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2008년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가 파산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금융시장에 위기를 촉발시켰다. 신용조건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거의 100%수준의 대출을 해주고 높은 금리를 되돌려 받는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이 원인이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과연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성장은 언제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오래전 나우루의 흥망성쇠를 다룬 다큐를 통해 바라볼 수 있었던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의 한계가 떠올랐다.
나우루는 1970년대 인광석이라는 자원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도로가 하나뿐이었지만 각 집에서 고급 승용차를 두 대씩 소유했고 각 가정에서 가정부를 고용하기도 했다. 당시 나우루의 GDP가 미국의 2배 이상이었다고 하니 수치만 놓고 보았을 때 굉장한 부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가 들어서면서 인광석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자원을 바탕으로 했던 국가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국가가 파산하고 빈곡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각 가정에서 소유했던 고급 승용차들이 고철이 되어 아무렇게나 방치된 모습에서 이전의 영광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우루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인광석 채굴로 인해 섬(나우루는 섬나라이다.) 전체의 고도가 낮아졌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행복의 경제학>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한 나라, 민족이 어떤 몰락의 길을 겪을 수 있게 되는지 그 위험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에서의 삶을 회고하며 지역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새로운 책이다.
저자는 먼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의 허구와 모순성에 대해 고발한다. WTO, IMF 기구들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무역장벽의 해소,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으로 저개발국가들, 개발도상국들도 서구의 부유한 나라들과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실질적으로는 초국적기업의 막대한 자본주도로 국가가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부가 1%의 상위계층(부를 기준으로했을 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케다 가요코, 국일미디어)을 보면 이런 세계경제에 대한 개념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에서 자신들과 같은 성장정책을 펼치면 부국이 될 수 있다 한들 이미 열 개의 자원 중 아홉가지를 차지한후에 그런 주장을 펼친 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범위 안에서 판단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어서 진보라고 불리우지만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수치에 대해서는 묵살하는 경제학적 지표 산출방법의 오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착취의 역사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국가들이 세계화 필요성을 역설한다는 점,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강제성을 띈 무역, 환경 파괴 등의 문제를 차례로 다룬다.
책은 이런 문제점을 언급한 후에 그 대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저자의 지난 책과 마찬가지로 그 대안은 바로 지역화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지역화의 개념은 폐쇄주의, 국수주의가 아니다.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유통과정의 비용손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험성과 파괴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지는 원자력발전, 초국적기업의 해외자본 투기와 세계시장 장악으로 말미암는 식량자급률의 하락 등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에서 돌이켜 참으로 ‘지속가능한 행복의 경제학’을 이루어 내자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사상의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경제성장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우리는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자신을 희생한다.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허락된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로가닉, 마을공동체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종교’아래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라도 사회적인 합의와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져 지속가능한 성장과 행복한 삶을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