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그건 커피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잔의 종이컵처럼 배출되었을 때 나를 집어 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내 졸업이 잘못된 주문이라도 된다는 듯, 나는 자판기 밖도 안도 아닌 투출구에서 멈춰버렸다. 내 안의 커피는 조금씩 식어갔다. 나를 조금 덜 외롭게 하는 건 방금 머리 위로 떨어진 또 하나의 종이컵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진, 그렇게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그러나 누구도 찾아가지 않는 종이컵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이 된다는 게 슬펐다. 비로소 내가 깔고 앉은 종이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나보다 조금 먼저 배출되었을 그 종이컵은 이미 식어 있었다. 나보다 조금 늦게 배출된 종이컵 역시 나를 비슷한 온도로 느낄 거였다. 미지근하게. 더 이상 뜨겁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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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에서 작품을 떨어뜨렸다. 물론 그건 진짜 〈떠난 사랑〉이 아니었다. 로버트는 내 손에서 떨어진 작품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네 작품이 소각될 때의 희열을 왜 거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짜 아우라는 소각할 때만 연기처럼 피어오른다고 했다. 그게 정 그렇게 싫다면 그 소각의 희열을 뛰어넘을 만한 이유를 대라고 했다. 나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답이 어딘가에 있기를 그 자신도 진심으로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예술혼은 태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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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설명해봐. 네 그림이 불타지 말아야 할 이유."
"내 그림엔 내 혼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 그렇겠지."
로버트는 ‘혼’이 소금이나 후추 정도 되는 것처럼 대꾸했다. 나는 더 설명했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지키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당신의 방식이 당신의 예술을 지켜온 것, 충분히 알아요. 그렇지만 이 작품만은 안 될 것 같아요. 작가 스스로가 원치 않는다잖아요. 이건 마치 사형 같아요! 나는 열심히 소리쳤지만, 로버트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전달이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단지 조금 귀찮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실용적인 이유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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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지면 필연적으로 더 고독해지는가? 빈궁해진 자에게는 가족조차 연락을 끊나보다. 옆집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의아하게 여긴 이웃의 신고로 주검은 뒤늦게 발견되고 경찰은 그제야 사망의 원인을 규명하고 유족을 찾아 나선다. 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孤獨死’ 대신 ‘고립사孤立死’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죽은 이의 고독이 솜털만큼이라도 덜해지진 않는다. 냉정히 말해서, 죽은 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 편에서 마음의 무게와 부담감을 덜어보자는 시도이다.
나 같은 일을 하면서 유족이 시신 수습을 거부하는 상황을 보는 일은 별스럽지 않다. 진작 인연이 끊긴 가족과 생면부지의 먼 친척이 느닷없는 부음을 듣고는 "네, 제가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선뜻 나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혹시 빚을 떠안지 않을까’ 하며 빛의 속도로 재산 포기 각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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