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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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손을 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스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다. 내 첫사랑은 열한 살 때 만난 부반장이다. 치아에 금속 교정기를 장착하고 이마엔 좁쌀 여드름이 퍼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아이였는데 그때 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정은 지나치게 차갑고 툭눈붕어를 닮은 돌출된 눈동자에 나를 향한 모멸의 불꽃이 이글거렸는데 그땐 그런 것조차 사랑스럽게 보였다. 왜냐고? 나에게 잘해 줬기 때문에. 부반장은 땅콩이 박힌 초코바와 열두 마리 종이 거북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줬다.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복잡한 감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반장은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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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그늘


조용한 책이 놓여 있고 나는 택시를 타고 멀리 간다 문을 닫았고 다시 열렸다 당신은 아직도 깜깜하다 그 컵처럼 떨어뜨린 소리 이렇게 어둔 구석이 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몇 단어들을 새긴다 다시 조용한 책의 표지

나는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고 오늘 닫은 몇 번째 문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문 뒤에는 또 문이 있고 문 뒤의 당신은 아직도 깜깜하다

더 오래 그럴 것이다 날카로운 소리에 손끝을 찔리고 어둠은 어디에나 있다 단어를 깔고 앉은 그늘 그것은 무척 조용한 책의 맨 뒤 나는 하얀 종이를 생각하고 사랑한다 떠밀려 올 수 없도록 그제야 이만큼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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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먹고 마시면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기계가 작동했던 몇 달 전에 새뮤얼이 보려고 틀었다가 계속 볼 기분이 나지 않아 금세 껐던 다큐멘터리였다. 혼자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즐기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이 오길 기다리는 게 훨씬 쉬웠다. 하지만 이제 그의 옆에는 공감과 관심을 소리 내 드러내줄 남자가 있다. 새뮤얼은 어느새 파도 아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새뮤얼은 섬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곳인지 오랜 세월에 걸쳐 배웠다. 섬은 어르고 야단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통렬히 체감한 시간이었다. 초목은 불친절했다. 같은 채소를 심어도 섬의 어떤 곳에서는 억세고 다른 곳에서는 재처럼 버석거렸다. 식물은 제멋대로 퍼지며 땅을 장악했지만, 모래와 바위로만 이루어진 황량한 땅이 길게 뻗어 있었다. 해안도 박정하긴 마찬가지였다. 반들거리는 큰 바위들에는 미역과 지의류, 새똥과 다닥다닥 붙은 조개류만이 제멋대로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주변에서 다시마 줄기들이 썩어가다 갈색 시체가 되어 아침마다 찾아와 꾸물대는 안개 속에서 파도에 허우적댔다.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 가장 무서웠던 건 마구 구르고 뒤채고 휘도는 파도였다. 고립보다도, 길들지 않는 땅보다도, 다른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럼에도 새뮤얼은 싫은 내색 없이 파도를, 그리고 섬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를 경외하려 애썼다. 그가 계속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돌담을 쌓은 건 아마도 물살의 공격에서 땅과 자신을 지켜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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