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극도의 긴장속으로 몰아넣은 인기척은 역시나 그녀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그런데
왠지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인기척의 주인공을 훔쳐보니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던 황박사와 정체불명의 신사였다.
“황박사, 오늘 둘러본 증강현실은 지난번 것보다도 훨씬 진화됐더군,”
“네. 감사합니다.다 의원님의 전폭적인 후원덕분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이곳의 보안은 철저히 하고 있는 거죠?”
“네, 의원님, 걱정마십시요. 이
증강현실에 한번 들어온 사람은 그 누구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의원이라고 불린 신사는 아까 복도에서 목격한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걱정스럽게 묻는다.
“갓
들어온 신입사원인데 아래층의 증강현실
구역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다가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황박사가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변명을 하자 신사는 정색을 했다.
“하여간
비밀유지에 각별히 신경써야 합니다. 내가 박사의 도움을 받아 지역구의 실업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야권에서
알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요. 그러면 내 대권(大權)도전도 끝장이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설사 만에 하나 이곳의 존재가 알려진다하더라도 수 천명의 실업자를 구제해주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요!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들은 오로지 인권만 따진단 말이요.”
“정말
답답한 자들입니다.대량실업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이런 획기적인 증강현실을 범죄시하다니……”
황박사의 목소리에는 과학적인 발전을 못 쫓아가고 고리타분하게 윤리만 거론하며 발목을 잡고 있는 고루한 사회에 대한
원망과 우울함이 가득 배여 있었다.그러자 신사는 황박사를 격려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있잖소? 특별한 투자와 고용창출없이도 증강현실만을 이용하여 수 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선사해준 당신의 능력을
내가 높이 삽니다. 이런 시스템을 전국으로 확장시키면 우리나라의 실업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소이다.이 골치아픈 자들만 빼고 말이요.”
신사는 턱으로 객석에 줄지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중얼거리자 황박사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떡이었다
“이들도
처음에는 증강현실에서만 근무했던 자들인데 가상의 캐릭터하고 서로 사랑에 빠져 혼인관계를 맺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가상현실에 가두어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현실과 증강현실에서 가진 기억들이 서로 충돌하니까요.”
“그
문제를 기술적으로 잘 해결해서 저들을 굳이 이 가상현실속에 감금하는 일이 없도록 해보시요.정 안되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각오해야 하겠지만……어쨌든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어 보시요. 내 대선의 승패가 달린 문제요.”
“네.저를 인정해주신 감사의
뜻에서라도 더욱 더 연구에 박차를 가해 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내겠습니다. 그래서 방의원님을 꼭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각하,”
“각하라니,쉿! 누가 들겠소?”
방의원이라고 불리던 신사는 자신의 성씨가 구체적으로 노출되자 새삼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며 경계했다.하지만 수많은 청중들은 스크린에서 만들어준 세계에 완전히 빠져있었기에 그들의 대화를 거의 귀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단지 관람객속에 숨어있던 혜영은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작동시켜 두 사람의 은밀하고도 엄청난 대화를 모두
빠짐없이 녹화하고 있었다.
“……!”
잠시 후 밀담을 나누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촬영을 마친 혜영은 그들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그녀는 황박사와 방의원이 은밀히 나누던 대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특히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그녀는 즉각 스마트폰의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그리고는 먼저 증강현실이라는
단어를 빠르게 쳐보았다. 그러자 증강현실을 설명해주는 여러 사이트창이 수많이 떴다.혜영은 그중에서 ‘두산백과’와
‘위키피디아’의 한 사이트를 열어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증강현실(增强現實:Augmented Reality)이란 사용자가 눈으로 보는
현실세계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현실세계를 가상세계로 보완해주는 개념인 증강현실은 컴퓨터
그랙픽으로 만들어진 가상환경을 사용하지만 주역은 어디까지나 현실환경이다. 증강현실의 가장 초보적인 예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면 인근에 있는 상점의 위치, 전화번호등의 정보가 입체영상으로 표기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가상현실(假想現實:Virtual
Reality)은 현실에서 존재하지않는 정보를 디스플레이 및 렌더링 잡비를 통해 사용자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미 제작된 2차원 3차원
기반의 가상환경을 보여줌으로 사용자가 현실감각을 느낄 수는 있지만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이런,”
사이트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증강현실와 가상현실에 대해서 이해도가 점점 높아갈수록 혜영의 얼굴은 황박사와 방의원을
향한 분노로 무섭게 이그러졌다.
백과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그동안 정호와 그녀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이상한 일들은 결국 고도로 진화된 증강현실
또는 가상현실의 그래픽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방의원 이 자식!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이 사람들을 희롱하다니…..”
미치도록 취업을 하고 싶어서 피눈물나도록 노력해온 정호과 같은 청년들을 증강현실로 데리고와서 속이다니……치를 떨던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