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뿅뿅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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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은 명대사들
정덕현 지음 / 페이지2(page2)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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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지금 현재에 대한 집중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 현재가 어떤 선 같은 것으로 이어져 그것이 미래로도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관념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상관없이 현재로부터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갑자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가는 일이 가능한데, 다만 타인들은 그 변화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려 할 뿐이다. ‘분명 직장 상사와 큰 트러블이 있었을 거야.’
그러니 때론 묻지 말자. 괜스레 물어서 상처를 내는 일이라면 더더욱 피하자. 다만 "이유가 있었겠지" 하고 현재의 그에게 집중하자. 이건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가 과거에 어떤 일들을 해왔고 어떻게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인과에 맞춰 어떤 삶을 살 것이고 살아갈 것이라고 예단하지 말자. 그건 인생을 너무나 재미없게 만드는 것이고, 또한 우리 모두가 앞으로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스스로 잘라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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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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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아입니다. 정아가 손을 들어 멀리 진지 외곽에 펼쳐진 장군풀밭을 가리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르르 떨립니다.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한 용이가 달려 나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섭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여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도망치세요! 살고 싶으면 절대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오글오글 몰려 앉아 떨고 있는 여인들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이가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킵니다.
"북서쪽이에요. 무조건 북서쪽으로 가세요. 호랑이 산 반대쪽입니다. 일본군들은 모두 호랑이 산으로 몰릴 거예요. 북서쪽으로 하루를 넘어가면 삼기봉 자락에 있는 삼기 마을이 나와요. 얼른 뛰세요! 모두 살 수 있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온 용이 뒤로, 여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옵니다. 뛰쳐나온 여인들이 북서쪽 방향의 붉은소나무 숲속으로 사라집니다. 용이가 다케모노의 천막 옆에 매여 있는 주인 잃은 검정말에 훌쩍 올라탑니다. 놀란 다케모노의 말이 히히힝 울며, 앞발로 허공을 차는가 싶더니, 곧이어 불타오르는 막사들 사이를 뚫고 속력을 내 달려 나갑니다.
장군풀밭 끄트머리에서 말고삐를 잡고 순이를 기다리던 가즈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적의 700부대 진지가 공격을 받아 불타오르다니요. 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진지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가즈오는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중공군일까? 아니면 조선 독립군일까?’
이 엄청난 상황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는 가즈오의 두 눈에 멀리 장군풀밭 중간쯤에 머물러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가물가물 보이는 듯합니다.
"순이 씨와 아쯔이다."
확신한 가즈오는 더 지체하지 않고 말에 올라 장군풀밭으로 뛰어듭니다.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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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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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을 맞은 말이 하얀 콧김을 내뿜으며 재빠르게 내달립니다. 누런 밤색의 장군풀밭 중간 지점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 돌아가야 해요. 정아랑 다른 여자애들이 저 불타는 천막 안에 있어요."
애타는 순이가 애원합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빨리 가. 가즈오 님이 건너편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안 돼요. 저 혼자 갈 수 없어요. 문을 열어 주어야 해요. 문이 밖에서 잠겨 있단 말이에요."
가냘픈 순이가 이 순간만큼은 바위처럼 단호합니다. 아쯔이가 순이의 팔을 움켜잡으려는데, 순이가 완강하게 뿌리칩니다.
"저 혼자 안 가요. 저 불쌍한 애들 두곤 못 가요."
철썩!
아쯔이가 순이의 뺨을 때립니다. 순이의 고개가 옆으로 꺾입니다.
"네가 못 구해. 네가 다 못 구해. 어서 가. 너라도 구하란 말이야. 시간이 없어."
애가 탄 아쯔이가 순이에게 소리를 지르더니, 순이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습니다. 강제로라도 끌고 갈 모양입니다.
장군풀밭 건너편에서 중앙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가즈오의 시야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쯔이와 순이입니다. 높다란 장군풀 때문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합니다. 이제 잠시 후면 만날 수 있습니다. 50미터, 40미터, 30미터……. 애타게 기다리던 순이의 얼굴이 이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즈오는 반가운 마음에 순이의 이름을 소리쳐 부릅니다.
"순이 씨!"
아쯔이와 순이도 가즈오를 발견합니다. 아쯔이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가즈오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바로 그 순간,
어흐흥!
장군풀밭 속의 세 사람에게 포효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들은 소리는 분명 사람의 소리가 아닌, 성난 호랑이의 엄청난 포효입니다. 천둥 같은 맹수의 포효에 놀란 가즈오의 말이 갑자기 멈추려는 듯, 앞발을 허공으로 쳐듭니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가즈오가 말에서 떨어져 장군풀 사이로 뒹굽니다. 아쯔이와 순이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따라 동시에 뒤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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