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꼭 읽어야 할 20세기 세계사 - 세계를 바꾼 결정적 장면들
이영숙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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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20세기를 안다는 착각..

저는 가끔...
그래도 쫌 안다고 믿는(?)
이상한 확신을 안고 살아갑니다.

20세기 세계사도 그랬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한국 전쟁, 인권운동 등등..

그동안 저는
너무 얕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역사를 이해한 게 아니라,
정리된 결론만 소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여러 내용들이 기억에 남지만..
저는 특히 두 가지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각각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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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반도, 냉전의 압축판이 되다

한국사도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파편에 불과한 역사인데..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게 되면..
한국사와 세계사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살면서
계속 더 경계해야겠습니다.

한국 전쟁은 단순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을 재건하며
자본주의 진영을 결속했고,
소련은 동유럽을 위성국으로 묶으며
사회주의 블록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38선은 임시선이었지만
곧 체제의 경계가 되었고,

남쪽에는 이승만 정부,
북쪽에는 김일성 정권이 들어섭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은 하루아침에 폭발했지만..
그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조지프 스탈린의 무기 지원,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
딘 애치슨의 방위선 발언,
그리고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이 불참한 '우연'까지...

트루먼은 즉각 개입을 결정했고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장됩니다.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지만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 휴전이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아픔을 안고 살고 있죠.

137만 명....

이 숫자는 단지 사망 통계가 아닙니다.
이념이라는 거대한 언어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집어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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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소녀의 등굣길이 바꾼 역사

다음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전쟁이 국경의 선을 긋고 있을 때,
미국 안에서는 '인종의 선'을 허무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캔자스주 토피카.

용접공이던 올리버 브라운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중 큰딸 린다 브라운은
매일 아침 일곱 블록 거리에 있는
백인 전용 학교를 두고도 더 먼..
흑인 전용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라운은 교육위원회에
전학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합니다.

"섬너 초등학교는 백인 학교이기 때문"
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13명의
흑인 학부모, 20명의 아이들과 함께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역사적 판결을 내립니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이것이 바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입니다.

3년 뒤인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는
리틀록 통합 위기가 벌어집니다.

아홉 명의 흑인 학생 (일명 '리틀록 나인')이
백인 전용이던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하려 했습니다.

당시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거부했습니다.

군인들은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막았고,
백인 군중은 욕설과 위협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개입으로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는 연방군을 파견해..
학생들을 보호하며 등교시키도록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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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여러 장면들이 와닿았지만..
저는 특히 이 두 장면을 읽으며
분명히 느낀 바가 있습니다.

20세기는 힘이 어디까지
폭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시대였고,
동시에 용기가 어디까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 시대였습니다.

직전 세기인 20세기를 모르면..
우리는 현재를 읽을 기준을 잃을 수 있습니다.

늘 그렇듯,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요..

힘의 논리가 국제 질서를 흔들 때,
차별의 언어가 다시 고개를 들 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그 답은 과거 속에서 배운 사람들만이
조금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어쩌면..
'역사의 쓸모'가 아닐런지요...??

두 장면에 대한 디테일은..
하단에 있습니다.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한번은꼭읽어야할20세기세계사
#이영숙 지음

#블랙피쉬

20세기의 빛과 어둠..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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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역사
#바닿늘세계사



아래에서부터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세계사 속의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기까지 계속된 전쟁. '6.25 전쟁' 또는 '6.25 사변'으로 불리곤 하는 전쟁이 있지.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전쟁.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남과 북 사이의 내전. 사망한 사람이 137만 4,195명에 이른다고 하는 그 전쟁 말이야. 여기서는 세계사 책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흔히 일컬어지는 대로 '한국 전쟁'이라고 표기해 볼게. 앞의 사진은 한국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 피란길에 오른 모습을 담은 거야.
마셜 플랜Marshall Plan, 베를린 공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등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강대국 미국과 소련 간의 견제책이, 1950년에는 아시아에서 시험되었어. 한국, 바로 우리나라에서였지. 한국 전쟁이야 사실 우리나라 국민치고 모르는 이가 없겠지. 국사 시간에도 배웠을 테고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도 다들 알고 있을 테니 세계사 책에서까지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여태 쓴 적이 없었어. 그렇지만 20세기 세계사에서는 한국 전쟁이 세계적으로도 의미가 크기 때문에 한번 써 보기로 했어. 국내의 여러 사정과 상황과 관련 인물들이 있지만, 많은 부분은 국사 시간에 배우기로 하고 여기서는 세계 각국과 관련해서 접근해 보려고 해.
우선, 누구나 알듯이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았어. 독립운동가들이며 임시정부 인사들이 일본 정복자들을 쓰러뜨리려 수차례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하진 못한 채였지. 그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은 일본에 대항해서 함께 싸웠어. 전쟁이 끝난 후, 두 강대국은 어떤 사이가 됐을까?


일본이 물러간 뒤, 한반도는 어쩔 거야?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났어. 전쟁 막바지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원자폭탄 피폭 이후 항복했지. 일본이 패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지만, 슬프게도 한국 문제는 끝나지 않았어. 연합국들은 한국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그간 일제와 끊임없이 투쟁한 공을 생각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기로 약속했어.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세 나라의 정상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이미 나온 얘기였지. 당시 만주 지방에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있었는데, 소련이 참전하면서 만주국 군대와 만주의 관동군(일본군)이 급격하게 붕괴했어. 같은 연합군인 소련이 적군인 일본을 붕괴시키면 기뻐해야 할 일이겠으나, 이즈음 이미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표면만 같은 편이고 속으로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싹터 있었어. 미국은 소련이 만주국과 관동군을 부수고 나면 더 아래로 내려와 한국 전역을 차지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돼. 그래서 소련에 위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의했지. "한반도로 내려오더라도 38선까지만이야. 38도 밑으로는 우리 거야~." 이에 소련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남한, 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어. 우리나라 땅이지만, 우리 의견 같은 건 끼어들 여지조차 없이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정한 거지. 요즘 말로 한국은 패싱을 당한 거야.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정세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급격히 재편되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힘을 합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싸웠던 사이였지만 이제는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지. 냉전 체제하에 미국과 소련이 대리전을 하는 양상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한반도가 그 시험대에 올랐어.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려 했으나 파행을 겪었어.
한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과 소련은 1946년에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회담을 열었어. 그러나 그들은 생각 차이로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없었지. 한국이 소련 공산주의자에 친화적인 새 정부에 의해 통치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미국 동맹들에 의해 지배될 것인지 의견이 갈렸고 좁혀질 줄 몰랐지. 정치가들이 여전히 토론하는 동안, 별도의 정부 두 개가 한국에 세워졌어. 남쪽에서는 이승만이 미국에 지지하는 자본주의 정부를 세우고, 이에 질세라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공산주의자 정권을 세우게 된 거야. 남북한에 각각 단독 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이를 막기 위한 남북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남북한에 순차적으로 분단 정부가 들어섰어.
1948년 소련 군대가 한반도 북쪽에서 철수했고, 1949년 미군이 남쪽에서 철수했어. 외국 군대가 물러가고 이제 남북으로 마주하게 된 남한과 북한은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어. 남북 양측 모두 서로 으르렁대며 공공연히 기싸움을 해 댔어. 지도자들이 동족상잔(*동족끼리 서로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다는 뜻)을 겪더라도 잃어버린 반쪽의 땅을 되찾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 말이지. 당시엔 오늘날처럼 휴전선이나 비무장 지대 같은 것으로 철저히 막혀 있기 전이라 남과 북이 마음만 먹으면 오가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나 봐. 그렇다 보니 1950년쯤에는 38선 지역에서 소규모의 국지전이 계속 벌어 졌어. 남한과 북한 주민들이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서 공격하고 상대 주민을 죽이는 학살극과 보복 행위가 자주 일어났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원한은 깊어져 갔거든. 크고 작은 싸움과 살상이 계속 이어졌어. 그러다가 마침내 전면전이 시작된 거지. 게다가 1950년 1월 12일에 미국 국무 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애치슨 선언도 북한의 마음을 쑤석(*함부로 자꾸 들추거나 쑤시다)였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방어해 줄 수 있는 한계선이라며 선언한 애치슨 라인에 어찌 된 영문인지 대만과 한반도가 빠져 있었거든, 이를 보고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이 남한을 내버려둘 거라고 북한이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도 커.

6월 25일, 김일성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땅을 방어하기 위해서' 남한의 말에 의하면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느닷없이' 북한이 남한을 정말 침략하기 시작했고,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어.
김일성의 도발에는 다 이유가 있었지.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에 최신식 무기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는구나. 또한 당시 얼마 전까지 중국에서 공산군을 도와 국민당 정부와 싸우던 북한 군인들이 돌아왔고, 중국 역시 전쟁이 시작되면 북한을 돕겠다고 은밀히 약속한 상태였거든.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소름이 돋는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2월 발발) 때 북한이 러시아를 도왔잖아? 이제 도움을 받은 러시아가 북한에 뭐라고 말할까를 짐작해 보니 말이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뒤를 봐주기로 하니까 그것을 믿고 전쟁을 시작했어. 그러니까 한국 전쟁은 단순히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 나라가 얽혀 있던 세계의 전쟁이었어. 이제 공산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이 충돌하게 되었어. 남한과 북한을 앞세워 대리전을 하게 된 것이지.


미국은 왜 남한을 도왔나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미국은 즉시 행동했어.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우선 남한을 위해 싸우도록 우리나라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에서 미국 군사들과 전쟁용 비행기를 보냈지. 그다음에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설득하여 자신을 돕도록 했어.
미국 주도로 6월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북한군이 즉시 전투 행위를 중지할 것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가결했어. 북한이 이 결의안을 무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에 대한 무력 제재안을 통과시켰어. 그 결과 미국을 필두로 영국, 캐나다 등 16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이 파병되었는데, 이것은 유엔 창설 이후 최초의 파병이었다고 해.

남한에 대한 군사 지원을 의결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지상군이 파견되었어. 1950년 7월 1일 최초의 미군 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이래로 총 178만 9천 명의 병력이 한국 전쟁에 파병되는데, 이 중 3만 6,940명이 전사, 9만 2,134명이 부상, 3,737명이 실종, 4,439명이 포로가 되었어. 한국 전쟁 기간 미군은 유엔군 지상 병력의 50.3%, 해상 병력의 85.9%, 공군 병력의 93.4% 등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인 소련은 왜 남한을 위해 유엔군을 파병한다는데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의외로 소련이 방해하지 않았던 데엔 사연이 있었어. 당시 소련이 다른 일로 유엔에 보이콧을 하던 중이라, 거부권을 행사해야 할 즈음에 안전보장이사회에 결석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어. 이런 우연으로 인해 유엔은 트루먼의 미국과 함께 한국 전쟁에서 활동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어. 또 다른 설로는,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을 두려워한 소련이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일부러 미국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표결을 안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알다시피 미국은 이미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어. 소련이 자체 핵폭탄을 개발한 것은 1949년 8월 29일로 알려지므로 한국 전쟁 당시 이미 소련도 핵폭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폭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알고 있던 스탈린으로서는 가능한 한 미국과의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지.

7월 1일 최초로 남한을 돕기 위해 미군들이 왔어. 남한으로선 정말 다행이었지. 북한은 물론 그 뒤에 있는 소련, 중국과도 싸워야 할 판인데 미국이 돕겠다고 나섰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런데, 여기서 잠깐. 미국은 왜 남한을 돕고자 했던 걸까? 중국이나 소련처럼 한반도에서 가깝지도 않은데, 그 먼 곳에서 자국의 젊은이들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말이야.
전쟁 발발 연도가 1950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워. 그 시기는 자유 진영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특히 심하던 때였거든.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전년인 1949년에 서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두 가지나 있었어. 하나는 마오쩌둥이 중화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일이었어. 두 가지 모두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세력이 크게 확장한 것을 보여 주는 일이지. 작고 고만고만한 나라도 아니고, 땅덩어리로나 인구로나 대국인 중국과 소련이 적국이 되었으니,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 자본주의 국가들은 끔찍하고 섬뜩한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어. 너무나 빠르고 광범위하게 세력을 키워 나가는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였어.

거기다 미국에는 또 다른 일 하나가 더 겹쳤어. 앨저 히스라는 자가 1949년에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1949~1950년에 걸쳐 재판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소련에 국가 기밀을 넘겨준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형을 받은 거야. 문제는 그가 국무부의 고위 간부였다는 거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알타 회담에도 참석했을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있던 자였어. 국가 고위 공무원으로서 원만한 국가 기밀은 다 알고 있던 자가 간첩 단원이었다니, 얼마나 기겁할 노릇이었겠니! 앨저 히스의 간첩 사건으로 뒤숭숭한 정계에 1950년 2월부터는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 해 내야 한다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간 '매카시즘' 광풍까지 더해졌어.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각심이 한층 고조되어 있었지. 그래서였겠지. 한국 전쟁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서방 세계는 공산주의 세력에 맞설 의지로 충천(*하늘을 찌를듯)해 있었어, 그랬기에 유엔에서 남한을 위해 유엔 군대를 보내기로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던 거야. 그 결과 유엔군이 한국 전쟁에 참가하여 남한을 돕게 되었고 말이야.


중국은 왜 북한을 도왔나

한국 전쟁 초기에는 북한 인민군이 유엔군 병사와 국군보다 남한을 앞서 휩쓸어 나갔어. 북한군은 파죽지세(*승리 흐름을 타고 계속 이겨나가는 기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지. 부산만 남기고 남한 대부분의 땅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을 즈음,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변했고 힘겨운 싸움 끝에 미군은 인민군을 38선 너머 북한 깊숙이 밀어 넣었지.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부까지 북상했어. 이제 한반도가 통일되나 싶던 그즈음 갑자기 새까맣게 군인들이 밀려왔단다. 중국이 참전하여 인해전술을 펼쳤던 거야. 인해전술이란 말은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이 이름 붙였다는데, 중국 병사들이 마치 바닷물처럼 끊임없이 밀려 내려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대.

여러 전투가 다 치열했지만 특히 '장진호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어. 미군 제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근처 산속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의 공격을 받았고,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2주간 사투를 벌이다가 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전투를 일컬어. 일단 지명을 듣는 순간 얼마나 혹독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니? 무려 개마고원이란 말이지. 게다가 11월 말부터 12월 초순이니 가만히 있어도 얼어 죽을 날씨였을 테고 말이야. 미군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 하지만 이 힘겨운 전투를 버텨 내었기에 결과적으로는 12만여 명의 중공군이 남하하는 것을 지연시켰고, 그 덕분에 미군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군함 193척에 태워 남쪽으로 탈출시킨 흥남 철수 작전이 가능했다고 하지.

중국 공산당 군대라 하여 흔히 중공군이라고 부르는 중국 군사들이 물밀듯 쳐들어왔어. 그들은 중국 정권을 차지한 마오찌둥이 보낸 군사들이었어. 전쟁 한 해 전인 1949년,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였어. 새롭게 나라를 열었으니 이것저것 할 일이 태산이었을 텐데 마오쩌둥이 인해전술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을 한국 전쟁에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병사들 중에는 마오쩌둥의 장남까지 있었는데 말이지. 아마 가만히 있으면 미국이 중국 국경 너머까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 북한이 패배하면 그다음은 중국이라는 생각, 순망치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어. 일설에는 소련이 뒤에서 부추겼다고도 해.

마오쩌둥은 만일 남북한 모두 미국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면 그때까지도 미국이 밀고 있던 장제스가 좋은 타이완섬보다는 더 넓은 반도인 한반도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었어. 당시 장제스는 이미 타이완으로 건너간 상태였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그를 중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장제스 역시 "언젠가는 우리가 잃은 대륙을 되찾고야 말겠다"라며 공공연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단 말이지. 게다가 중국의 주요 공장들과 발전소들이 압록강을 따라서 한국의 국경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도 신경이 쓰였을 거야. 그래서 마오쩌둥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국경으로부터 뒤로 물러서라고 경고했어. 하지만 미국이 그의 경고를 무시하자 수십만 명의 중국 병사들을 보내 압록강 건너 북한을 돕도록 했던 거야.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병사가 쏟아져 내려왔고,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들은 유엔군의 전선을 뒤로 밀었어. 새롭고 치열한 전쟁이 시작됐어. 이 전쟁은 사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어. 비록 두 나라 모두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중공군이 참전하자, 북한 지역 깊숙이 진군했던 유엔 연합군은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후퇴해야 했고, 서울까지 다시 내주게 되었어. p. 10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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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은 왜 소송을 제기했나

올리버 브라운은 캔자스주의 토피카시에 살던 용접공이었어. 그가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이라 불리는 사건이 시작되었지. 그가 소송을 제기한 데는 사연이 있었어.
브라운에게는 두 딸이 있었어. 그런데 그중 큰딸인 린다 브라운이 학교에 다니는 데 문제를 겪으면서 의문이 생겼던 거야. 당시 흑백 차별로 인해서 린다 브라운은 일곱 블록만 걸어가면 갈 수 있는 집 근처의 학교를 두고 매일 아침 여성 블록을 걸어 버스 정류장까지 간 뒤,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멀리 먼로 초등학교까지 가야 하는 고충을 겪었지. 브라운은 딸이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섬너 초등학교에 가면 편하겠다고 생각했지만, 토피카 교육위원회는 이를 거부했어. 섬너 초등학교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이기 때문에 흑인인 린다가 다닐 수 없고 린다는 흑인 전용 초등학교인 먼로 초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 이에 브라운은 다른 흑인 부모 13명 및 그들의 흑인 자녀 20명과 함께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 교육 평등 차원에서 이게 맞는 일인지를 법원에 따져 묻기로 한 거였어.

학교를 흑백 인종으로 분리한 제도가 인종 차별과 관련 있지는 않은가, 그러므로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별것 아닌 문제처럼 보이지만, 당시 이 사건은 판결이 선고되기까지 2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해. 합의 과정에서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고 하고 말이야.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는 연방대법원에서 '분리된 교육 시설은 그 자체로 불평등하다'는 판결이 내려졌어. 이것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사건이라고 한단다. 1954년에 내려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피부색에 따라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내용이었어. 이로써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분리하되 평둥하다'라는 관념이 공립학교에서 더는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됐지. 인종 분리에 관한 한, '분리된 교육 시설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니까 말이야. 이 판결은 인종 차별 문제 개선에 큰 공헌을 한 기념비적인 판결로 기록되었지.


리틀록 사건(1957년)과 리틀록 나인(9)

그 판결이 있고 나서 약 3년 뒤인 1957년, 이제는 미국 남부 아칸소주의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났어. (…) 앞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사건처럼 이것 역시 미국 흑인 학생들의 백인 전용 학교 등교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었어. 초등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였고, 이전 사건 이래 3년이 훌렀으니 어떤 발전이나 진전이 있었을까? 어디 한번 보자고.

앞서 언급했듯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판결에 따라 피부색을 이유로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할 수 없게 됐어. 흑백으로 분리된 학교는 인종 차별 요소가 있으므로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로서, 흑인들에게 아주 고무적인 판결이었지. 그런데 헌법에 위배된다고만 했지 언제부터 시정하라는 강제 조항이 없었어. 그래서 시행이 유야무야되고 있던 차였어. 백인들로서는 내키지도 않는 것을 강제하지도 않는데 굳이 따를 필요가 없었겠지. 이에, 유색인종 차별 폐지 운동 단체에서는 인종 차별이 심하던 아칸소주의 리틀록에서 백인 학교에 흑인 학생을 등록시켜 보기로 했어. 원래는 17명의 흑인 학생이 시도하려 했으나, 이들 중 여덟 명은 포기하고 포기하지 않은 아홉 명의 학생이 나서기로 했지. 이후 이들은 '리틀록 나인(9)'으로 불리게 됐어.

1957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 이사회는 해당 학군 교육감의 결정하에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만장일치로 허가한 후 점진적으로 흑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3년 사이에 그래도 발전이 있었네 싶었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아니었어. 수많은 백인 학부모들이 반대하고 나선 거야.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들일 수가 없다는 거였어.


주지사가 대통령 말을 안 듣는다고?

흑인 학생의 둥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종 차별주의자 중에는 당시 아칸소주의 주지사였던 오벌 포버스도 포함되어 있었어. 그는 전형적인 백인 부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주지사인 그 부터 여태껏 백인들이 다니던 학교에 흑백 차별 없이 학생을 받는 것이 싫었던 거야. 그래도 보통 사람도 아니고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법원의 명령을 앞장서서 따라야 정상일 텐데, 원걸….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는 어이없게도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했어. 아칸소주의 군인들을 학교로 보내 흑인 학생들을 강제로 내보내도록 했던 거야.
첨부된 사진은 1957년 9월 4일 아침에 찍은 거야. 다시 그 사진을 보렴. 흰옷을 단정하게 입고 등교하는 학생은 엘리자베스 엑퍼드라는 열다섯 살 난 학생이었어. 그녀는 아칸소주 리틀록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록하고 등교하는 중이었어.

엘퍼드의 말에 의하면 학교에 가려 했더니 정문에서부터 군인들이 흑인 학생들을 째려보면서 곤봉을 들고 위협했다는 거야. 백인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주변에 모여들어 흑인 학생들에게 욕하고 고함지르고 난리가 났었대. 미국 나이로 열다섯 살이면 우리나라 중3이나 고1쯤 되는 나이니까 감정 이입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학교에 가려니까 많은 시선이 내게 쏠려 있고, 같은 학교 학생들도 한 공간에 있는 게 기분 나쁘다고 대놓고 욕하고 나가라고 고함지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게다가 그렇게 문전박대당하는 이유란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고난 피부 색깔 때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억울하고 분하고 화나고 겁도 나고… 1분 1초가 조마조마하고 참담한 심정이었겠지. 사진을 보면 엑퍼드가 큼직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구나.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자신의 눈빛과 표정을 감추려고 그런 게 아니었을까? 리틀록 나인(9)이라 이름 붙여진 흑인 학생들은 강압적인 분위기에 얼마나 두려웠겠니. 자세를 꽃꽂이 하고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걷는 엑퍼드가 겉보기엔 당당해 보여도 속으론 그녀도 분명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거야.

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저항이었어. 그날 리틀록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귀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거든. 대통령은 그 아칸소주 주지사의 행동에 몹시 화가 났어. 흑인 학생들의 인권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건 주지사가 대법원의 명령과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한 처사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지. 일단 권력 서열상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한 거야. 주지사의 행태가 쾌씸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태를 파악한 뒤에 미국 국가(연방) 단위의 군사들을 리틀록의 센트럴 고등학교로 보냈어. 주 단위보다 국가(연방) 단위가 더 큰 개념이니까 더 상위로서 당연히 힘이 더 세지.

엑퍼드와 친구들, 일명 '리틀록 나인'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내 준 연방 군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 들어가 교실까지 입실할 수 있었어. 상상해 보렴. 얼마나 불편하고 껄끄러웠겠니. 처음 간 학교라 안 그래도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였는데, 누구도 환영해 주지 않는 곳에서 자리에 버티고 있기란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이제 겨우 중고등학생 나이밖에 안 된 그들에게 말이야.
하지만 학생들은 꿋꿋이 버텨 냈단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흑인들, 그리고 자기보다 어린 흑인 아이들에게 백인 아이들과 동등한 학업 환경을 누릴 권리를 갖게 하려면 누군가는 처음에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내어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분명하게 했지. 연방법은 그 어떤 개인이나 극단주의자 폭도에 의해 어겨져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대통령으로서 법이 저해되는 것을 방지하고 연방법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사용할 거라는 것, 그리고 바른 생각을 하는 시민이라면 모두 이 사건에서 정의와 페어플레이가 승리하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이야.

이런 우여곡절 끝에 흑인들은 인종과 관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어. 이 사건은 미국 흑인 민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의 로 평가되고 있어. 불의는 이렇게 의식 있는 사람들의 의문 제기로 시작하여 용기와 인내와 끈기로 조금씩 조금씩 개선되는 것 같아. 그 결실로 1964년 존슨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하여 흑인의 시민권이 통과되었어.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인종과 상관없이 법에 따리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된 거란다.
흑인과 백신이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 반발심도 컸단다. 흑인 인권운동을 벌이던 마틴 루서 킹 목사에 대한 반감으로 그의 집에 불을 지르던 만행과 폭력은 결국 1968년 킹 목사까지 삼쳤지. 킹 목사가 환경미화원들을 돕기 위해 갔던 곳의 숙소에서 백인이 폰 총에 맞아 사망했니까 말이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을 지도하면서였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라 이 책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혹시 이야기가 낯선 친구들이 있다면. 반드시 해당 이야기들을 찾아서 함께 알아 두면 좋겠어.


한 걸음씩 차근차근

다시 '리틀록 사건' 당시로 돌아가서 얘기를 이어 보자면, 흑인들의 인식은 나날이 깨어 가고 있었으나, 백인들은 여간해선 꿈쩍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 백인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 백인 부모들은 자녀를 공립학교에서 빼내서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학교를 안 보내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대. 하지만 리틀록 사건에 고무된 흑인들은 차츰차츰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갔어. 예를 들자면 흑인의 출입을 금하는 식당에 들어가서 앉아 있는 연좌 농성인 '싯 인sit-in 투쟁' 같은 것도 벌였어. 흑인 출입 금지라고 안내문이 붙은 가게에 가서 주문하고 그냥 앉아 있는 거지. 불편을 끼쳐서라도 시정을 촉구하는 행위였지. 블랙 팬서의 결성, 이후 제시 잭슨의 투표 운동 등인 종 차별 철폐를 위한 다양한 운동과 역사적 사건들을 거쳐서 지금의 단계에 이른 것이지. 아직도 흑인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해. 그래도 많은 이들이 노력한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평등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 p. 307~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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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꼭 읽어야 할 20세기 세계사 - 세계를 바꾼 결정적 장면들
이영숙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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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안다고 착각해 온 것은 20세기의 작은 파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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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 소슬지
원도 지음 / 한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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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죽지 마, 죽긴 왜 죽어…

죽음에 대해 나름..(?)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건 '죽고 싶다는 생각'
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고..

'잘 죽고 싶다는 생각'
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거 같습니다.

살면서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을 겪다 보니,
약간은 무뎌질 수도 있는 거 같아요.

벌어서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생각했던 기간이 길었습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
(아니 사실은 걸었..)습니다.

그런데 몇 차례인가
호되게 자빠져 보니까..
(몸이 자빠지면 필연적으로..
마음까지 자빠지는 거 같아요..)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그동간 나의 소중한..
외양간을 너무 방치했구나."

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속담을 결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소를 잃었으니..
'오히려' 외양간을 '반드시' 고쳐야죠.

소를 키울 게 아니라면
리모델링을 해도 되고...
(저는 기왕이면 서재로 만들고.. 싶..
그래서 출판계가 좋아하는 '프로적독러'
'빛과 소금 독자'가....될..ㅎㅎ..)

제가 산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생각이 조금 더 자유로운 걸 수도 있는데요..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독사에 물려서 죽을 뻔한 경험은..
그저 운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살아났으니 결국은 운이 또 좋았죠..)

그런데 어느 정도는
제 선택에 의해 바뀐 측면도..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골이 우물이었다면..
적어도 우물 밖으로는
나온 거 같아요.

제가 본 우물 밖의 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았어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상황은 저마다 다를테지만
다수에 반드시 섞일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두쫀쿠 안 먹고도..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궁금하긴 하지만..
두쫀쿠 보다 저는 맥주 한 캔이 더 좋습니다.
심지어 더 싸... 고.. ㅎㅎㅎ...

저는 살아야 할 이유를 최소 한 개 이상
품고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소한지 거창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소한 게 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내일 아침, 고향에서 받아올 예정인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오곡밥(사실은 잡곡밥)이..

저는 당장 떠오릅니다.

---

이 소설의 제목에는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소슬지에게..
죽지 말라는 제목이니까요.

하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죠..

저는 모든 픽션은 그 속에..
논픽션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가의 경험에 의한 생각이 담길테니..)

제가 느끼기에 이 책은..
이미 죽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소슬지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지 말라고,
살 이유를 찾으라고...

생각보다 찾아 보면 많다고...

그리고 죽을 땐 죽더라도
이왕이면 좋게 죽으라고...
(좋은 기억을 품고 떠나라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후회를 이승에 덜 남기는 죽음입니다.

나중에 바뀔 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저도 참고하겠습니다.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죽지마소슬지
#원도 지음

#오팬하우스
@오팬하우스

#한끼
@한끼

#경찰관속으로 #추천도서
#독서 #소설 #책스타그램

죽기 전에
빛과 소금이 될테야..ㅎㅎ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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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소설



내일이 온다고 달라질까? '못 잔 잠은 죽어서 잔다'는 말은 싹 다 거짓말이었다.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 살아 있을 때 못다 한 뭔가를 할 수 있는 여가 시간이 절대 아니었다. 멈추지 못한 생각은 내가 가장 불행했을 때를 일곱 번쯤 복기하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물론 잠이 들어서가 아니라. 하주가 퇴근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주의 이름은 반장의 말을 유추해 알게 되었다. 변하주라는 이름의 여자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에어팟을 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다. 무슨 노래를 듣고 있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남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사는 게 너무 버거웠으니까. 오늘뿐인 내 삶에서 남까지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도 집중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내가 무슨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 있는지, 팔자가 사납다는 핑계로 그냥 되는대로 산 건 아니었는지.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뒤를 따라다니며 지난 삶을 반추하는 동안, 내 몸은 점점 불쾌할 정도로 투명해졌다. (…)
퇴근하고 잠들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하주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경찰관님."
함께 잠들지 못하는 나는, 그때부터 계속 쭈그려 앉은 채로 하주를 불렀다.
혹시 영원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래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완전한 귀신으로 이승을 떠돌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부러 하진 않았다. 막연한… 아주 막연한 희망이었지만, 왠지 하주가 내 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그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보기로 했다. 지금껏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온 나에겐 실낱같은 희망이 곧 확신으로 보였으니까. 초라하게 흔들거리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렇게 하주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하주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지금 내 상태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소위 '구천을 떠도는 한 많은 영혼'쯤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리고 하주가 이 황당무계한 결론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진 딱 3분이면 충분했다.
"돌겠네. 이게 뭔 일이래."
혼자 중얼거리던 하주는 그때부터 구마, 퇴마, 영혼 달래기, 저승 가는 법 등 다양한 단어를 조합해 유튜브와 네이버에 검색하며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여러모로 체력이 넘치는 사람 같았다. 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우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을 때 이승의 어딘가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까? 나는 무릎을 감싸안은 자세로, 나 대신 내 승천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하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도 안 돼요?"
"뭘 더 걱정하겠어요. 이미 죽었는데. 제 몸도 직접 보셨잖아요."
"아, 그쵸. 돌아가신 건 맞긴 한데…."
내 이름이 붙은 수첩을 덮었다가 다시 펼쳐 몇 줄 안 되는 정보를 읽기만 반복하던 하주가 물었다.
"왜 저승을 못 가시는 걸까요?"
"글쎄요…."
"혹시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요?"
"원한까진 잘…."
내 태도에서 의지가 없다는 걸 느낀 건지, 하주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근데 절 발견한 사람이 누구죠?"
"박미자 씨요. 슬지 씨가 살던 원룸 건물 주인이라고 하시던데요."
하주의 이야기를 듣고 웬 장면 하나가 곤두박질치듯 머릿속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주가 우리 집으로 출동 나오기 전, 현관문을 몇 번 두드리다 대답이 없자 마스터키로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미자의 모습이었다. 미자는 참 무례한 사람이었다. (…)
그런 미자가 죽은 나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니,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미자는 소리를 지르며 7평짜리 원룸을 돌아다니다 화장실에서 나를 발견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미자는 한참 동안 내 몸을 내려다보다 경찰에 신고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어쩌려고 두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미자는 집 밖으로 나가려다 책상 위에 놓인 내 휴대전화를 발견하곤 냉큼 주머니에 넣었다.
"굿할 비용이라도 대야지. 진짜 재수 옴 붙었네!"
유품을 챙길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자였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순간 하주에게 미자가 휴대전화를 훔쳐 갔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생전 처음 보는 귀신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 주는 하주는 알고 있을까? 세상엔 상상 이상의 악의를 아무렇지 않게 실행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p. 320~325




작가의 말

나는 생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살아서 뭐 하나, 어차피 내 인생은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다가 죽음으로 끝날 텐데. 끝없는 고통만 겪다 끝날 거라면 차라리 그 끝을 내가 앞당기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달고 살았다. 비판과 부정, 회의 같은, 보기만 해도 입이 텁텁해지는 단어들이 나의 수식어였다. '였다'라고 말하는 건, 지금의 나는 꽤 많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뻔하고 시시한 결말이지만. 무엇이 '툴툴이', '징징이'였던 나를 바꾸었나. 종교도,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도 아니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순간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이 따랐지만, 모든 감정의 파도가 끝난 다음 고요히 복기해 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감정 소모에 가까웠다. 경찰관으로, 과학수사요원으로 일하면서 숱한 죽음을 마주한 결과도 아니었다. 몸이 피곤해서 툴툴거릴 체력조차 없이 꾸역꾸역 살다 보니, 어느새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난파선이라 여졌던 인생의 배도 어쩌다 보니 제 항로를 찾아 적당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면서도 항로를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배를 보며 깨달았다. 이 모든 풍경은 내가 살아 있기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을. p. 35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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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 소슬지
원도 지음 / 한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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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말라고, (살 이유를 찾으라고...) 이왕이면 좋게 죽으라고...(좋은 기억을 품고 떠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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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고백 머묾 세계문학 사랑 3부작
기 드 모파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머묾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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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기 드 모파상
작가를 아시나요?

저는 이 책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여전히 모르는 거 투성입니다. 😂)

물론 이름은 자주 들어본 거 같습니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모파상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습니다.

엄청난.. 분이었더군요.
단편 쪽에서는 3대장 수준인 거 같더라고요.

선정하는 주체에 따라
안톤 체홉, 에드거 앨런 포, 모파상을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뽑기도 하고..

오 헨리 까지를 포함해서
4대 단편소설 작가로 꼽기도 하더군요.

저는 아직 전부 모릅니다. 🥲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모파상의 경우는 심지어
교과서에도 자주 인용되었다고..;;

아직 문학은 입문 수준이어서..
알아가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

제가 느끼기에..
모파상은 인간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관찰하는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냥도 아니고 꽤나 냉철하게..)

그의 세계를 관통하는 문장은 이거 같아요.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

이 책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319쪽이 책에 찍힌 마지막 페이지니까..
분량이 대체로 적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 적기에는 제 역량도 부족하고
분량도 너무 길어질 수 있기에..

4편을 위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대체로 그렇지만 해당 4편 역시..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달라 보여도
사실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 가족, 낭만, 희망 같은 단어를
현실이라는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실험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결과 역시 비슷합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

1. 『보석』 사랑보다 빠른 속도의 타락

한 남자가 있습니다.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존재라고 믿던 사람.

그런데 아내가 죽고 나서 알게 됩니다.
그녀가 즐겨 끼던 '가짜 보석'이 사실은
외도의 대가로 받은 진짜 보석이었다는 걸요.

여기까지는 비극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입니다.

그는 슬퍼하다가 보석 값을
확인하고 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부자가 됩니다.

이 작품이 무서운 이유는
남편이 타락해서가 아니라

그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 그 메시지가..
너무 강렬하게 담겨 있습니다..;;;)

"나도 부자다.
나에게는 20만 프랑이 있다!"
p. 38

---

2. 『첫눈』 사람이 얼어 죽는 방식

한 여자는 따뜻함을 원합니다.
감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하지만 남편은 다릅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온기 보다 비용입니다.

난방기를 원하는 아내의 말조차..
그에게는 낭비로 취급됩니다.

"당신은 여기 온 이후로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잖소."
p. 74

결국 그녀는 선택합니다.

추운 밤 맨발로
눈 위를 걷습니다.

살려고가 아니라
끝내려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차가운 건
어쩌면 날씨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남편... 같기도 합니다...

---

3. 『달빛』 사랑의 정체

남편에게 거절당한 여자가 있습니다.
감정이 갈 곳을 잃은 상태의..

그때.. 달빛, 호수, 시구, 밤공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에 빠집니다.
한 남자에게.. 그것도 푸욱..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밤의 분위기에...

"있잖아, 언니. 우리가 사랑하는 건
종종 사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야.
그날 밤, 언니의 진정한 연인은
달빛이었던 거야." p. 102

---

4. 『쥘 삼촌』 가족의 가격표

한 가족이 있습니다.
이 기족은 가난하지만..
희망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서 큰돈을 벌었다는 삼촌.

그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가족의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삼촌은..
부자가 아니라 배에서 굴을 파는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가족은 그를 못 본 척합니다.

돈이 사라지자
혈연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삼촌과 다시 마주치지 않으려고
생말로행 배를 타고 돌아왔어.
어머니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지."
p.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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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의지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사랑도 도덕도 가족도..
상황이 바뀌면 형태가 바뀝니다.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파상은 그것을
누구보다 뼈져리게 느꼈고..

그래서 이야기로 만들어서
모든 인류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바오바브나무를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듯이.....

요즘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이런 류의..
경고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가..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단편 좋아하시는 분들께..
특별히 더 강추입니다 !!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우주서평단

#첫눈고백
#기드모파상 지음
#구영옥 옮김

#머묾
#책읽어주는남자출판그룹

#세계문학사랑3부작

『첫사랑』도 나중에
챙겨서 읽어야지....ㅎㅎ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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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소설

@woojoos_story 모집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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