가 인간 신체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낮의 탐욕과 밤의 악몽을 찍어대는 뇌의 전두엽이나 내골격 구조의 굼뜬 이족 보행은 이 행성의 주인인 우리가 보기에 퍽 안타까운 진화적 오류다. 대체 인간은 그 두 발로 걷기 위해 평생 몇 번이나 나자빠진단 말인가?
_P.115
인간에게 감정이란 무엇인가. 암수딴몸인 그들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개발해낸 짝짓기 전략 아니었던가. 벌과 꽃등에가 식물의 꽃가루를 암술 머리에 묻혀주듯 인간은 서로가 주고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이어져 관계의 쇠사슬을 끌며 살아간다. 그런데 비생식 암컷 엄지는 무엇을 위하여 함께하는가. 번식을 향한 유전자 메커니즘이 아닌 그 무엇이, 그들의 관계를 추동하고 지탱하는가.
_P.149
그래, 이제 나도 괜찮아. 죽음이든 삶이든. 그러니 나에게 무너져 내려.
_P.165
가을밤, 노란허리잠자리 한 마리가 알을 낳았다. 반짝이는 빛 위에 정지 비행을 한 채 알로 부풀어 오른 꼬리를 탁탁 내리치며 산란했다.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간 것이다. 그 아스팔트는 연못이 아니었다. 검은 길을 비추는 가로등 빛을 수면에 비친 달빛으로 착각해 바보처럼 군 것이다.
사랑에 관해 필자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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