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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나는 여러 방면에는 관심은 있지만 정작 책은 특정 분야만 읽는다. 조금 흥미가 가는 분야-진화, 생물, 심리, 역사 등- 이런 분야는 구미가 당기지만 정작 도서관을 가면 투자, 경제 쪽만 어슬렁거리다 온다.
최근에는 부동산 투자 위주로만 읽은 것 같다.
이와 같은 편식을 일부 막아주는 게 서평 활동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신청하는 경우는 내 취향대로 택하지만, 출판사와 활동을 하면 내 의도와 상관없는 책을 접한다. 평소 같았으면 읽지 않았을 책들과 함께 할 기회를 가진다. 그런 과정 중에 읽기 싫어 덮는 경우도 있고, 재밌게 읽어 만족하는 책도 있다. 이번에 읽은 <대리사회>는 후자에 속한다.
지은이의 출간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필명을 통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첫 책을 냈다고 한다. 전작을 읽지 못했지만 <대리사회>를 읽으니 어떤 내용들이 들어 있을지 짐작이 간다. 저자는 대학을 그만두고 1년간 대리운전을 했다. <대리사회>는 지은이가 대리운전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의 집합이다.
(8쪽)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이 글은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가장 좁은 공간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사실 굳이 그 안과 바깥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마치 서로를 축소하거나 확대해 놓은 것처럼 닮아 있는 공간이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지은이가 경험한 세 가지 통제는 ‘행위, 말, 사유’ 이다. 타인의 차 안, 그것도 운전의 주체가 되는 운전석에서 오히려 통제를 받는 게 ‘대리운전’이다. 비단 대리운전만이 세 가지 통제를 경험할까? 직장인 또한 행동, 말, 생각에 대해 통제를 받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해도 몇 년간의 직장/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스스로가 행동을 점검하고 말을 가리고, 상사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조직 안’에서 저자가 말한 ‘주체성 가진 온전한 나’는 증명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나는 조직에서 ‘온전한 나’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에너지 소비가 매우 크며 스트레스가 수반되는 행동이다. 나는 조직 밖에서의 나를 ‘나’라고 본다.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 내가 하는 행위는 독서와 만남이다. 내가 모름을 알 때마다, 서로가 다름을 알 때마다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며 나를 생각한다.)
책 중간 글을 통해 저자의 대학 시간강사 생활을 엿 볼 수 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저자가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르치는 행위를 저자는 노동으로 바라본 것이고, 대학의 그들은 노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 생각 차이 때문에, 저자가 대학 보다는 거리로, 나오기로 선택한 것이리라.
책 내용 중에 공감한 것은 ‘유니폼’에 관한 이야기다. 몇 년 전 엄마가 상조공제에서 도우미로 일을 시작할 때, 옷을 돈 주고 사야 된다는 소리에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게 떠올랐다. 상조회 뿐만 아니라 대리기사 그렇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기로 한 것인데, 노동에 필요한 외적인 것을 노동자가 사야하다니... 아마도 상조 도우미든 대리기사든,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게 아니라서 그러는 것이리라.
자동차가 없기에, 대리기사를 호출할 일이 없기에. 내가 평소 접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본 책을 더욱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대리노동에 관한 주장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본 책은 재미있을 것이다.
(173쪽)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조해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성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회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