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렛 걸 동남아시아문학총서 시리즈 7
라티 쿠말라 지음, 배동선 옮김 / 한세예스24문화재단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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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도서


인도네시아 문학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만큼, 이 작품은 미지의 세계로 향해 열려 있는 문처럼 느껴졌다. 식민 지배와 가부장제가 공존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억압과 한계를 견디며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인도네시아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재현했다는 점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읽는 동안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서사적 깊이와 인물의 밀도가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부른 이름


이야기는 한순간에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인도네시아 담배 재벌 가문의 가장, 수라야는 임종 직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 — 정야 — 을 부른다. 세 아들은 그 이름의 주인이 과거 부모의 결혼식장에 나타나 등유 램프로 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쳤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이후 그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현재의 이야기와 과거의 서사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깊이를 더한다. 

임종의 순간까지 찾을 만큼 사랑했으면서 왜 두 사람은 끝내 함께 하지 못했을까? 작가는 이 물음의 답을 쉽게 주지 않는다. 소설의 3/4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밀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그 긴 기다림 자체가 이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서사의 원동력이 된다.


주인공 외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 - 이드루스 무리아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정야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오히려 정야의 아버지 이드루스 무리아였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노동자로 출발했지만, 자신의 빈곤을 저주가 아닌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 노역 수용소로 끌려간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앞으로의 사업을 구상하며, 큰 도시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행운으로 여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가 떠올랐다. 이드루스는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와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을 느끼며, 환경과 조건을 핑계 삼아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짓던 내 모습을 돌아보기도 했다. 


참고로 이드루스 무리아에게는 정말 꼴보기 싫을 만큼 끈질긴 따라쟁이 라이벌이 한 명 있는데, 후반부에 이 인물의 시점으로 기술된 대목을 읽다 보면 그에게도 나름의 억울함이 있었겠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시대의 연기 속에서 자신의 길을 만든 여자, 정야


정야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담배 조향사다. 

“여자가 만든 담배는 시큼하다”는 미신이 존재하던 시대에, 그녀는 오히려 최고의 담배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저자 라티 쿠말라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남성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고, 여성은 그 주변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그 시기의 한국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크레텍(담뱃잎에 정향을 섞어 만든 인도네시아의 전통 담배)을 만들 때조차 여성이 담배 맛을 망친다는 편견이 존재했지만, 정야는 바로 그 벽을 넘어 자신의 재능을 증명한다. 다만 소설 속에서 그녀의 활약은 재능의 크기에 비해 다소 짧게 그려져, 그 가능성을 좀 더 오래 지켜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아시아의 비극적 역사


이 소설의 배경은 인도네시아이지만,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일본 점령기, 그리고 독립 이후의 혼란기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징용으로 끌려가는 남자들, 전장으로 내몰리는 청년들, 그리고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모습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인간사의 반복을 떠올리게 한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 이 질문은 지금 읽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 vs 드라마


이 작품은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왜 이 이야기가 영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드라마를 전편 다 보지는 않았지만, 확인한 부분만으로도 원작과는 설정과 분위기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느껴졌다. 

드라마는 시각적 긴장감과 극적 장치에 초점을 맞춘 듯했지만, 소설의 전개는 그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서정적으로 흘러간다. 정야와 수라야의 사랑 이야기는 조금 더 길게 이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나는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

이야기는 거의 90% 지점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반전을 드러내며, 결말은 동화처럼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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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에도 크레텍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정향의 향기가 한동안 마음속에 머물렀다. 마치 긴 시대를 함께 지나온 것처럼.


저자 라티 쿠말라는 이 작품을 “여성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주인공 정야는 모든 시대에 필요한 여성상을 담아낸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작가의 할아버지 역시 크레텍을 만들어 판매하던 분이었다고 하는데, 돌아가신 뒤에도 집 안에는 늘 정향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 담배의 향기는 단순한 소재라기보다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을 읽으며 인도네시아 역시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겪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한층 더 가깝게 다가왔다. 낯설기만 했던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다.


라티 쿠말라의 다른 작품과 인도네시아 문학이 더 궁금해졌지만 아직 한국에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앞으로 더 많은 나라의 문학이 번역되어, 서로 다른 시간과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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