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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직장 사실주의적 글을 쓰는 이서수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PTSD가 올 거 같다. 이 소설집에도 모녀와 노동하는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주민과 연명치료를 다룬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운동장 바라보기」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는 전교생 중에 혼혈이 없었다. 지금 사는 곳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지만 나는 딱히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마도 중국인이 많이 거주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정말 다양한 인종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외형은 우리와 다르지만, 국적은 대한민국 언어는 한글을 쓸 것이다. 아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와닿는 것처럼 소설 속 인경의 언니가 느끼는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잘지내고있어」 병원에서 기관절개로 산소를 공급하고 혈관과 경관영양으로 영양을 공급하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근데 그게 살아있다는 것일까. 나는 그런 환자에게 가래를 뽑고 피딩을 하고 TPN을 주사해 생명을 연장시키며 결정했다. 그런 순간에 생명 연장을 원하지 않으니 기관 절개도 싫고 DNR 서류에 사인하라고. 나의 죽음을 내가 챙길 수 없다면 결정은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 그런 짐을 주기도 싫고 원하지 않는다.
_P.37
엄마는 그럴 때 없었어? 일하다 도망치고 싶었을 때.
있었지.
그럴 때 어떻게 했어?
......네 생각 하면서 참았어.
#이어달리기
_P.54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저씨, 차라리 이모 옆에 가서 춤을 추세요. 이모와 춤을 추면 모든 걸 잊고 몸만 흔들게 돼요. 아저씨는 어떤 춤을 추나요. 아저씨가 몸을 흔들 때 세상도 같이 움직인다는 거 아세요, 모르세요. 나는 열일곱 살에 이미 알았는데, 그걸 알아도 인생이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춤을 추세요. 그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춤은영원하다
_P.93
우리 회사에선 내가 껌 종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재씨는 알까. 식대 인상을 제안하며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잔머리를 굴렸는지를 알까. 대표가 너무 까칠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수분을 적절하게 보존해주고, 직원들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 녹는 것을 방지해주는 사람. 그러나 버려질 땐 껌 종이처럼 꼬깃꼬깃하게 뭉쳐져 가차없이 던져지는 존재, 그게 나라는 걸.
#광합성런치
_P.129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궁금하니? 어릴 때 내가 도깨비불이랑 귀신을 자주 봤어. 마당에 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 걸 봤지.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굿을 하려고 무당을 불렀어. 참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여자더라. 그 시대를 견뎌야 했던 시골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시시하게 살고 있었는데, 내가 본 여자 중에 온전한 자신으로 화끈하게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 무당이었어. 굿을 시작하기 전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고, 제대로 흘렸는지 정신을 못 차리겠는 거야. 그때부터 나는 무당이 점술가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생각했어. 죽음과 삶을 구현하는 예술가. 나도 언젠가 무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싫지가 않았어. 그건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잖아. 배우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는 거. 하지만 나한텐 그런 기회가 안 왔지.
#AKA신숙자
_P.171
”너희들, 여기에 한국인 엄마가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
나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우리 포함해서 딱 두 가구야.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그런 엄마들이 다수야. 나는 여기서 소수라고. 한국인인데 소수야.“
#운동장바라보기
_P.199
”나는 포기할래.“
”......그래.“
나는 그래? 라고 끝을 올려 묻지 않고 그래, 라고 끝을 내려 답했다. 그래, 그러자. 아버지를 기다리지 말자. 네 결정에 나도 슬쩍 올라탈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무임승차로 결정을 내렸다. 세연에게 가장 큰 죄책감을 감당하게 했다. 나는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들었다. 결정을 내린 사람은 세연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 치의 왜곡 없이. 나의 비겁함을 영원히 떠올리며.
#잘지내고있어
_P.242
할머니, 백 살까지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뭐야?
넘어지지 않기.
그리고?
매일 좋아하는 거 한 가지는 꼭 하기.
#미식생활
_P.259
우리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포부나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 그럭저럭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물었을 때 배키는 당연히 된다고 답했다. 원대한 야망을 품을수록 탄소 배출이 많아진다고 주장하면서. 어쩐지 수긍하고 싶은 말이었다.
#청춘미수
✦ 문학동네에서 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