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떻게든 정호를 꼭 찾아돼.)

이튼날 혜영은 회사로 다시 출근하자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어제 일을 떠올리며 새삼스런 각오를 했다.황금색 원목으로 정갈하게 처리된 다소 미끄러운 로비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가 혜영은 마침 열려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안에 이미 탑승한 수많은 젊은 사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빨리 자신들의 사무실로 쏜살같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설만한 공간이 보이지않아서 조금 주저하던 혜영은 겨우 미안합니다라!라고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려고 했는데 앞에 서 있던 젊은 남자가 재빨리 손을 뻗어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으려고 했다.

, 잠깐만요!

깜작 놀란 그녀가 일단 얼른 한 발을 엘리베이터안으로 걸쳐놓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좀 같이 가요.

혜영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안의 남자들은 대부분 못 들은 체 했다.

다음 것 타요. 늦었어요.

조금 전에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으려고 했던 젊은 남자가 냉정하게 내뱉자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맞장구쳤다.

자리도 없구만. 그냥 올라갑시다.

, 빨리 문닫아. 첫날부터 지각할 수는 없잖아요.

누군가 냉정하게 고함치자 엘리베이터의 문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냥 밖으로 내밀린 혜영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그런데 무정하게 닫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중간에 딱 멈추어 섰다. 어떤 젊은 신입사원이 재빨리 발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걸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감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건강하고 수수하게 생긴 젊은 훈남이었다. 그의 앳띤 얼굴에서 아직은 순수해보이는 신입사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저 여자분도 첫 날은 중요할테니까 같이 좀 갑시다.

에이, 자리가 없잖아요!

자리야 조금씩만 양보하면 되죠.

그 말과 함께 젊은 훈남은 우격다짐으로 뒤에 서있던 남자들을 조금 밀어 부쳐 혜영이 들어설 만한 공간을 조금 확보해 주었다. 그리고는 남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 서있는 혜영의 팔을 재빨리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자리가 좁아지면서 여기 저기서 원성이 터져나왔지만 이윽고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그런데 정작 거북해진 것은 혜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자신을 태우는 바람에 뒤에 있던 신입사원과  등뒤에서 너무 밀착되었기 때문이었다.젊은 여자의 둔부와의 밀착을 피하려고 애쓰는 듯 뒤로 하체를 필사적으로 뒤로 빼는 바람에 허리가 아파오는지 남자의 신음소리가 혜영의 귓가로 밀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혜영은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엘리베이터가 사무실이 있는 5층에 서자 대부분의  사원들은 썰물 빠지듯 엘리베이터안에서  빠져나갔다.

혜영은 자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느라고 뒤에서 남다른 고충(?)을 겪었던 그 신입사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위해서 돌아봤건만 그 남자는 어디론가 휩쓸려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사라졌지?”

하여간 혜영은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일을 막 시작하려는데 팀장이 웬 젊은 남자를 달고 사무실로 들어섰다.그에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혜영은 흠칫 놀랐다.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사다운 배려를 해주었던 훈남이었기 때문이었다.

, 오늘도 신입사원 들어왔어요!”

혜영를 비롯한 직원들의 얼굴에 쫙 퍼진 궁금증을 이미 읽은 듯 팀장은 약간 장난스럽게 외쳤다.직원들에게 일일이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하던 훈남은 혜영을 금방 알아보고는 반색을 했다.

여기서 일해요?

놀라움으로 유독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보자 혜영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괜시리 화끈거렸다.

.아까는 고마웠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어요.

괜찮아요. 황제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혜영을 향해 활짝 웃음짓는 남자. 황제수라는 이름이 그녀의 마음속에  큰 소리를 내며 굴러들어왔다.

 

 

하여간 황제수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언뜻 언뜻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빈번해지면서 혜영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정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짐을 느꼈다. 그저 황제수의 젊은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혜영의 행복감은 더할 나위없이 커져갔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날 오후 혜영은 아침의 각오와는 달리 정호를 찾으러 다니지 않았다.

 

어쨌든 급속하게 황제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황제수를 생각하며 잠못 이루는 밤들이 점점 많아졌다. 점차 그녀는 그와 결혼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아늑하고 분위기있는 회사 구내 카페에 황제수와 오붓하게 둘이 있게 되자 혜영은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우리 결혼할까?”

결혼?”

황제수는 뜻밖이라는 듯 약간 흠칫했지만 곧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정말!”

혹시나 걱정했던 혜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황제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이윽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한데 시집오려면 다 버리고 와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어?”

다 버리라고?”

혜영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런 빛이 스쳐갔다. 황제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 내게는 당신만이 필요하거든.”

황제수의 달콤한 말에 혜영은 걱정스런 빛을 완전히 날려보내고는 다시 활짝 웃었다.

나도 당신만 필요해.”

이미 격정에 사로잡힌 혜영은 뜨겁게 반응했다.그러는 가운데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에 응어리로 남아있었던 김정호의 존재는 완전히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수의 목을 두 팔로 껴안던 혜영의 눈에 카페 문 저머로 김정호 비슷하게 닮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이 들어왔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왜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