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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평점 :
한국적인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괴담들. 무섭기보다 유머가 느껴지고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여성이 칼을 들고 벽을 부수는 주체적인 행동에 속이 시원해진다. 소설집의 제목처럼 신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스스로 구할 수밖에.
_P.39
걔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저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걔는 죽었잖아요. 노란색이 무서워서 도망가버린 남귀처럼 말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귀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요.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성주단지』
_P.100
세 사람은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온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시 원서 접수와 중간고사, 수능 그리고 기말고사였다.
『야자 중 XX 금지』
_P.121
젊은 여인이 홀로 살기에는 참으로 흉악한 세상이었다. 혼인하지 않으면 어찌 혼인하지 않냐며 들볶고, 과부가 되면 수절을 하라며 들볶았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은 더했다. 밭일과 길쌈, 빨래와 청소 그리고 끼니까지 도맡아야 했다. 지아비와 시부모의 구박은 덤이었다. 그래도 옹녀는 가정을 갖고 싶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면 입 한번 맞추는 놈, 젖 한번 쥐는 놈, 흘레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놈, 손 만져보는 놈, 심지어 치맛귀에 씨물을 묻히는 놈을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낭인전』
_P.182
”언니. 이건 꼭 내가 언니를 위해서 쓸게. 언니도 그렇게 해줬잖아. 나 그거 안 잊었어.“
『풀각시』
_P.260
마을 사람들에게 옛일을 들을 때마다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거였습니다. 박해의 폭풍이 조선을 집어삼켰을 때, 교우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제님처럼 대단하신 분들은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가진 것이나 배운 게 많았던 교우들도 장살이나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같은 평범한 교우들은 마을 안이나 길 위에서 변을 당하였지요. 교우들이 포졸이나 외교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능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을 때, 이웃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삼절린은요?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탄하였을까요? 아니면 이때다 싶어 자기 탐욕을 채웠을까요.
『교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