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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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웅진지식 하우스에서 절판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개정판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역사시간에 배웠지만 이회영에 대해서는 들어본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많은 업적을 이루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과 목숨까지 내놓은 이회영이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1910년 강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후 이회영의 여섯형제들은 명문가로 인정받던 자신들이 재산을 다 처분하고 전재산과 가족모두가 만주로 이주했다. 그들이 급하게 처분하면서 제값을 받지 못했던 총 재산은 현재의 가치로 따지자면 600억원이나 된다고 하니 이회영 가문의 대단함을 다시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 내가 살고있는 현대에도 그렇듯이 기득권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기는 참 어렵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하는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자신이 가진것을 나라를 위해 내어놓았던 이회영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래서 더욱 값어치가 있지 않았나 싶다. 나라면 아마도 그 많던 재산과 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나라를 위해 투쟁을 할 수있었을지 의문이다. 

만주로 이주하여 22년의 세월을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한 이회영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획한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고종의 밀입국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으로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다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가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되었을때의 나이는 환갑을 바라보는 57세때였다. 책을 읽다보면 역사시간에 배웠던 김종진이니 신채호니 하는 많이 들어보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한다. 김종진 역시 이회영이 그를 아나키스트로 만들려고했지만 그는 결국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기로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이을규는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나서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함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이회영의 형제들중 이시영만이 유일한 생존자였고 이회영 역시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대련으로 이동 중 정보가 누설되어 대련에서 검거되고, 그 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하고 만다. 책을 보다 보면 많은 사진들이 실려있는데 사건당시의 사진들이 보고 싶었던 나에게 현재의 사진이 실려있어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소장가치가 있는 책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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