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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ㅣ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평점 :
그리고 신은 얘기나 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신'이 나타났다.
모든 사건은 순식간에, 그리고 정신 없이 나타났다.
이혼한 아내의 현 남자에게 코를 맞아 코뼈가 부러져 간 병원에서 만난 한 광대가 돈을 내밀며 심리 상담사인 야콥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누가 나에게 와서 "내가 신이오!"라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 지 생각해 봤다. 음, 그가 심리 상담가라서 일까 아니면 내가 일반 사람이라서 일까? 나는 야콥과는 좀 달리 반응했을 것 같다.
"이제는 신도 세상의 모든 걸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소." 그의 미소가 서서히 우수 어린 표정으로 변해 간다. 그는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본다. "이건 진실이오, 야코비 박사. 나는 정말 그렇단 말이오." 그가 몸을 내밀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난 신이오. 우리끼리 얘기지만 난 많이 망가졌소. 당신이 날 도와주면 좋겠소. 야코비 박사."
"전지전능한 절대자?" 바우만이 이렇게 반복하고는 이 말을 음미한다. "안타깝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요. 나는 더이상 전지전능하지 않소. 지금도 그렇다면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겠소?"
"신이 노름꾼이라고요? 거참 흥미롭네요. 예전에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나도 알아요. 아인슈타인은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인간이죠. 신은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룰렛도 아주 좋아해요. 블랙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끔 포커도 쳐요. 생각해 봐요. 도박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 같은 족속을 만들 생각을 했겠소?"
졸지에 자칭 '신'이며, 타칭 '사칭가'인 아벨의 심리 상담가가 된 야콥은 아벨에 대한 상담을 하기 위해 아벨과 함께 하는 여행을 떠난다. 아벨은 야콥을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뒤흔든다.
아벨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고, 실수투성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으로 나온다. '신'에 대한 많은 관념들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유머있는 표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신'이라 주장하는 아벨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러번 던졌어. 선은 뭐지? 악은 뭐지?" 아벨은 피곤하게 위스키를 홀짝거린다. "이 술도 어떤 상황에서는 약이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개망난이로 만들기도 해. 돈도 그렇지 않아? 사람들은 돈으로 진짜 슬기로운 물건들을 많이 구입하지만, 돈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릴 수도 있어. 아무리 아름답고 고결한 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추악하고 비열한 것으로 바꿀 방법이 있다고." 아벨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래. 내 상황이 그래. 나는 세계사를 인간과 함께 건너오면서 모든 걸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어? 헛수고였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 결국 나는 완전히 실패했어. 세계를 둘러봐! 어디에서건 굶주림과 전쟁, 자연 재앙, 탄압, 불의, 환경 파괴가 판을 치고 있잖아. 또 뭐가 있지?"
나는 침대 위에서 피곤한 몸을 간신히 버틴다. "아벨, 이 세상이 꿀처럼 달콤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어. 어쨌든 이 행성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인생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아벨이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내가 이런 어리석은 망상을 버리면 아주 잘 살 수 있다는 뜻이군."
"뭐.... 생각해 봐. 불행한 신으로 사는 것보다 행복한 서커스 광대로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어?" 내가 약간 목소리를 높인다.
"불행하더라도 난 신이야. 신으로 살 수밖에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고?" 내가 되묻는다. "신도 돕지 못하는 일을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돕겠어?"
아벨이 몸을 내민다. "야콥, 인간들 없이는 내가 뭐겠어? 인간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을 때만 움직일 수 있어. 아무도 선에 관심이 없다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그게 바로 내 문제야.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무기력증은 믿음을 잃어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어. 이해하겠어? 나의 탈진은 곧 세상의 탈진이고, 나의 의욕상실은 곧 세상의 의욕 상실이야!"
침묵. 나는 생각한다. 아벨이 아주 근사한 이론을 짜 맞추어냈어다고. "내가 자네를 위해 정확히 뭘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게 분명해. 인간들이 다시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그 실수가 뭔지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줘."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전에 자네가 나를 먼저 믿어 줬으면 좋겠어. 내 심리 치료사조차 나를 미치광이로 여기는 마당에 내가 어떻게 인류에게 나를 믿으로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아벨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을 열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망상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그를 치료할 수 있다는 논리는 정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영리한 노림수다.
그가 웃는다. "잘 생각해 보게, 야콥. 나는 자네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잘됐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쩜 이리 인간적인 질문인지. 나는 이 단락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아벨의 모습과 작가의 고민을 볼 수 있었다. 저자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 아벨만 보자면, 무기력하지만 인간을 위해 뭔가 해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일 것 같다. 더불어 유머있고, 도움을 청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겨우 20년 갖고 뭘 그래? 물고기 한 마리가 용기를 내어 뭍으로 올라오기까지도 수억 년이 걸렸어. 게다가 난 할 일도 무척 많았어."
"코미디" 아벨이 밝게 대답한다. "영화에서는 인생의 수수께끼가 다 해경 되잖아. 이거 누가 한 말인지 알아?"
"모르겠는데."
"그랜드 캐니언의 스티브 마틴이 한 말이야."
"그래서? 자네는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나?"
아벨의 몸 안에 갇힌 '신'은 '아벨'이 되어버린 듯 했다. 세상에, 죽기가 두려운 '신'이라니... 정말 웃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력에 읽으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보면 유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고민과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으며 성찰이 있었다. 둘 다 잡기가 쉽지 않은데... 아벨이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멋진' 것은 사실이다.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늦은 오후다. 이젠 깨끗한 속옷도 가져왔고, 집에 가면 와인과 미식가의 식탁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함께 만찬을 즐길 사람도 있다. 그것도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상상인 건 분명하다.
"아니, 그럼 그것 말고 믿을 게 뭐가 있소? 감정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이 지식이 아닌 사랑과 행복, 우정 같은 걸 동경하는 거 아니겠소?"
나는 방금 깨달은 게 있었다. 아벨 바우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벨이 내게 보여 준 것이 진짜 기적이든 눈속임 마술이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벨의 체험이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이 있다고 해도 더 이상은 신에게 요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야콥은 아벨의 과거를 되짚으면서 그 자신에 대한 것들도 생각해 보게 된다. 삼촌에게 받은 거액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이혼한 아내, 매일 술을 드시던,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명예를 중시하고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을 지키는 은행가가 된 동생을 예뻐하며 가난한 심리 상담가인 야콥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 훌륭한 은행가로 성공한 듯 하지만 결국 범죄자가 되어 쫒기게 된 동생.
흥미로웠던 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이었다. 야콥은 아벨에게 그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없었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달라고 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좋아졌을까 더 나빠졌을까? 만약은 만약이기에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 장면에서 솔직히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스쿠르지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봤지만 야콥은 자신이 없는 현재를 봤다는 게 좀 다르달까?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신의 죽음을 다뤘다는 것이다. 신이 죽다니... 신이 과연 죽을 수 있을까? 죽는 존재를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있을까?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신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가? 죽음이 두렵다고 했던 아벨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솔직히 너무나 갑작스런 전개였다. 그렇게 아벨은 나타난 듯 사라졌다.
나는 물 속으로 잠수하는 그의 뒷 모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그러나 정리가 쉽지 않다. 다만 침몰하는 호화 유람선 안에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하늘이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라이터가 고개를 들고 외친다.
"당연히 도와주겠죠!"
나는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인용구 중에 "아벨 바우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벨이 내게 보여 준 것이 진짜 기적이든 눈속임 마술이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벨의 체험이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하는 문장이 참 맘에 든다.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그가 신인지 미치광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야콥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다. 신의 윙크인 호화 크루져 여행에서 타이타닉처럼 극단적인 사고가 일어 난다.
과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은 불완전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일까?
나는 신은 물론 알 수 없고, 작가의 생각마저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안다.
이 책이 재밌다는 것 말이다.
나도 다시 차창으로 고개를 돌려 미친 듯이 휘날리는 눈송이를 지켜본다. 우리가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에도 수백 킬로미터씩 우주 공간을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믿기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