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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협찬 도서

# 매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 이유
단편소설은 여전히 어렵다.
잘 읽히는 작품도 있지만,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작품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해마다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이 문학상이 특별한 이유는, 한 해 동안 발표된 단편 가운데 등단 10년 이상 된 작가들의 작품만을 블라인드 심사로 선정한다는 점이다.
2025년 수상작품집은 2024년 7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주요 문예지 등에 발표된 104명의 작가가 쓴 총 131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했다.
그중 대상 한 편과 우수작 일곱 편이 선정되었다니,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수상작이 결정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와 깊이는 믿을 만하다.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또 다른 매력은
각 작품마다 작가 노트와 평론가의 작품평이 함께 실려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해한 이야기와 작가의 의도, 평론가의 해석을 나란히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소설집을 읽을 때마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한 첨예한 문제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내면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 김혜진 <빈티지 엽서> - 가장 몰입했던 이야기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소설은 김혜진 작가의 <빈티지 엽서>였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대학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이십 대 때는 번역가나 통역가를 꿈꿨다.
남편과는 “서로의 말이 서로에게 온전히 가닿는 경우는 드물고,
상대에게 도달하기 전에 방향을 틀고 변형되어 가느다란 실금을 남기고야 마는” 관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당뇨 초기 진단을 받고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실은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이미 드러난다.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정적 속에서
그녀가 무심코 거울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의기소침하고 수줍어하는 듯한
그 눈빛은
그녀의 눈과 만나자마자 놀란 듯
다른 쪽으로 달아나버렸다(157쪽)”
평범한 듯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첫문장이다.
이 남자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독자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운동법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헬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접근방식이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그녀는 그가 외국에서 사온 빈티지 엽서들을 함께 해석하게 된다.
주로 근처 카페에서 엽서를 읽는 시간은 그녀에게 특별했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정의할 때,
어떤 문맥을 설명할 때
그녀는 자신 안에 여전히 수준 높은 소양과 지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러면 과거의 한 시절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과 비슷했다(172쪽)”

그러다 헬스장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엽서 읽기를 그만두자고 하고 헬스장도 그만두게 된다.
어느 날, 남편은 서랍 속에서 그 남자가 기념으로 준 프랑스어 엽서를 발견한다.
"이게 뭐야? 읽지도 못할 걸 왜 가지고 있어. 서랍도 복잡한데."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었지만, 엽서에 적힌 글이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라는 내용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 그 말은 그녀가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이기도 했다.
남편은 비웃듯 말한다.
"고작 그런 말을 하겠다고 돈 들여 엽서를 보내다니, 어지간히 한가한 모양이군."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이, 그녀의 일상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커서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결국 엽서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는다.
나는 그녀의 인생이 참 마음 아팠는데,
외국어를 전공했다는 점,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더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본모습과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함께 설렜다.
하지만 그녀는 엽서를 다시 서랍 깊숙이 밀어넣었고,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그녀가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걸음을 내디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자전거 매장을 하며 겪은 일들을 책으로 쓴다든지, 혼자 여행을 떠난다든지.
그만큼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해 있었다.
이번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소설, 나에게는 단연 <빈티지 엽서>였다.
#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 가족이라는 미친 상황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가족간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인상 깊었다.
사실, 가족은 때로 가장 힘든 존재다.
모든 가족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어 자기 몫을 다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족 안에서는 언제나 문제적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프다든지, 경제력이 없다든지, 사업을 한다고 집안을 말아먹는다든지 하는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곁에는 희생하는 인물들도 있다.
말없이 인내하는 사람도 있고, 생색을 내면서 수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어려운 점은, 남이라면 마음에 안 들면 손절하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렇게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모를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과 집착이 드러난다.
소설 속 엄마의 말처럼, ‘미친 상황’이 펼쳐진다.
# 그밖의 작품들
대상작인 최은미의 〈김춘영〉은 내게 다소 어려웠다.
알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묘하게 알쏭달쏭한 느낌이 있었다.
작가노트와 평론을 읽어도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남는 작품이었다.
최진영의 〈돌아오는 밤〉은 최근 있었던 계엄 사태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갑자기 한밤중에 인적 없는 낯선 곳에 내던져져 폭력에 노출되는 주인공의 서사가 충격적이었다.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는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위안부 문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생과 그럼에도 무감각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일들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결국 일상에 파묻혀 무감각한 언니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소설은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하루하루의 일상이 달리 보이고,
일상의 사건들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는지 더 민감하게 포착하게 된다.
지금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검증된, 잘 쓰인 소설을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깊어지고 섬세해진다. 그래서 소설 읽기는 멈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