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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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에 대해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전체의 50퍼센트가 진화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거의 100퍼센트가 진화를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과 연결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리 과학을 굳건하게 믿는 이유는 그것이 진화보다 더 입증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야가 우리 삶에서 더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이 없다면 다리를 놓거나 차를 몰거나 비행기를 운전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제 진화론은 인간 복지에 매우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될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다들 놀랄 것이다. -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진화론의 유혹> 중에서 18p

 

 이 책의 부제인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를 보았을 때 진화라는 단어와 미래라는 단어가 묘하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진화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원생생물이나 호모사피엔스가 떠오르니까. 진화라는 것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또 현재에도 치열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위의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말처럼 ‘진화를 나의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눈꼽만큼도 말이지. 심지어 이 책에서도 나온 박테리아의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과정을 배우면서도 그런 현상을 적응이라고 생각했지 진화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이 책은 바로 지금도 진화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화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야까지도 활짝 넓혀버렸다.

 

 윌버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이 네 가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했다 1)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나), 2) 집단적이고 내면적인(우리), 3) 개인적이고 외면적인(그것), 4) 집단적이며 외면적인(그것들) 것이다.

 예를들어 내가 개인적 내면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내 생각, 심리 그리고 영적인 경험은 모두 도표의 상단-좌측에 해당된다. 내면적, 집단적 차원에 속한다면 이 경우는 문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인데 여기에는 세계관, 가치, 믿음의 체계 등이 포함된다. 이것은 ‘우리 we’ 차원이다. 상호 주관적영역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믿고 있는 객관적인 방식, 그리고 나의 뇌, 몸, 신경 체계 등이 중심이 된다. 이것은 상단-우측이다. 또한 집단적 외부 체계를 생각해보자. 경제적 체계, 정치제도, 사회적 구조 등이 있고, 이는 그림의 하단-우측에 해당된다. 이것이 열쇠이다. 윌버에 따르면 진화는 이 네 가지 차원 모두에서 일어난다. 264p

 

 나, 우리, 그것 그리고 그것들. 모든 차원에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는 과학에 대한 진화 뿐만 아니라 의식, 문화, 영성의 분야까지 진화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진화라는 단어에서 어떻게 64가지의 내용을 끌어낼 수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진화의 개념을 너무 좁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뢰텔스는 “의식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았다”는, 의식의 이해 면에서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를 지적하겠다고 하면서 발표를 시작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지만 인간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기는 그릇된 관념을 플린스톤 오류라고 불렀다. (...) 플린스톤 오류는 제대로 연구를 하지도 않고 믿어버리는 이 시대의 큰 잘못된 가정들 중 하나이다. 애리조나에서 슬뢰텔스가 말했던 것처럼, 플린스톤오류는 인류 역사 중 수많은 핵심적 가정의 근거가 됐던 오류이다. 인류의 조상이 오늘날 우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감정, 심리적 구조를 가졌다고 묘사하는 것은 비단 <고인돌 가족>뿐만이 아니다. 영화, 역사 소설 그리고 학술 연구들에서도 그런 묘사는 비일비재했다. 인간의 의식이 지난 5,000년간 현저히 변해왔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4-205p

 

 늘 걱정과 불안이 따라다니고 아이러니가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외면적인 영적 타당성에 매료되어 방황하는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행동하기보다는 그저 관찰하고,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바라보고, 진심을 다해 희생하거나 위험을 불사하기보다는 의심을 품고 살도록 한다. 영성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이런 추측이 서서히 마음 언저리에 파고들면, 지금의 행동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판단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선사하는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냉소적이고 믿음이 부족한 문화에서는 고질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많아지고, 삶이나 미래의 가능성에 진지하게 투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이런 문화에서 금욕주의적인 결론은 잘못된 괴리감을 부추길뿐이다. 그리고 진화적 영성의 정수인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힘’을 영적 자유와 평화라는 명목 아래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진짜이며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깨닫는 것, 그리고 거기에는 윤리적 중요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지금 문화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궁극적인 우주적 도덕의 차원에서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동이 작지만 의미 깊은 차원에서 더 큰 과정의 운명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진화적 영은 그런 관계를 인식 시켜 줄 수 있다. 진화적 영성은 우리를 우주적 과정에 연결해준다. 우주적 과정은 중립적이나 하찮지 않으며, 개인의 삶에서 정신없이 예측할 수 없게 발생하는 어떤 사건보다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진화적 영성은 일상적 관심사들의 끝없는 반복 너머로 우리를 고양시키고, 지금도 인간의 의식과 문화적 진화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137억 년에 걸친 과정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우리 개인과 집단의 미래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다. 천국의 신이나 그 신의 배려가 아닌, 인간의 삶 속에 자재 하는 심오하고 긍정적인 영성을 믿게 해주는 것이다. 303-305p

 

“이 세상에 신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 확장되면서 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도 확장되어야 한다.” 샤르댕이 거의 100년 전에 쓴 글이다. 샤르댕은 어떤 종교가 살아남는다면 그 종교는 진화론적 세계관의 실제를 전통과 형식에 유기적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는 호트, 클레이턴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샤르댕의 선견지명을 더 선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 안에서,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신은 수천 년 전 자연의 순환과 밀착되어 수렵 채취를 하며 살아갔던 부족에게는 가장 적절한 형식의 신성이었을 것이다. 시간과 세계라는 개념을 넘어 영원한 평화, 휴식, 구원을 주는 초월적인 신은 우리 조상들의 ‘힘들고, 거칠고, 수명도 짧았던’ 삶에 완벽한 의미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세계화가 진행되고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는 세계에서는 진화하는 신의 개념이 더 잘 맞을 것이다. (...) “미래는 신이 살고 있을 우선 적인 곳이다”라고 호트는 썼다. 이 주제로까지 대화를 심화하면서 그는 진화 신학의 핵심에 대해 말했다. “신은 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예상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미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은 자신의 본질에 미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389-390p

 

 의식, 문화, 도덕 그리고 종교와 신까지. 진화라는 개념과 이리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주제들에서 진화의 힘을 발견해내고, 또 반대로 진화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도 진화의 욕망이 그 분야에서 미치는 영향을 발견해내는 모습들을 책에서 발견해나갈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책의 내용을 전부 나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한 인물과 그의 주장이나 의견, 연구들이 나오면서 그 부분을 이해하고서는 다음 인물 혹은 주제로 넘어가면서는 머릿속에서 지워졌으니까. 그래도 진화가 지금도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 힘이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게 만들더라도 결국에는 긍정적인 미래로 이끌어 줄 거라는 진화적 낙관론도 어느정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진화가 인간의 삶과 문화를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진화를 반대하는 가장 흔한 입장은 진화의 개념을 무신론과 물질론으로만 이해하는 종교계의 인사들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염려에 대해서는 이미 입장 표명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진화에 대해 반대하는 두 번째 입장은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될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듯이, 진화는 그냥 무언가 미심쩍다는 이유만으로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진화는 역사상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철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19세기 사회주의적 다원주의, 20세기 초의 우생학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진화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가져온 역사적인 공포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당연하다. 헤겔과 다윈의 진화론에서 히틀러의 파시즘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진화론 자체가 “어떤 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 또는 “인간의 역사에는 피할 수 없는 방향성이 있다”는 매우 허황된 이론을 이끌어갈 수도 있으니, 과학 실험으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진화론의 내용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런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모든 종류의 파시즘적, 또는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진화론은 비난받을 수 있다. 20세기 역사를 살펴볼 때 그런 증거는 명백히 많다.

 강력한 아이디어는 그것이 악한 집단의 손에 넘어가면 남용될 위험이 크다 - 그것이 강력할수록 더 위험해진다. 진화는 당연히 강력한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많은 문제, 남용의 문제가 진화론적 사고에 본질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광신의 문제가 종교적 사고의 본질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나 허무주의가 과학적 사고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에서 언급한 많은 문제, 남용의 문제가 진화론적 사고에 본질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광신의 문제가 종교적 사고의 본질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나 허무주의가 과학적 사고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에서 말한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는 미성숙에서 비롯된 실패일 뿐이다 - 하나의 문화가 진화처럼 매우 폭발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매우 유감스럽고 비난받을 만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26-27p

 

 우리가 ‘고정된 사고’의 환상을 깨는 것은 의식의 댐을 허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면서 가능성을 열고, 인간의 본질과 문화 변화 과정의 일부인 운동성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다 - 그 장소는 테니스장이 될 수도 있고, 사회의 중요한 다른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진화적 낙관론이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에 잘못은 없다. 그것이 정신 나간 행동이 아니라면, 또한 현실성이 있다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방향과 초점을 제시한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실제적인 발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화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서, 인간의 문화가 시작된 이후부터 어떻게 진보가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진화의 현실에 눈을 뜰 때,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서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생존의 방식을 볼 뿐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힘들게 얻은 진보의 면면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기적을 꿈꾸지 않게 된다. 우리는 심오한 미래를 폭넓은 낙관론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 의미있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행동으로, 기적처럼 우리 삶의 차원을 넘어서는 변화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62-63p


 한때 성직자들이 신비하고 형이상학적 세계를 해석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과학자들이 자연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생각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진화하는 우주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해석하고 비밀을 밝히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 그 사람들에게는 ‘진화 혁명가’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몇백 년 전에는 ‘과학자’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당시의 아직 어설픈 과학 활동으로는 그런 직함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는 과학자를 ‘자연 철학자 Natural philosopher’라고 지칭했는데 그들은 전근대적인 세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과학을 연구하지 못했다. 오늘날과의 차이는 매우 명확하다 : 19세기 초 당시의 과학은 겨우 직관을 만든 것과 같았다.

 진화 혁명가가 언젠가 우리 문화에서 정신적, 물리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하나의 공식적 전문직의 명칭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새로운 시각의 렌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 렌즈를 통해 의식, 문화, 우주의 본질을 실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독자들이 하나의 사상으로서의 진화가 다윈이 만들 틀에서 얼마나 멀리 확장되어왔는지 명확히 이해했기를 바란다. 이 사상은 그 범위가 아주 넓어졌고, 생물학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지금 여러 분야에 빛을 밝혀주고 있다. 이런 진화에서 말하는 변화는 초파리와 화석을 놓고 생각하는 이상의 수준이다. (...)

 새로 나타난 진화적 세계관이 차후 몇십 년 또는 몇백 년 동안 사회의 모든 단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잠재력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의 개념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데 긴 시간이 걸린 것처럼, 진화적 세계관의 핵심적 내용이 정치 사회적으로 적용되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적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을 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룬 이론들은 새로운 세계관의 중심에 근접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아직 충분히 실제적인 개념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실용적인 표현이 만들어지는 근간이 될 것이다. 또한 진화적 사상이 어떻게 심리학, 정치학, 사회 변화, 역사, 경제, 법 등 많은 분야에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런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393-397p

 

 확실히 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책이었다. 중간중간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들이 산재해 있기는 하지만 책의 두께면에서도 그렇고 다루는 내용 면에서도 그렇고 상당히 머리를 굴리며 읽어야 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이 하나씩 무너져내리는 느낌도 들어서 더 끙끙거리면서 읽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부분에서 오해가 일어났는지를 읽어볼 수 있었고, 작가가 강조했듯이 진화의 틀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확장이 되었는지 (명확히는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내가 그에 관해서 심도 깊게 글을 적을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아서 내 안에서 소화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책에 나왔던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말처럼 “(무언가에 대해) 조금만 아는 것은 위험하다.” 니까. 진화에 대해서 이 두꺼운 책을 읽었지만 내가 아는 것은 또 이해한 부분은 극히 일부일 거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거 하나는 잘 챙겨 가져가련다. 진화는 지금도 이 세상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 진화의 욕망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점. 심지어 나의 삶과 나의 내면에까지 진화는 꾸준히 영향을 미친다는 거 기억하자.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그에 관련된 다른 책들이 나오면 그 책들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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