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왔어.”
정호는 젊은 여자를 향해 지금껏 혜영에게 한 것과 다르게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 혜영은 불현듯 가벼운 질투을 느꼈다. 어쨌든 정호 부인은
이미 혜영의 방문을 알고있었는 듯 가볍게 응답을 하더니 혜영을 향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마치 한 마리 단아한 암사슴을 보는 듯 하여 혜영은 잠시나마 품고 있던 질투심이 슬그머니 엷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예요.”
핑크빛 앞치마를 깜찍하게 두른 정호부인은 얼른 혜영의 손을 맞잡고는
반갑게 안으로 끌어들였다.거실안은 온통 신혼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를 빠르게 둘러보는 혜영의 가슴에 또다시 질투의 불길과 안타까움이 잔잔히 퍼졌다. 알콩 달콩 사는 신혼부부의 보금자리에 괜히 침범했나 하는 죄책감도 들기도 했다.
“신혼부부가
어떻게 사나 훔쳐보러왔어요. 나도 시집갈 때 참고하
려고요.호호,”
혜영은 묻지도 않은 말을 미리 꺼내놓고 본인도 멋적은 듯 얼른 웃음
으로 때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건데 뭐 볼 것이 있나요?”
정호 부인은 정말 부끄러운 듯 귀밑까지 빨개졌다.그 모습을 정호는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혜영은 그것이 보기 싫은지 정호부인에게 방안살림도 구경시켜달라며
이것 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조근 조근 대답하는 정호의 아내는 영낙없는 여자였다.그러나 어떤 때는
한없이 여리기만 보이던 모습을 과감히 버리고는 야무지게 응수했다. 신혼살림들을 가볍게 둘러나고난 뒤
혜영은 정호에게 샘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정호야, 넌 장가를 참 잘 간 것 같다.호호,”
“응, 무엇보다도 아내는 내가 어려울 때 항상 힘이 되어 주었어.”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며 건네는 정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혜영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한때 일부러 정호를 구박했던 혜영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꾹 참았다.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슬며시 꺼내들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야.사진 한 장 괜찮지?”
당사자의 승낙도 구하지 않고 혜영이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정호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진을 찍으려고 그래? 남살스럽게.”
그리고는 얼른 손바닥을 펴서 스마트폰의 렌즈를 막아버린다. 정호 부인도
수줍은지 얼른 고개를 숙여버린다.그들의 완곡한 거부에 부딪친 혜영은 그들이 방심할 때 몰래 찍을 속셈으로
스마트폰을 빨강색 보자기가 펼쳐진 테이블앞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혜영은 20분 정도 조금 어색해진 수다를 떨다가 정호의 집을 나섰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방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혜영은 자신이 정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새록 새록 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연인을 빼앗겼다는 충격에 잠깐 일부러 지워버렸던 기억이 돌아오면서 한때 당혹스럽게 느꼈던 기이한 기분은 모두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여자로서 어쩔 수 없는 질투심으로 가득 채워졌다.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호부인이 여러 모로 자신보다도 뛰어났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정호의 신혼살림을 목격함으로써 가슴아픈
현실을 안고 살게되었지만 혜영은 자신의 기억을 온전히 되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자신을 달랬다. 혜영은
몇 시간에 많이 야위어 버린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담으며 터덜 터덜 소방도로를 한없이 걸어갔다.